15화. 클랜 창설 (4)
용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포효를 내지르듯이, 연우도 거칠게 울부짖었다.
[비마질다라가 감탄합니다.]
뇌기와 함께 터진 천둥도 똑같이 세상을 떨쳐 울렸다.
샛노란 뇌전이 세상을 가득 물들였다.
파지지직-
사방팔방으로 튄 뇌전이 단번에 튀어 오르면서. 주변에 있던 땅을 깡그리 밀어 버렸다.
하지만.
“이건 제법 쓸 만하다만.”
무왕은 가볍게 코웃음만 칠 따름이었다.
“멀었어.”
무왕은 〈쇄연〉과 〈백사토신〉을 섞은 손짓 한 번으로 뇌기를 너무 쉽게 밀어 버렸다.
“도구가 되라는 것은 함부로 다루라는 의미가 아니다. 겁을 먹지 말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적재적소에 임기응변으로 맞서란 의미지. 그러려면 좇아야 한다. 눈으로 적을 놓치지 않아야 해.”
연우로서는 자신의 전력을 쥐어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셈이었지만.
그래도 이때 나타난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 갔다. 〈단천〉에서부터 〈철토〉로 이어지는 8대 비기의 연격이었다.
검을 단련한 그로서는 비그리드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실력을 뽐낼 수 있었지만.
‘도구처럼.’
무왕이 방금 전에 했던 말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우는 쉬지 않고 그 말만 되뇌었다.
퍼버벙-
도구처럼. 검이 없다면 주먹을 쓰면 된다. 오른팔이 없다면 왼팔로 싸우면 된다. 왜냐고? 도구가 되었으니까.
연우는 그런 생각으로 악착같이 무왕에게 따라붙으면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눈’은 단순한 육안이 아니다. ‘감(感)’. 너의 감을 믿어라. 오감과 예감, 모든 육감(六感)을 하나로 모아서 상대를 절대로 놓치지 마라. 놓치지 않으면 보일 것이되, 놓치면 가려져 네가 당할 것이다.”
흘리고, 막고, 찢었다.
단순히 공격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념을 바로 눈앞에 있는 무왕에게 집중시켰다.
동작 하나하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숨결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했고, 어떻게든 쫓아서 빈틈을 찾아 찢어 버리고자 했다.
때문에 〈재생〉 스킬로 인해 새로운 팔이 돋아야 할 자리는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대신에.
우우웅-
모든 마력이 연우의 눈으로 들어가고, 의념을 단단히 강화시켰다.
그리고 의념은 육체를 정밀하게 통제했다.
[시차 괴리]
이따금 발동되는 시차 괴리는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하면서, 무왕을 예측하는 데 집중했다.
목표는 단 하나.
지금 눈앞에 있는 무왕을 꺾는 것에만 국한되었다.
육체, 마력, 정신, 의념. 모든 것이 무왕에게만 집중된 것이다. 다른 정보는 받아들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과도한 몰입 상태에 빠졌습니다.]
[경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과부화 상태에 빠졌습니다.]
[상태 이상, ‘망아(忘我)’ 상태가 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자아 손실’ 상태가 되었습니다.]
……
[비마질다라가 당신이 겪고 있는 상태 이상에 깊은 흥미를 느낍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이 어떻게 상태 이상을 극복할지 궁금해합니다.]
[만약 당신이 상태 이상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할 경우, 비마질다라가 크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유의하십시오.]
여러 메시지 따윈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뇌가 뜨겁게 타 버릴 것처럼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도구가 되어라.
연우는 그 말을 다시 되새겼다. 그를 보조하는 수많은 권능들이 세밀하게 압축되면서 공세 하나하나에 단단히 실렸다. 이것을 위해 모든 연산 장치에 과부화가 걸려 현기증까지 돌았다.
하늘 날개에서 번져 나온 여러 권능의 효과로 인해 공간이 이리저리 휘어지는 게 보였다. 용체 각성뿐만 아니라, 이것까지 전부 한꺼번에 통제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둘 중에 하나였다. 쓰러지던가, 뇌가 타 버리던가.
그러다.
언제부턴가 의식이 사라지고, 정신만 활동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기능만 남은 기계처럼.
도구가 되어라.
적의 명줄을 끊는 데 집중해라.
두 개의 명령문만이 연우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눈으로 좋아라.
너의 감을 믿어라.
그래서 무왕에게 퍼붓는 공격은 점차 간결해지고, 뾰족해졌다. 날카롭다 못해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베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를 따라 감돌던 지옥겁화도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화력을 더했다.
[극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상태 이상, ‘빈혈’ 상태가 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중상’ 상태가 되었습니다.]
……
[‘망아’ 상태가 더 악화되어 ‘사경(死境)’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미 옆구리가 터지고, 한쪽 안구가 부서져 핏물이 흘러내리는데도.
왼쪽 다리가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어도, 그는 악착같이 무왕의 빈 틈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 개의 굵직한 선과 수십 개로 이뤄진 엷은 선들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무공, 스킬, 권능.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 마법, 가호, 축복, 옵션들이었다. 전부 한데 어우러지지 못하고 난잡하게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연우는 제 딴엔 그 많은 것들을 알맞게 조합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단순한 조합에만 그칠 뿐, 그 이상의 효과는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것들을 하나로 섞고자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의념은 무왕에게 집중되었지만, 의식은 그 선들만 좇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단 하나의 선이 만들어졌다.
결(缺)이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에게 건넨 눈을 통해 보인 세상에 아주 크게 흥분합니다.]
[비마질다라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릎을 칩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연우는 강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타인에게 약점이 될 만한 결이 있다면, 그 선이 자신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왜 생각 못 했을까. 노력만 했다면 용신안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지웠더라면. 더 빠른 성장도 가능해 지지 않았을까.
‘아냐.’
그러다 연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이니까 보인 거야.’
무아지경. 혹은 몰아(沒我)라고 불린 지금이었기에 보였다. 무왕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했기에 이런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겨루지 않았더라면. 이것을 언제 엿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평생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님에게 더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그리고 부순다.’
연우는 거침없이 자신을 둘러싼 결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의 선택에 찬성합니다.]
[‘검은 구비타라’의 가호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합니다.]
쩌걱.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내면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연우에게는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부서진 틈 사이로, 카타르시스가 물밀 듯이 들어와 육체와 영혼을 휘감았다. 육체란 감옥에 금이 가면서, 여태껏 답답하게 갇혀 있던 영혼이 조금이나마 자유를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현저히 느려졌던 시간이 되돌아왔다.
무왕이 기특하다는 듯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꼬리를 잡았구나.”
연우는 금세 그 말뜻을 알아챘다.
이제야 이 대단한 육체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단 뜻이었다. 아직은 실마리에 불과했지만, 계속 단련하다 보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그 말은. 연우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인(眞人).
달인과 명인에서 이어지는 고수의 마지막 단계.
검을 쥔 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영역.
거기에 드디어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비마질다라가 크게 만족해합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성취감에 도취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결 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콰르릉, 시뻘건 불길이 압축된 검은 오러가 그곳으로 파고들면서 무왕의 팔을 가르고 그대로 좌측 가슴에 틀어박혔다.
퍽-
비록 뚫지 못하고, 겉가죽만 긁은 것에 불과했지만. 여태껏 상처도 입히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처음으로 연우의 입가에 만족에 찬 미소가 번졌다.
무왕도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덕분이었습니다.”
“당연하지. 이 몸이 그만큼 대단하니 너 같은 둔재도 이만큼 끌어올려 준 것 아니겠냐?”
연우는 무왕의 자화자찬에 쓰게 웃고 말았다. 사실 이것저것 잡다한 것을 섭취한 덕분에 강해진 자신과 다르게, 무왕을 가리키는 단어는 딱 하나면 충분했다.
천재(天才). 그런 그의 눈에, 연우는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
“그런데.”
“……?”
“그렇게 고마운 스승님의 옥체에 감히 피를 보게 해?”
무왕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고개를 비딱하게 외로 꼬았다.
“뒈질래?”
연우는 여전히 비그리드가 무왕의 가슴팍에 박혀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당황에 젖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건 불가항력이잖습……!”
“시끄럽고. 일단 좀 뒈지게 맞자꾸나, 제자야.”
퍽!
무왕은 왼쪽 팔꿈치로 비그리드를 옆으로 치워 내는 것과 동시에 주먹으로 연우의 복부를 거세게 후려쳤다. 연우는 순간 정신이 뱅그르르 도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도무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그런 연우의 귓가로. 무왕이 아주 사악하게 웃으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깜빡한 것 같다만. 네 앞에 있는 이 스승님 말고도, 네 스승은 여덟 명이나 더 있단다.”
“……!”
“참교육을 위한 시간을 좀 가지 자꾸나.”
연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뒤로 빠져 있던 다른 무왕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연우를 지근지근 밟아 대기 시작했다.
* * *
그그긍-
여태 동굴을 막고 있던 석문이 열렸다.
판트는 간만에 보는 햇살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 피식 웃고 말았다.
〈혈뢰〉를 단련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난 걸까. 폐관 수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 외부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형님이 드디어 돌아오고, 가면을 벗으며 세상에다 포고문을 던졌다지?
들으면 들을수록 통쾌하고, 가슴이 끓는 이야기였다.
형님이 얼마나 그 순간을 고대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가면을 벗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제 세상과 맞서 싸울 준비도 다 되었단 뜻이 아닐는지.
앞으로 형님이 가시는 길에 돌부리며 가시덤불이 가득할 건 분명한 일.
거기서 불어 닥칠 피바람이며 전운이, 자신을 얼마나 성장시키고 흥분케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잔뜩 기대되기 시작했다.
또한.
형님은 또 얼마나 강해지셨을까. 그게 못내 궁금했다.
자신은 강해졌다. 그건 분명했다.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일족 내 ‘천재’라 불리셨다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으리라 자부할 수 있었다.
혹시 형님이 나보다 약하시면 안 될 텐데,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처음 그들이 형, 아우라 불리게 된 계기도 힘의 논리가 먼저였지 않았던가.
‘그때는 내가 형님이 되어서, 아우님을 보살펴 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피식,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기까지 돌았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활짝 열린 입구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면을 벗은 얼굴이었지만, 그 특유의 눈빛 때문에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형님!”
자신이 나온다고 하니 직접 찾아와 주신 거구나.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방금 전에 자신이 형님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게 못내 미안해졌다.
그런데.
“……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우?”
연우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두 눈두덩이가 시퍼렇고, 뺨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옷도 여기저기 발로 짓밟힌 흔적이 가득했다.
어디서 실컷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판트.”
“왜 그러우?”
판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섰다.
자신을 부르는 연우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했다.
터벅.
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연우의 꼴이 꼭 좀비 같았다.
“그동안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너, 스승님과 많이 닮았구나.”
“……?”
“많이 닮았어…….”
“뭔……!”
판트가 어떻게 대답하기도 전에. 연우의 주먹이 먼저 날아들고 있었다.
참교육의 내리사랑이었다.
“억울하지? 나도 그래.”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