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영왕(影主) (1)
“부디…… 지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비희.”
“부탁드리겠습니다.”
봄의 여왕, 왈츠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이들을 보면서 인상을 굳혔다.
‘망상망귀’ 가라비토,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라이온 하트’ 리처드, ‘쌍둥이 살인마’ 잭과 리퍼…….
레드 드래곤을 상징하는 81개의 눈으로서, 한때 탑을 지배하다시피 하던 이들.
그리고 언제나 왈츠의 든든한 배경이자 동료로서, 언젠가 자신의 곁에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레드 드래곤을 통치할 손과 발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이었지만.
그래서 언제나 고고하고 오만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한낱 패잔병 신세가 되어, 형편없는 몰골로 살려 달라 요청하는 꼬락서니밖에 보이지 않았다.
탐을 따라 블랙 드래곤으로 전향해, 그녀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들.
애원 따윈 묵살해 버린 채, 단박에 목을 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세월의 무상함인가, 아니면 이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지난날의 인연 때문인가, 손이 쉽사리 움직여지질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왈츠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호크 아이.”
나지막한 부름에. 트로이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대는 어머니의 ‘눈’으로서 사실상 우리 남매들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눈’들의 수장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지. 그런데도 정통성이 있는 날 두고, 탐을 모셨던 이유가 뭐지?”
트로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왈츠를 바라보았다. 슬픈 기색이 눈가에 잠시 감돌다가,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 와서 변명을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마는. 멀리 있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제 눈의 탓이겠지요. 다만, 제 못난 눈은 가져가시고, 대신에 이들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저의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결정을 믿고 따라온 죄밖에는 없습니다.”
트로이는 슬픈 눈망울로 동료들을 보면서 간청했다.
“위대하신 어머니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비희께서도 잠시 길이 어긋났던 자식들을 사랑과 자비로 품어 주십시오.”
“…….”
트로이는 정말 바라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 떨어뜨린 고개를 올리지 않았다.
왈츠는 묵묵히 그런 트로이를 내려다보다가,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들은 하나같이 왈츠와 눈을 함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여름여왕을 곁에서 보필해,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는 ‘검노’ 하난이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담담하게 트로이의 뒤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었지만.
다른 녀석들은 왈츠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트로이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정말 그 하나의 희생으로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이 보였다.
피식-
왈츠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래. 이것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결국 어머니를 등에 업고 잘난 척만 할 줄 알았던 못난 놈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라비토나 잭과 같은 녀석들은 그녀의 실소를 웃음소리로 알아 듣고 혹여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었고.
왈츠는 가차 없이 구부리고 있던 손을 그대로 들어 횡으로 그어 버렸다.
촤아악-
트로이와 하난, 비스마르크를 제외한 ‘눈’들이 모조리 머리를 잃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 아아……!”
트로이는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작은 탄식을 흘렸다.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왈츠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설 자리를 어떻게 옮겨 가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구나, 호크 아이.”
순간, 트로이의 얼굴에서 슬픈 기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들켰나이까?”
“나는 간웅으로서의 총기를 잃지 않은 그대를 절대적으로 아낀다. 탐을 따랐던 것도, 그가 둘이나 되는 형제를 먹어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더냐?”
트로이는 미소를 거두고 이마를 바닥에다 찧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의 제 눈은 너무나 멀어 있었습니다.”
“멀었던 눈이야 교정해서 되찾으면 그만. 하지만 한 번은 용서할지언정, 두 번은 가납하지 않겠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하난, 비스마르크.”
갑작스러운 트로이의 돌변에 황망하게 있던 하난과 비스마르크도 황급히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도저히 왈츠를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패기(鬪氣). 그리고 카리스마.
이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모셨던 여름여왕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지배력이었다.
그런 기질을, 왈츠에게서 느끼게 된 것이다.
때문에 하난과 비스마르크는 그들이 했던 지난 선택이 얼마나 잘못되었었는지를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 연륜이 부족할 뿐이지, 왈츠는 이미 ‘왕’의 그릇을 갖춘 지 오래였다.
부족한 것이야 앞으로 시간이 알아서 채워 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부족한 것들이 다 채워졌을 때, 화이트 드래곤은 감히 새로운 레드 드래곤이라고 칭해져도 될 터였다.
지잉-
지잉-
더불어서 두 사람은 왈츠와 보이지 않는 고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속의 고리〉. 어머니 여름여왕이 81개의 눈들과 맺었던 마법으로, 주체가 지닌 힘과 권능을 나눠 주는 대신, 저절로 그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져가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왈츠의 종복으로서, 그리고 개가 되어 짖으라 하면 짖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말했듯이 나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호크 아이를 따라, 탐 녀석이 남긴 모든 것을 지워라.”
“명을 따르겠나이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비스마르크와 하난이 트로이와 함께 남은 잔당들을 정리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사이.
왈츠가 손날에 묻은 핏물을 손수건으로 조용히 훔치면서 뒤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수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이만하면 되었고. 그보다. 엘로힘과 마군이 정식으로 손을 잡았다고?”
“예. 그렇다고 합니다.”
순간, ‘혼군(昏君)’ 바르샨은 말을 하다 말고, 왈츠와 눈이 마주칠까 싶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녀와 계약을 맺은 아군이라 하여도, 지금 이 순간 왈츠의 눈, 특히 왼쪽 눈을 보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피캣(Copycat)〉.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왈츠의 ‘재능’, 즉, 타고난 특성 때문이었다.
카피캣은 한 번 본 물체 및 사람에 대해 분석하고, 그들의 행동과 습관을 모방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모방의 범위도 점차 넓어지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적으로 만난 대상에 대해서는 그들을 분석하여 약점을 잡아내기가 쉽고, 아군으로 만난 대상은 만약 뛰어난 실력자일 경우, 그의 노하우를 훔쳐 성장의 버팀목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뒷골목의 허름한 빈민촌에서 자란 왈츠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빈민촌은 질이 좋지 않은 이들이 가득하다. 때문에 왈츠처럼 어리고 약한 여자아이는 범죄의 대상에 노출되기가 너무 쉬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왈츠는 재능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을 어찌해 보려는 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쓰러뜨리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다.
너무나 더럽고 비루한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남기신 행복한 기억이 그녀를 지탱했고, 언젠가 외뿔부족으로 돌아가 지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목표가 그녀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이것을 지켜보던 이가 바로 여름여왕이었다.
그녀는 왈츠가 가진 재능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단번에 꿰뚫어 봤고, 딸로 받아들이면서 외뿔부족의 피에 자신의 피를 더해서 그 가능성이 화려하게 꽃필 수 있게끔 도왔다.
덕분에. 왈츠는 단번에 용생구자 중 맏이로서, 외뿔부족의 육체와 용체라는 특성을 겸비한 전후무후한 기틀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6차 용체 각성을 이루면서 재능을 뛰어넘는 새로운 과실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용성(龍聖)의 좌목(左目)〉. 넘버링 한 자릿수에 빛나는,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왈츠만의 유니크 스킬이 만들어진 것이다.
용마안과 카피캣이 결합하고, 용체의 특성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이 스킬은.
한번 점지한 대상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질수록 그가 가진 것을 차례로 ‘복제’ 및 ‘강탈’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생명체와 죽은 망자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왈츠는 휴식을 명분으로, 클랜의 모든 기능 정지 및 층계 폐쇄라는 극단적인 대처를 발표하여 전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고.
곧장 비밀리에 움직여 그린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영역을 침범했다.
층계를 장악하고 있는 화이트 드래곤과 다르게, 엘로힘과 마군, 혈국은 외우주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있는바.
아르티야가 전쟁을 치른다면 자신들이 아닌, 다른 세 곳과 먼저 충돌할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헤븐윙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제 갓 50층을 돌파한 새내기 랭커가 76층까지 단기간에 주파할 수는 없을 거란 예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혈국이 무너지고, 엘로힘이 큰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반대로 그녀가 있는 화이트 드래곤이 추가로 받은 피해는 전무했다.
이런 와중에 단단히 분기탱천한 엘로힘이, 그동안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던 마군과 손을 잡고 동맹군을 결성했으니.
왈츠로서는 76층에 가만히 앉아 그들이 부딪치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가, 때를 노려 어부지리를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왈츠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이점을 챙기고자 하였다.
삼파전으로 갈라졌던 옛 레드 드래곤의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이미 저들의 수장이 모두 줄줄이 나가떨어진바. 손쉽게 접수할 수 있을 거라 여겼고, 가장 먼저 블랙 드래곤을 공격했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이미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던 블랙 드래곤을 병탄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왈츠는 통합의 과정에 있어 숙청을 하는 데 전혀 미련을 두지 않았다. 필요 없거나 분란의 조짐이 있는 싹은 모두 잘라 내고,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들만 골라 냈다.
이번에 선택을 받은 자들은 트로이, 하난, 비스마르크.
트로이는 설 곳을 잘 아는 간웅이었고, 다른 둘은 무도가로서의 긍지가 더 강한 자들이었기에 품을 만했다. 다른 놈들은 등을 보이면 언제든지 칼을 꽂을 수 있는 놈들이었기에 미련 없이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왈츠는 용성의 좌목을 시전해 죽은 녀석들의 사체를 면밀히 관찰했다.
어머니 여름여왕이 그들에게 나눠 주었던 권능의 조각들을 수거하기 위해서였다.
찰칵, 찰칵-
심장 한편에서 무언가 조각들이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우우웅-
영혼이 잘게 떨렸다.
‘다음 각성까지 남은 회수분은 이제 15%.’
왈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작게 중얼거렸있다.
레드 드래곤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바로 7차 각성이었다.
‘7차 각성만 이룬다면, 용언 (Draconic)을 획득하는 것은 물론, 본격적으로 용으로의 폴리모프(Polymorph)도 가능해진다. 놈을 꺾으려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해.’
왈츠는 여전히 용의 미궁에서 있었던 연우와의 결투를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대부분의 권능이 봉인당한 채로 싸워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장의 한 수를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을 쳐야만 했단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도망은. 그녀에게 있어 과거 불우한 어린 시절에나 있었던 단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연우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5차 각성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와 동등한 수준을 이뤘다는 점이었고.
만약 그녀처럼 6차 각성을 이룬다면 필시 패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왈츠에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곳곳에 흩어진 어머니 여름여왕의 흔적들을 수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각성을 이뤄 ‘진짜’ 용으로 거듭나는 것.
그리하여 여름여왕과 같은 절대적인 힘과 권능을 보유하는 것.
비록 가장 큰 조각을 가졌을 형제들이 다른 곳에서 줄줄이 개죽음을 당해 빠른 복구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퍼즐을 하나하나씩 맞추다 보니 틀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어머니의 권능을 모두 복구하지는 못하더라도 7할 이상은 수복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이제 남은 건 그린 드래곤인가? 그곳으로 움직인다.”
헤븐윙과 아르티야가 엘로힘-마군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신속하게 움직여 이미 환상연대에 의해 지리멸렬한 그린 드래곤까지 모두 복속시킬 참이었다.
그런다면 어머니에 대한 숙원을 이루는 것은 물론, 7차 각성도 마무리할 수 있겠지.
‘헤븐윙…… 아니, 독식자. 조금만 더 그렇게 기분 좋게 날뛰고 있어라. 네놈의 목은 반드시 내가 가져갈 터이니.’
그런 혼잣말과 함께.
팟-
왈츠는 화이트 드래곤을 이끌고서 포탈을 타고 그린 드래곤의 영토로 움직였다.
* * *
쿵-
쿵-
콰직, 콰지직!
엘로힘을 보호하는 외우주, ‘위대하신 분들의 종소리’를 둘러싼 외부 결계가 계속된 차원 간섭으로 인해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이 깨질 것 같은 광경에, 엘로힘의 모든 클랜원들이 수성(守城)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 무너지려 한다! 결계를 어떻게든 보완하라!”
“아르티야가 침공을 시도한다!”
“전원 방어 태세를 갖춰라!”
아르티야의. 본격적인 침공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