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41화 (441/862)

16화. 클랜 창설 (5)

“삼초오오온!”

세샤는 우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와 연우에게 와락 안겼다.

하루가 다르게 자랄 나이라서 그런 걸까. 거의 일 년 만에 만난 세샤는 이전보다 키도 훨씬 많이 자라 있었다.

연우는 그런 세샤가 너무 귀여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가뿐히 안아 올렸다. 회중시계는 방금 전부터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다독여 주려는데.

“……세샤야?”

세샤가 쀼루퉁한 얼굴로 연우의 양 볼을 꼬집더니 옆으로 쭉쭉 잡아당겼다.

“못된 삼촌. 그동안 왜 안 나타난 거야? 미워!”

“……어쩌다 보니.”

“금방 온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오래 걸렸어! 삼촌이 탑으로 금세 돌아왔었다는 거 알고 있었거든?”

세샤는 연우의 볼을 더 길게 쭉 찢었다.

연우는 속으로 쓰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란 건 키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똑똑한 아이이니만큼, 그동안 연우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일까.

이래서야 자신은 죄인이었다.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뭘?”

“하던 거. 어떻게 됐냐구.”

“잘 되고 있다.”

“그럼 용서해 준다.”

세샤는 한껏 젠체하면서 연우의 양 볼에서 손을 떼어 골반에다 척, 하고 얹었다. 연우는 그런 조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더 세게 꼭 끌어안았다.

“근데 판트 아저씨는 얼굴이 왜 저런 거야?”

그러다 세샤는 뒤늦게 연우 뒤에 있던 판트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트는 눈두덩이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연우를 한껏 노려보면서 달걀로 눈덩이를 문대는 중이었다.

하여간 저 빌어먹을 놈의 인성.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아버지랑 아주 똑같아, 아주. 그런 혼잣말도 같이 들렸다.

“혼자 자빠져서 그래.”

“응? 넘어졌는데 왜 눈이 다쳐?”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래도 한눈을 팔고 있었나 보다.”

“힝. 조심 좀 하시지.”

“그러게. 조심하면 됐을 것을.”

삼촌과 조카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판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연우는 여전히 모른 척하면서 단박에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머니는?”

“엄마, 나랑 같이 책 읽고 있는 중이었어! 내가 옆에서 읽어 주고 있었어. 잘했지?”

“우리 세샤, 다 컸구나. 엄마가 심심할까 봐 옆에서 책도 다 읽어 주고. 글자도 다 배우고.”

“응! 나 다 컸어! 엄마랑 같이 공부하는 것도 재미나!”

세샤는 연우의 품에서 내려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를 잡아끌면서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난타는 흔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덮인 담요와 발치에 놓인 책이 눈에 밟혔다.

“헤헤! 엄마! 삼촌 왔어! 삼촌이 이것도 선물로 줬다?”

세샤는 아난타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밝게 웃었다. 이쪽으로 오는 길에 연우가 선물이라면서 줬던 선물 상자를 보이면서 한껏 자랑하기 바빴다.

여전히 아난타의 눈은 초점이 잡히지 않고 흐리멍덩했지만. 세샤는 그녀가 자신을 보면서 웃어 주는 것처럼 재잘재잘 떠들어 대기 바빴다.

연우는 말없이 그 옆에 서서 물끄러미 아난타를 바라보았다.

우웅, 웅-

그러다 잘게 떨리기 시작하는 회중시계를 밖으로 꺼내면서. 한쪽 무릎을 꿇어 아난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난타.”

“…….”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거기선 정우와 세샤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테지요?”

브라함이 오래전에 지나가는 말로 그런 적이 있었다. 아난타가 점차 차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폐 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꿈’에 갇혔기 때문일 거라고.

근심과 걱정만 가득하던 바깥세상과 다르게, 그곳에선 아난타가 그토록 바라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난타는 무의식중에 그 세상을 나오고 싶지 않아 한다.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에 받을 정신적 충격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폐 증상에서 깨어나려면, 그런 두려움을 깨야만 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그런 건 아버지인 브라함도, 딸인 세샤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 주고, 위로해 주며, 이곳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을 무언가가.

그래서.

연우는 곱게 편 아난타의 손바닥 위에다 회중시계를 얹어 주었다. 딸칵, 하고 뚜껑이 열렸다.

째깍. 째깍.

회중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정우 녀석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는 여기서도, 녀석은 당신과 세샤를 지켜 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

아난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않았지만.

연우는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잘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고, 회중시계를 그녀의 손에 꼭 쥐여 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샤가 그런 연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삼촌, 삼촌! 아빠 와?”

“어. 곧 올 거야.”

“와! 진짜? 언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너무 멀리 있어서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까.”

연우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세샤를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난타와 세샤를 안아 보고 싶다던 동생의 말을.

* * *

“소중한 것일 텐데. 저것을 저렇게 주어도 되겠는가?”

세샤와 놀아 주기 위해서 모옥을 나서는 길에. 브라함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우를 보았다.

회중시계. 연우에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동생의 유품이 아닌가. 저대로 아난타에게 그냥 주어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준 게 아닙니다.”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이서 함께 지낼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일 뿐이죠.”

동생은 아난타와 세샤를 보고 싶어 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 와서 그 부탁을 들어주려 했을 뿐이었다.

연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모옥 쪽을 바라보았다.

* * *

연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째깍, 째깍-

아난타만이 홀로 남은 방에는 회중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을 흔들었다.

그때.

아난타의 초점 없는 눈이 회중시계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건 회중시계가 아니었다.

째깍, 째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가로 지난 일들이 스치고 있었다.

-아난타라고 했지? 반가워.

-아난타?

- 아난타…….

-고마워.

-가.

-다시는 얼굴 비치지 마. 다시는.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인사.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당황해하던 모습.

아버지와의 일로 방황하고 있을 때, 어쩔 줄 몰라 옆에서 노심초사해하던 얼굴.

저 사람은 나에게 열어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제는 정말 그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 다짐을 다시 확 풀어 버리게 만들었던 웃음.

모두가 떠난 뒤, 세샤를 내가 데리고 있노라고 말해 주기 위해서 찾아갔을 때 꺼지라며 모질게 목소리를 높이던 모습.

그리고.

-어떻게든 지킬게.

그런 정우를 보며 내뱉었던 자신의 말까지도.

그리고 그때 했던 말은 아난타를 구속하는 자물쇠가 되었다. 세샤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만 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 자신이 사랑으로 낳은 아이.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딸이었다.

그런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연우나 브라함이 추정하는 것과 다르게. 아난타가 보고 있던 것들은 정우, 세샤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꿈’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시리고 아팠던 지난날들이었다.

비록 힘들고 지쳤던 하루하루였지만.

누군가를 열렬하게 짝사랑했었고.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바쳐도 아깝지 않았던. 그래서 세샤를 보면서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지금 돌이켜 본다면. 그때가 그녀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회중시계를 손에 꼭 쥐었을 때. 왠지 모르게, 차가운 쇠의 느낌이 아닌 따스한 체온이 손끝에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의 망막을 항상 맴돌던 환상들이 유리창처럼 파편화되어 깨어져 나가고.

그 사이사이로 빛이 들어와 새로운 조각들이 생겨났다. 동시에 그것들이 퍼즐처럼 하나하나씩 맞춰지면서 회중시계가 조금씩 나타났다.

어딘가 낯익은 모습.

순간, 그녀의 귓가로 정우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듯했다.

-이거? 아, 형이 줬던 선물이야. 고향에서 생일 선물로 받았던. 예쁘지?

들판에 누워 만지작거리던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밝게 웃으면서 답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회중시계가 바로 저것이었다.

뚝.

뚝-

회중시계 위로.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여전히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동자였지만. 처음으로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 우야…….”

그리고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

우웅, 웅-

회중시계는 자신이 여기에 있노라고 말하듯, 가만히 울렸다.

* * *

“빠진 건?”

“없수다. 하고 싶은 건 있지만.”

“뭐지?”

“그 낯짝, 딱 한 대만 갈겨도 되우?”

“그런 거라면야.”

“오! 해도 되우?”

“물론. 서로 주고받는 걸로. 어때?”

“……됐수다. 일없소.”

판트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싫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이미 연우와 한 차례 손속을 섞어 본 뒤로 깨달았다. 그렇게 괴물 같던 형님은 더 큰 괴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더 재미있기도 했다. 저만한 전력을 가졌다면 충분히 탑과 전쟁을 치를 만할 테니까. 아버지에게 실컷 당했다지만, 애당초 아버지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마을을 나서는 길에는 에도라도 서 있었다.

신마도를 꼭 끌어안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판트는 그런 여동생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무언가가 있었다.

“하던 일은?”

연우도 그것을 느꼈는지 잠시 에도라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질문을 툭 던졌다.

에도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무리되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저도 제법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빨리 끝나서 다행이에요.”

에도라가 베시시 웃을 때 즈음. 판트는 뒤늦게 에도라에게 감돌던 낯선 기운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혹시…….”

“시끄러. 뒷말하지 마.”

“……으으음.”

판트는 말허리를 툭 자르는 에도라의 앙칼진 눈빛을 보고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깐족대거나 했겠지만, 그녀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지난밤 사이에 에도라가 겪은 일은 아주 상상을 초월했을 테니.

‘영접……. 에도라가 이제 완전히 차기 영매로서 입지를 굳히는 건가. 생각보다 어머니의 결단이 빠르신 것 같은데. 대체 뭘 보신 거지?’

언제나 생각이 몇 수나 앞서는 분이니만큼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냐마는.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자신이 〈혈뢰〉라는 아주 큰 무기를 얻었듯이, 에도라도 그만한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 연우와 아르티야에는 그만큼 큰 보탬이 될 터였다.

그리고.

판트는 문득 궁금해졌다.

연우의 말대로라면 아르티야는 이미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곧 흩어졌던 멤버들도 속속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했다. 아주 강하고, 큰 힘이 되어 줄 존재들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연우가 말한 ‘강하다’의 기준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는 또 어떻게 될까? 호승심이 마구 들었다.

과연 그중에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는 이들은 몇이나 될지.

연우에게는 패했을지언정, 무왕의 아들이 되어서 머리는 못 되어도 이인자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참에 서열 정리를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겸사겸사 자신의 혈뢰가 얼마나 통할지 확인도 할 겸.

그리고.

판트의 그런 바람은 얼마 가지 않아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다.

“뭐야, 저것들은?”

평상시라면, 탑 외 지역의 상업 지구를 그림자로 거의 뒤덮을 만큼 으리으리한 크기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부유성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상업 지구에는 통행인 하나 없이 조용했다. 대신에 거리에는 서로 칼을 뽑은 채 흉흉한 분위기를 내면서 대치하고 있는 두 무리들만이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하나는 아군, 다른 하나는 적군이라는 것.

아무래도 라퓨타를 보고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한 아군과 산하 조직을 희망하는 클랜들을 견제하기 위해 적대 세력들이 병력을 파견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적대 세력들이 라퓨타 침공을 시도하려던 중에, 아군 측이 힘을 모아 방비를 하려던 것이던가.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전투가 곧 벌어질 것처럼 보였다.

판트의 손끝이 간질간질해지려는데. 문득 적대 세력 쪽에 있는 한 녀석이 그의 눈에 밟혔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플레이어였다.

겉보기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전투로 단련된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저놈은 뭔가 위험하다고. 아주 불길하다고.

“……베이럭.”

바로 그때. 연우가 그렇게 중얼 거리더니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그곳으로 난입을 시도했다.

겉보기엔 평상시처럼 냉철한 듯 보이지만, 판트의 눈에는 그가 화를 단단히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우가 남긴 투기 때문에 살갖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뭐가 뭔지, 당최 알 수가 없지만.”

이에 뒤질세라, 판트도 히죽 웃으면서 바로 따라붙었다.

“시작부터 너무 재미있는데?”

파직, 파지지직-

콰르르릉!

피부를 따라 튀어 오르던 스파크가 강렬해지면서 핏빛 뇌기를 잔뜩 쏟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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