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클랜 창설 (7)
28층에 황량하게 남아 있던 연구소.
그곳에 있던 각종 연구 일지나 시약들을 살펴보아도, 당시에는 대체 베이럭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무언가 대규모 실험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항상 녀석이 말하던 ‘신인(神人)’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전부일 뿐.
그나마 한령을 중독시킨 독이 거기서 빚어진 결과물 중 하나라는 것이 추측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추출한 독은 여전히 브라함이 분석 중이었다.
물론, 알아낸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독, 아무래도 망량독(國麵毒)의 일종인 것 같네.
망량독.
구성 성분이 물질이 아닌, 영자(靈子)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 독이었다.
영적인 물질은 연금술 내에서도 대가 급의 인사가 아니면 절대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 하물며 이런 영적인 물질을 독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히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망량독은 만들기도, 다루기도 아주 까다로운 편이었다.
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학식이 탑의 세계가 구축한 문명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지만, 그런 그도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그리 넓은 지식 체계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판국에 베이럭이 망량독을 사용했으니.
브라함은 그만한 지식을 대체 어떻게 쌓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망량독이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연구를 토대로 하다가 얻은 부산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대체…… 무슨 연구를 한 것일까? 영혼을 다루려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지.
-다만,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연구소에서 가져온 기존 자료들과 비교를 해 보면, 영혼을 연구하기에 앞서 1차적으로 인체연성(人體鍊成)과 관련된 무언가를 시도한 흔적들이 보여.
-아무래도.
-호문클루스를 만들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만…….
호문클루스.
‘작은 인간’이란 뜻으로, 연금술사가 만들어 낸 인공 지성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브라함도 절반만 성공했을 뿐, 완전한 연성에는 실패했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 브라함은 그가 만들던 도중 중단한 육체에 연우가 칠흑의 권능으로 그의 영혼을 욱여넣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호문클루스를 만들었다고? 베이럭이?’
베이럭이 아무리 연금술사 출신이라지만, 그만한 지식 체계를 갖추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브라함도 갖지 못한 지식을 어찌 그가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연우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냉철한 이성과 예민한 감각은 베이럭을 보호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정우’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일말의 변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그것이 감정이나 이성이 없는 전투 인형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무엇을 토대로 만들어졌는지 알았기에,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더불어서 연우는 그동안의 의문이 자연스레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 설마 배신을 했던 이유가?”
“별 게 있겠는가. 다 이런 이유 때문이지. 단언컨대, 기실 내가 숱하게 보았던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자네만큼 ‘신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도 없었다네.”
당연하지 않느냐는 태도에.
고오오-
연우를 따라, 살의가 잔뜩 담긴 열풍이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베이럭은 그의 비원이었던 신인 연성을 위해 오랫동안 실험 재료를 찾고자 노력했고, 결국 여러 관찰 끝에 그 대상이 ‘정우’만 한 적합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배신을 한 것일 테지.
정우의 DNA를 얻기 위해서.
정확하게는 그 속에 저장된 유전 정보와 영자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정우를 둘러싼 벽은 아주 단단했을 테고.
그것에 금을 내기 위해서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였을 것이다.
정우에게 ‘홍련의 눈’을 꾸준히 먹이면서 중독을 시키는 한편, 보디가드나 마찬가지였던 발데비히에게 수작을 부려 곁을 떠나게 만들고, 아르티야의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켜 계속된 패퇴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르티야는 그렇게 서서히 몰락을 거듭하며, 끝내 정우까지 쓰러지고 말았으니.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는 계속 불어나 이 지경에까지 다다르고 만 것이다…….
화아아아!
지난날에 있었던 모든 사정을 다 깨닫게 되자, 열풍은 더 거세지면서 상업 지역을 전부 뒤덮고 말았다.
아르티야와 엘로힘-마군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서 있는 건 베이럭뿐.
처척-
연우가 내뿜은 열풍은 베이럭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역시나 정우를 닮은 호문클루스가 앞으로 나서면서 가로막은 것이다.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검을 바닥에다 찍자, 하늘에서부터 빛의 기둥이 내려오면서 모든 열풍을 비껴 냈다.
“따갑군.”
베이럭은 열풍에 의해 생채기가 난 볼을 매만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아무리 몇 년이 지났다지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는 거지? 성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특성이며 스킬, 가호, 축복 등등, 나와 있는 정보가 전부 이전의 자네와 다르지 않은가? 다른 사람인가 싶어도 생체 정보를 보면 틀림없는데 말이지.”
베이럭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자로서의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 차갑게 웃으면서 연우를 응시했다.
“그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더 말해 줄까?”
베이럭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원래는 자네를 산 채로 잡으려 했던 게 내 계획이었네. 한데, 그 게 실패해 버리지 뭔가? ‘홍련의 눈’을 그렇게 마시고도 그만한 힘이라니…… 놀랄 일이었지. 그만큼 버틸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원래대로라면, 계산이 맞았다면, 과거의 용이라 하여도 곧장 쓰러질 만큼 많은 양이었거든.”
연우는 더 이상 녀석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계속 듣고 있자니, 귀가 썩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확신을 얻었지. 이 탑 안에서, 과거에도 미래에도 자네만 한 원재료는 없을 거란 걸!”
광기에 서서히 젖어 가는 녀석의 눈을 본 순간.
콰아앙-
연우는 블링크를 밟으면서 단숨에 베이럭의 후방에서 나타났다. 독술가와 연금술사로서만 능력이 뛰어날 뿐, 체술에 있어서는 일반 랭커 수준에 지나지 않는 베이럭으로서는 알아차리는 게 한 박자 늦을 수밖에 없었고.
대신에 호문클루스가 재빨리 베이럭을 보호하듯이 에워싸면서 몸을 빠르게 측면으로 돌렸다. 손에 쥐고 있던 백색 검날이 사선을 그리면서 비그리드와 재차 충돌했다.
까앙!
맑은 쇳소리가 울리면서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쿠웅, 화아악-
거기서 풍긴 어마어마한 풍압(風壓)에 두 사람이 부딪친 지반이 그대로 무너지면서, 열풍이 다시 회오리를 치면서 올라갔다.
탑 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는 상업 지구는 단 한 번의 충돌로 3분의 2 이상이 소실되고 말았다.
“쉽지는 않을 거야. 이래 봬도 지금 자네 눈앞에 있는 건, 자네가 헤븐윙으로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의 데이터를 베이스로 하고 있거든.”
연우는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베이럭을 쫓고자 재차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 때마다 호문클루스도 빠르게 움직이면서 검격을 모두 비껴 냈다.
깡, 깡, 까앙-
콰앙, 콰앙, 콰아앙!
부서진 오러가 사방으로 튀고, 불길이 지면 곳곳에 크레이터를 만들어 냈다.
연우와 호문클루스의 격돌은 그만큼 막상막하였다.
“생체 정보만이 아닐세. 입고 있던 축복이며 권능, 가호, 스킬 등등…… 전부 따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민망하지 않을 수준 만큼은 맞췄지. 대략 70에서 80퍼센트 정도? 엘로힘이 꽤 많은 도움이 되어 주었어.”
대기가 지글지글 끓는 지옥도 같은 상황 속에서도. 베이럭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를 테면.”
가가가각-
“자네는 지금 과거의 자네와 마주치고 있는 셈이지.”
콰르르릉!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큰 폭발과 함께 분진과 매연이 흩날리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베이럭을 어떻게든 제거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샤논. 한령.’
「안 그래도 쫑알쫑알 시끄럽게만 떠들어 대서 짜증 나던 참이었는데. 좋았어.」
「놈의 목은 기필코 제가 베겠습니다.」
휘이익-
연우의 명령에 따라, 그의 그림자가 땅거미가 지는 것처럼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하늘 위로 삐죽 솟아올랐다.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베이럭을 잡기 위해서였다. 호문클루스가 뒤늦게 쫓아가려 했지만, 연우가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녀석의 발을 묶었다.
하지만.베이럭은 연우의 그림자가 촉수처럼 날아와 면전에 거의 다다랐는데도 불구하고, 흐트러지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만들어 냈는데, 설마하니 한 개만 만들어 내고 말았겠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이럭의 주변 공간이 흔들리면서 두 개의 섬광이 더 날아들었다. 그림자가 단박에 가로막혔다.
챙, 채앵-
그림자는 각각 샤논과 한령으로 변하면서 인페르노 사이트를 부릅떴다. 그들을 가로막은 것은 연우가 상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외양과 스펙을 자랑하는 호문클루스였다.
「이게 무슨……!」
「이 미친 것들이!」
그제야 연우를 비롯한 이들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베이럭과 엘로힘이 손을 잡고 해낸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잔학무도한 짓이라는 것을.
고대종 복원 계획. 엘로힘이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터득한 연구 성과와 베이럭의 광기 어린 집념이 손을 잡아 빚어 낸 결과는.
이토록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아무리 베이럭과 엘로힘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하더라도, 하이 랭커 급의 인사를 아홉 기나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지금 세간에 알려진 모든 하이 랭커나 ‘왕’ 급 인사들의 DNA를 채취해 클론 군단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랬다면 엘로힘은 진즉에 탑을 지배하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여태 왜 그러질 못했던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연우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동생의 클론 때문에 도저히 이성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강한 정신적 동요 상태에 빠졌습니다.]
[특성 ‘냉혈’이 불발되었습니다.]
[특성 ‘냉혈’이 불발되었습니다.]
웅, 우웅-
공간이 연속으로 울리면서 정우의 모습을 한 호문클루스가 속속들이 쏟아졌다.
넷, 다섯, 여섯…… 그렇게 쏟아진 개체가 도합 아홉 기에 다다랐을 때.
연우는 결국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베이러어어어억!”
[5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콰드득-
연우의 피부가 뒤집히면서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왔다. 분노가 단단히 어린 비늘은 빳빳하게 일어난 채 짙은 열기를 피우고, 채널링으로 연결된 모든 권능을 속속들이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제천류-뇌벽세]
[불의 파도]
[검은 구비타라]
그리고 비그리드를 아래로 거세게 내리긋는 순간, 쩌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공간의 균열을 따라 십여 개의 불벼락이 잇달아 아래로 쏟아졌다.
콰르르릉!
불벼락에서 튀어 오른 뇌기가 서로 연결되어 하늘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으며 대지를 강타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되게 만드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목표는 이쪽으로 몰려오는 정우의 호문클루스들. 화안금정이 밝혀진 용신안이 녀석들의 결을 좇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에게도 방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펼쳐라.”
〈망량독의 날개〉
〈망량독의 날개〉
……
베이럭의 시동어와 함께, 호문클루스들이 일제히 하늘 날개와 사뭇 비슷하게 생겼지만, 음울한 느낌을 풍기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새하얗게 빛나는 날개 속에는 여러 종류의 맹독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정우의 유전 정보를 극한까지 쥐어짜, 육체의 수명을 대폭 깎으면서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모티브가 되는 하늘 날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위력이었지만.
그래도 정우가 가진 가능성을 최대로 뽑아내는 만큼, 위력은 대단했다. 이런 것들이 아홉 개나 동시에 발동되니 일대는 화려한 빛의 명멸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연우의 분노를 더 거세게 부채질 했다. 베이럭은 동생의 클론을 도구,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나마 몇 년 안 될 게 분명한 클론의 수명을 강제로 소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화아아-
그리고.
〈망량독의 파도〉
녀석들이 ‘빛의 파도’의 구성식에 따라, 양손에 뇌기 대신 독기를 끌어 모아 터뜨렸을 때.
폭발은 독기와 함께 삽시간에 번져 나가면서 상업 지구는 물론, 탑 외 지역의 태반을 깡그리 ‘녹여’ 버렸다.
하지만 망령독의 파도의 응집체는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확산 되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연우가 화력을 더한 불의 파도와 뒤섞이면서 단숨에 하늘 위로 솟구쳐 높다란 기둥이 되어 모조리 갈려 나간 것이다.
쿠우우-
쿠릉, 쿠르릉-
그러다 모든 화력이 다해 불길이 내려앉았을 때.
호문클루스들 중 네 기가 모조리 갈려 나간 채, 다른 두 기가 겨우겨우 연우를 막아 내고 있었다.
베이럭은 호문클루스 세 기의 보호를 받으며 전장에서 멀리 이탈해 있었다.
여태껏 여유롭던 그의 얼굴엔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짜증과 함께 섞였다.
“……가뜩이나 괴물 같던 녀석이 더 괴물이 되고 말았구만. 아무리 클론(Clone)이라고 해도, ‘기어 다니는 혼돈’의 ‘잿빛 파편’으로 만든 것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줄이야.”
엘로힘이 지니고 있던 고대의 지식과 베이럭의 경험,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이 거래를 통해 건네준 재료를 바탕으로, ‘에메랄드 타블렛’의 지식 체계를 더해서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로힘이 모든 역량과 재산을 총동원해 겨우 탄생시킨 보물 중 태반이 이번 일격으로 모조리 날아간 것이다.
“본체를 상대하기엔 아직 무린가……. 좀 더 개량을 해야겠어.”
베이럭의 그런 혼잣말과 함께.
팟!
연우가 새롭게 날린 일격이 다다르기 전에 녀석은 어디선가 ‘개입된’ 기운과 뒤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무봉병단과 함께, 통째로. 공간이 ‘잘려’ 나가듯이.
그리고 베이럭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툭-
투둑-
녀석의 오른팔과 함께 추가로 잘린 호문클루스의 머리통 두 개가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