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42화 (442/862)

17화. 클랜 창설 (6)

칸은 손바닥을 그어 〈블러드 소드〉를 길쭉하게 뽑으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연우가 용의 미궁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움직였었지만, 계층이 폐쇄되어 발이 묶여 있다가 다시 탑 외 지역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헤븐윙이라, 헤븐윙…….’

이미 연우로부터 미리 언질을 들은 바가 있어 그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지만.

그래도 막상 헤븐윙이라며 나타나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헤븐윙이 일으키던 파란을 기억하고, 그의 슬픈 죽음을 추모하던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사실 도일과 손을 잡아 튜토리얼로 갔던 데에는 헤븐윙의 영향도 꽤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쌍둥이 형이 그보다 더 큰 파란을, 아니, 격진을 만들어 낼 거라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쿵쿵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칸은 라퓨타 앞에서 크로이츠가 이끌던 환영기사단과 조우했고, 함께 연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즈음 하이디라고 이름을 밝힌 엘프와 그녀를 따르는 세력도 마주칠 수 있었다.

‘숲의 아이들’. 칸도 이곳저곳에서 우연찮게 들었을 정도로, 최근 들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곳이었다.

단순히 전력적인 부문에서 대단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만한 전력은 탑 내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다른 클랜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숲의 아이들이 대단하다고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특성 때문이었다.

숲의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클랜원을 받아들이는 데 절대 차별을 두지 않았다. 탑 외 지역에 거주하는 낙오자들부터, 장사꾼, 네이티브, 각 층계에 가로막힌 거주민까지.

직업군도 다양했다. 음유시인, 과학자, 밀렵꾼, 밀매업자, 용병, 자유 기사, 떠돌이 마법사, 소수 종족 등 다양한 방면의 사람들이 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출신 행성도, 살아온 환경도, 추구하는 바도, 삶의 목적도 다 달랐다.

하지만 그들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자존심마저 꺾여 스스로 무기를 놓으면서 더 이상 ‘플레이어’라 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것.

보통 클랜들이 층계 공략이나 세력 확장, 권력 추구 등,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한 데 반해.

숲의 아이들은 그런 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그저 그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자 했다.

‘세상은 너희들을 버렸으되,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그것이 숲의 아이들이 내건 표어였다.

때문에.

탑의 지나친 경쟁에 지쳐 세상을 등졌지만, 사람의 따스한 온정을 그리워하던 많은 이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각 클랜과 랭커들은 그런 숲의 아이들을 괄시하면서 비웃었다. 못난 것들끼리 자기 위로나 하기 위해서 뭉친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인원이 점차 불어나고, 각 분야에서 한때 일인자의 길을 걷다가 은퇴를 했던 이들도 섞여 들기 시작하면서.

숲의 아이들이 가진 힘은 무궁무진하게 커지고, 세력도 삽시간에 큰 규모로 불어났다.

소속원들이 각 층계에 골고루 흩어져 있으며, 갖고 있는 직업도 다양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방면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각종 정보를 한데 모아 큰 정보를 이룬다든지, 여론을 선동해서 흐름을 만든다든지, 기존에 무력을 썼던 플레이어들이 공략대를 구성한다든지 하면서. 정보전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무력 조직도 겸비하게 되었다.

덕분에 여러 거대 클랜들 간의 충돌로 시끄러운 이때. 숲의 아이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의 수장이 몸소 찾아와 산하 조직이 되고자 한다고 한다.

칸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이디는 연우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라고 했으니까. 칸이 아는 연우는 ‘인성질’로만 유명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영 낯설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아르티야의 산하 조직이 되겠다며 찾아온 세력들은 꽤 많았다.

‘팔보 해적단’, ‘녹염의 별’, ‘저주받은 반달’, ‘소피의 세계’, ‘성광문’, ‘뇌혼신류’ 등…….

대개 과거 아르티야의 산하 조직으로 있었거나, 그에 준하는 인연이 있던 이들이었다.

헤븐윙이 되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아르티야가 재건되어 ‘왕’ 중 셋이나 죽인 사실이 알려지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끝없는 종말’이나 ‘철의 왕좌’처럼 4대 신진 클랜에는 들지 못했어도, 그에 준하는 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로서는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아르티야를 직접 관찰하고, 참여 여부를 판단하고 싶은 것이겠지. 아르티야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재편될 질서에서 차 지할 수 있는 비중이 달라질 테니.

덕분에. 칸은 하루아침에 달라진 아르티야의 위상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의 머릿속에서 헤븐윙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의 영웅’이거나, ‘날개가 꺾인 이카루스’, ‘떨어진 태양’이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찬란하게 떠올랐으나, 결국에는 모든 빛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노라고.

그 속에는 탄식과 동경이 담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 존재라는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누구도 쉽게 따라가지 못할 만큼 커다란 존재감을 뽐냈던 이에 대한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헤븐윙이라는 이름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또한 어둡게 번져 나가며 플레이어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중이었다. 되돌아온 헤븐윙이 행여 그를 비웃었던 자신들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시선이 너무나 많았다.

지금의 헤븐윙이 누군지 잘 알고 있는 칸으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여기에 있는 무리들은. 헤븐윙의 화려함과 지난날의 영광만을 쫓아온 하이에나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속에 담긴 어둠이 얼마나 음험하고 날카로운지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들이 있어야만 본격적으로 거대 클랜으로서 발돋움을 하고, 앞으로 있을 기나긴 전쟁을 버텨 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르티야의 아군이 되고 싶어하는 무리를 적대하는 세력이 나타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엘로힘과 마군이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칸으로서는 기절할 일이었다.

그가 아는 상식선에서 두 클랜이 손을 잡는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신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선민의식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엘로힘과, 다른 신과 악마들은 가짜이니 자신들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유일신 사상을 추구하는 마군은 절대 섞일 수가 없는 사이였다.

이전에 아르티야를 몰아낼 때 손을 잡기도 했다지만, 그때는 암묵적인 연합이었을 뿐이지, 직접적인 동맹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헤븐윙이라는 공통된 적을 없애고자, 지난날의 은원이나 사상 차이를 잠시 묻어 두기로 한 것이다.

특히. 엘로힘을 이끌고 있는 자는 칸으로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저기에 클랜 하우스가 있단 말이지? 그립군. 한번 보고 싶은데 말이야.”

아르티야의 유명한 배신자, 안티 베놈 베이럭이 손으로 턱을 쓰다 듬으면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베이럭은 자신을 조용히 노려보는 칸을 발견하고, 피식 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네가 새롭게 내 포지션에 있게 된 놈인가 보지?”

베이럭의 목소리는 아주 여유롭게 보였지만. 칸은 그 속에 숨겨진 살의를 놓치지 않았다.

‘베이럭은 아르티야에 원한이 강하다.’

원래대로라면 아르티야가 베이럭에 원한을 가져야 옳겠지만. 또 다르게 보면, 베이럭이 그렇게 악랄한 짓을 저지른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베이럭이 그런 독한 마음을 먹게 된 중대한 계기 같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칸은 그런 베이럭의 이유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 역시 아르티야에 몸을 담근 이상, 베이럭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돕겠소.”

“보잘것없는 힘이겠지만, 거들겠어요.”

크로이츠의 명령에 따라 환영기사단이 일제히 와이번을 소환해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숲의 아이들도 하이디의 지시에 맞춰 재빨리 무기를 꺼내면서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정이 급박해진 것은 다른 클랜과 파티들이었다.

“젠장, 이게 뭔……!”

“일단 뒤로 빠져야 하나?”

그들은 아직 아르티야로의 합류를 결정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여기에 온 건 어디까지나 아르티야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들을 돕는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들어 보며 거래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아르티야가 당장 날고 긴다고 한들, 다가올 대전쟁에서 자신들이 없다면 절대 전쟁을 길게 이어 나갈 수 없을 테니까.

당장 헤븐윙이 가진 전력이 ‘왕’ 급이라고 한들. 그리고 아르티야의 구성원들 면면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뿌리가 단단해 인재가 넘쳐 나는 화이트 드래곤이나 엘로힘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머릿수의 차이도 컸다.

그래서 이곳에 참여한 세력들 중 다수는 헤븐윙과 아르티야가 대전쟁에서 승리는 못 할지언정, 어느 정도 큰 기반은 확보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 안에서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판단하에 움직인 것이었다.

대부분이 아르티야와의 지난 관계 때문에 모여들었다지만. 이런 계산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소집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거래를 맺지도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정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아르티야의 편에 서 버린다?

그들로서는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이 엘로힘-마군과 척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자 하였지만.

처척-

“어딜 가려 하시는가?”

베이럭의 냉소와 함께 그를 따라왔던 군단이 일제히 타워 실드로 방벽을 세우고, 고슴도치처럼 그 사이사이로 장창을 뻗으면서 여러 클랜들의 이탈을 가로막았다.

무오병단(無誤兵團). 줄여서 ‘무오병’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엘로힘이 자랑하는 최정예 집단이었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철저하게 유리되어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오로지 엘로힘의 번영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마술(馬術)과 마술(魔術), 창술, 검술, 궁술, 방패술 등에 두루 능통해 여러 세력들로부터 두려움을 사는 곳.

이미 베이럭은 원로원으로부터 외부 인사 최초로 독재관이라는 직함과 더불어 ‘대장군’이라 명명되어 군사 권력도 위임받은 상태.

권력 집중을 그토록 경계하던 원로원이 드디어 포기하고, 그에게 모든 힘을 실어 준 것이다.

따라서 상명하복에 철저한 무오병단은 그의 명령에 따라 꿈쩍도 않았다.

두려운 점은 병사라면 흔히 가질 법한 투기조차도 녀석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아직 아르티야와 한배를 탄 것이 아니오. 그러니 보내 주었으면 하오.”

그때, 한 남자가 인상을 굳히며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철의 왕좌라는 작은 집단을 맡고 있는 하나탄이요.”

“‘블레이드 마스터’로군. 나도 익히 들은 바가 있지.”

철의 왕좌는 원래 용병 집단에서 시작해, 철사자와 의견이 맞지 않아 클랜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유명해진 군사 집단이었다.

특히 하나탄은 철사자와도 비견될 만한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자.

‘왕’ 급은 되지 못해도, 바로 그 아래는 자처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무오병단의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지나갈까, 고민하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렸다. 설마 그만큼 되는 존재를 막지는 않을 테니. 저들로서도 쓸데없는 피해는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 자신들은 철의 왕좌의 뒤만 따르면 될 듯싶었다.

하지만.

“그래서?”

베이럭은 어쩌라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필요한 충돌은 서로 피하는 것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나 보군.”

베이럭이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불필요한 충돌이라니. 그딴 게 있을 리 만무하잖은가. 아르티야와 관련된 것은 모두 지운다. 그들과 거래를 하는 곳, 하려는 곳, 의중을 갖고 있는 곳까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치워 버린다. 이것이 본 원로회에서 가결된 안건이자, 엘로힘의 목표다.”

“……!”

“……!”

“……!”

모두가 경악에 잠겼다.

단순히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적으로 삼는다고?

“그리고 마군도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기로 했지.”

여기에 베이럭이 완전히 도장을 찍어 버리자, 여러 클랜들은 인상을 굳히며 전투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철의 왕좌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하나탄을 보호하듯이 에워쌌다. 하나탄은 일행들 사이로 보이는 베이럭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것이오.”

“후회?”

피식.

베이럭은 그렇게 웃으며 반문을 하더니.

“헛소리 마라. 그딴 건 이미 끝낸 지 오래니. 오히려 그 말은 너희들이 할 말이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큽!”

그러자 갑자기 하나탄이 눈을 번뜩 뜨더니 제 목을 붙잡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마치 밧줄로 목이 매인 사람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입가를 따라 게거품이 잔뜩 쏟아졌다.

“클랜장? 클랜장!”

“왜 그러십니까!”

소속 플레이어들이 깜짝 놀라 하나탄을 붙잡았다. 몇몇이 재빨리 해독 포션을 건넸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독이었다. 어느새 베이럭이 하독을 끝낸 것이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챈 사이에.

그리고.

화아아-

베이럭을 중심으로 녹색 운무가 잔뜩 피어나기 시작했다. 짙은 산성과 맹독이 같이 섞여 있어 닿는 모든 것들이 지글지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도, 독 안개다!”

“젠장! 물러나!”

〈독 안개〉. 베이럭을 최고의 연금술사이자 독술가(毒術家)로 만들어 준 시그니처 스킬이 발동되었다. 많게는 수천 명의 목숨도 단번에 앗아 간다는 저주받을 스킬.

플레이어들이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고.

베이럭은 그들을 보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죽어라, 옛 망령들아.”

그렇게 독 안개가 번지면서 클랜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무오병단을 비롯해 마군 측도 움직이려는 순간.

팟-

칸이 앞으로 나섰다. 왼쪽 손바닥에 난 상처를 따라 쏟아지기 시작한 핏방울이 확 번지면서 또 다른 붉은 안개를 만들어 독안개와 맞섰다.

그의 특성에 기반한 스킬, 〈블러드 스트림〉과 72선술 중 〈확(擴)〉과 〈해(解)〉를 섞은 기술. 독 안개는 번지다 말고 도중에 붉은 안개에 가로막혔다. 두 힘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쿠쿠 -

“나타날 줄 알았지, 혈검. 그대라면 정우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흥은 될 테지.”

베이럭도 차갑게 웃으면서 칸을 잡기 위해 움직이려던 그때.

하늘에서부터 강렬한 불꽃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불벼락은 단번에 독 안개를 찢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것을 그대로 불살라 버렸고.

“카인!”

탄내와 매연이 자욱한 가운데, 그 사이로 나타난 연우가 단번에 베이럭에게로 쇄도했다.

베이럭이 지닌 동체 시력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때문에 베이럭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을 때에는 비그리드가 어느새 베이럭의 몸을 가로지르려 하고 있었다. 연우도 녀석이 자신의 공세를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바로 어제 무왕의 원영신에 상처를 입혔던 그 공격이었으니까.

바로 그 순간.

팟!

베이럭 앞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연우의 공격을 그대로 튕겨 냈다.

분명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지만, 맞받아친 힘도 그만큼 강했다.

연우는 인상을 살짝 구긴 채 불의 날개로 홰를 치면서 자세를 바로잡아 가볍게 착지했다.

“후우! 위험했군.”

베이럭은 간담이 서늘했는지 쓰게 웃으면서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연우의 시선은 증오스러운 베이럭이 아닌, 녀석의 앞을 꼿꼿하게 막고 서 있는 것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로브 사이로 언뜻 드러난 새하얀 날개.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다.

‘설마.’

그런 단어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그래서 연우는 애써 떠오르려는 불길함을 억누르며, 베이럭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뭐지, 저건?”

“아, 이것 말인가? 하하! 사실 자네를 만나면 바로 보여 줄 선물이 있었지.”

베이럭은 가볍게 웃으면서 로브를 꽉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니, 그에 걸맞은 서프라이즈가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일세.”

그리고 로브를 잡아당긴 순간. 연우의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다가, 이내 분노로 젖고 말았다.

“베이러어어어억!”

로브가 사라진 자리에는.

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은색 갑주와 새하얀 날개, 그리고 찬란한 검을 꼭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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