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48화 (448/862)

23화. 영왕(影王) (4)

“으, 으으…….”

“도일? 도일! 정신이 들어?”

도일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억지로 눈을 떴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 속을 마구 유영하다가 겨우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 숨을 어떻게 쉬는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서서히 잡히는 시야 속에는 칸과 빅토리아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형과 형수였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타르타로스는 아닌 것 같은데.”

도일은 갖가지 마법 장비가 가득한 실내를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서 그는 분명 타르타로스에 있었다. 모시는 신인 페르세포네가 강림하고, 그녀가 대지모신의 힘을 드러내면서 사도인 자신도 덩달아 마력이 폭주했던 기억이 났다.

사도란, 신을 모시는 제사장과도 같은 것. 절대 신의 의지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야만 했던 뼈아픈 기억이었다.

천마에 이어서 대지모신까지.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신적인 존재들에게 마구 휘둘려야만 하는 건지. 도일은 언제나 늘 그것이 억울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이런 체질을 타고 나고 싶어서 난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

‘뭐지? 없어?’

도일은 뒤늦게 자신의 몸 상태가 평상시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거대한 영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거나, 없더라도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이들의 간섭이 있어 경계심을 바짝 세워야만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자신을 홀리려는 것들도, 간섭하려는 것들도. 천마와 대지모신은 물론, 자잘한 것들조차 전부.

아니다.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하나.

아주 미약하지만, 자신을 감싸 주는 따스한 것이 있었다. 마치 외부의 찬바람으로부터 아기 새를 보호해 주려는 어미 새처럼 포근한 손길. 다른 영적인 존재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손길이었다.

이를테면, 작은 불씨라고 해야 할까. 천마나 대지모신에 비하자면 턱없이 작고 왜소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강렬한 뭔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도일에게 낯익은 기운이기도 했다.

‘이건…….’

순간, 작은 불씨가 확 하고 번지더니 크게 활활 타올랐다.

“……카인 형?”

도일의 작은 혼잣말에, 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인이 도와줬다. 여긴 녀석의 클랜 하우스고.”

그제야 도일은 기절해 있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인 형이 대신 내 채널링을 전부 끊어 줬구나.”

“맞아.”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

칸은 도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도일은 아나스타샤도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칸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면서 연우를 찾았고, 연우는 도일의 상태를 한참이나 살피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해 보지.

거기서 연우가 어떤 수를 썼는지는 칸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연우가 아주 잠깐 손을 썼고, 도일의 안색이 곧바로 평온해진 것으로만 보였으니까.

다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미친놈들이로다’라는 말만 중얼대면서 훌쩍 떠났을 뿐. 빅토리아를 돌아봐도, 그녀 역시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게는 천마와 대지모신이 남긴 신력의 잔재가 계속 남아 있었어. 채널링이 강제로 끊어지면서 남은 단말(端末)은 계속 내 영혼을 감염시키거나 흩뜨려 놓고 있었고. 카인 형은 그런 단말을 말끔하게 제거해 준 거야.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칸은 그제야 도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말의 완전한 제거.

말이 쉬울 뿐이지,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미 도일의 영혼과 상당히 많은 동화가 이뤄졌을 테니까. 자칫 잘못하면 단말을 제거하다가 도일의 영혼이 손상될 가능성도 매우 크다.

하물며 그런 단말이 하나가 아닌 두 개였고, 그마저도 천마와 대지모신이 남긴 것이었으니. 일개 필멸자가 손을 댈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연우는 그것을 해치웠다.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가 연우의 처치를 보고 훌쩍 떠나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이미 영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도통(道通)한 건가? 신성의 조각을 얻고, 신위를 계승한 건 그냥 해낸 게 아니었던 거로군……. 조만간 탈각을 이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연우가 하데스부터 죽음의 왕좌를 물려받은 것이 결코 우연한 사건이거나, 하데스의 변덕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애당초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단 뜻이겠지.

탑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혼을 다룬다’는 개념에 있어서는 연우를 능가할 수 있는 이가 없지 않을까.

그렇기에 연우는 도일을 완전히 치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큰 두 단말이 빠진 자리를 그냥 두면 내가 위험해질 테니…… 그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채운 것 같아.”

“너, 그 말은?”

“응. 아무래도 카인 형이 날 사도로 삼은 모양인데……?”

그 말과 동시에.

화륵!

도일의 손바닥 위로 검푸른 불길이 살짝 타올랐다.

성화. 이제는 연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불길이었다.

“내가 아마 최초로 필멸자의 신도가 된 게 아닐까? 이것도 나쁘지 않은걸.”

도일은 배시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연우는 아직까지 다른 신이나 악마에 비하면 ‘격’이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를 둘 자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고 넘쳤다.

제대로 개화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음의 왕좌를 갖고 있는 이였으니.

‘이렇게 된 김에 나를 시작으로 아예 신앙 체계를 갖출 준비도 하려는 게 아닐까?’

사도, 즉, 제사장을 임명했다는 것은 그를 필두로 교단도 창립할 수 있다는 뜻.

교단의 성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앙 체계도 확고하게 변할 테니, 신에게는 크나큰 힘이 된다.

도일은 앞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의무가 무엇이고, 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다시 누군가의 수족이 되어 버린 셈이었지만.

만약 이런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천마나, 호시탐탐 간악한 짓만을 벌이려 하는 대지모신 따위보다는 연우가 훨씬 믿음직스러웠으니까.

그리고 도일이 봤을 때. 연우는 앞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왕’의 자격에서만 그치지 않고, 77층의 ‘벽’을 뛰어넘고, 98층의 ‘신좌’에도 도전해 언젠가 대지모신이나 천마 등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다면 그를 모시는 자신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지.

누군가가 듣는다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겠지만.

오랫동안 여러 신과 악마들을 거치고, 그들을 접해 봤던 도일이었기에. 도리어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가졌기 때문일까.

마음 한편에서 타오르던 연우의 불길이 여전히 어지럽던 정신을 맑게 정화시켰다. 어둠이 물러나면서 혼수상태에서 벌어졌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하나씩 비쳐졌다.

주인을 잃은 단말을 먹어 치우려, 그의 육체를 탐하려 다가오던 무수히 많은 신과 악마들의 손길이 떠올랐다.

근원도, 소속도, 계급도 전부 다르던 손길. 그들에게서 풍기던 사념도 어렴풋이 기억나던 그때.

“……!”

도일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쭈뼛 세우고 말았다.

“왜 그래?”

칸은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도일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다른 부작용이 있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일이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위험해.”

“뭐?”

“카인 형이 위험하다고!”

도일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도 모자라…… 저딴 탕부와도 손을 잡았던 거냐? 가지가지 하는군.”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남긴 파편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배후에 대지모신도 두고 있는 베이럭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기어 다니는 혼돈과 대지모신이라.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자신이 알기로 개념신과 타계의 신은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탑의 법칙과 진리를 규정하는 개념신과, 외부에 존재하여 온통 인지할 수 없는 무질서와 혼돈으로만 가득한 타계의 신. 절대 양립할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베이럭은 그런 짓을 잘도 저지르고 있었다.

아니, 대지모신을 독차지한 건 비에라 듄이니, 어쩌면 그런 상식으로 갖다 댈 게 아닌 걸까?

[대지모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지모신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예리한 시선으로 연우를 관찰하기만 할 뿐. 그것이 연우는 못내 불쾌하기만 했다.

대신해서 대답을 한 건, 오히려 베이럭이었다.

“탕부라니. 그래도 한때 자네와 살을 섞기까지 했던 사이일 텐데,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아직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대지모신이 말하지 않았던 걸까? 베이럭은 여전히 연우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연우는 굳이 그런 착각을 바로잡아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베이럭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자네의 착각을 한 가지 정정해 주고 싶군. 일단 순서가 반대일세. 비에라 듄과 손을 잡은 게 먼저였고, 그다음에 그녀를 대지모신으로 올려 주어, 기어 다니는 혼돈과도 거래를 틀 수 있었던 것이라네.”

“아르티야에 있을 때부터?”

“그런 셈이지.”

“배신자와 탕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야. 어떻게 그렇게 딱 맞는 인간들끼리 의기투합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연우는 아르티야의 내분에 있었던 흑막을 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베이럭이 혼자서 그 많은 일들을 저질렀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비에라 듄과 처음부터 함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에라 듄은 베이럭을 대신해 동생을 중독시켰고, 베이럭은 비에라 듄이 가져온 영혼석을 탐구해 그녀를 대지모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비에라 듄은 베이럭을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로 이끌어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니!

비에라 듄은 천계에서, 베이럭은 하계에서 각자가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여기까지 흘러온 모양이었다.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이 되어 타르타로스와 올림포스를 위협하고, 베이럭은 오랜 숙원이었던 신인을 만들기 위해 엘로힘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건가? 하! 우습지도 않은 일이군.’

연우로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가증스러운 것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연우로서는 내심 걸리는 점이 있었다.

[대지모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대지모신이 여기에 의지를 드러낸 이유.

아무리 그녀가 베이럭과 손을 잡았고, 연우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드러낼 법도 하다지만. 지금쯤 올림포스와의 전쟁으로 한창 정신이 없을 텐데?

혹시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걸까.

타르타로스를 떠난 이후의 일을 여태 알 수 없었기에. 연우는 내심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계의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츠츠츠-

그때. 베이럭의 옆으로 뿌연 안개가 일렁인다 싶더니 잔뜩 뭉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비에라 듄을 연상케 하는 형체였다.

그것은 실험실 내부를 크게 한 바퀴 돌더니 가장 안쪽에 있는 유리관 위로 살포시 내려앉아 부드럽게 껴안았다.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우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비에라 듄의 화신이 매만지고 있는 유리관 속에는 정우의 호문클루스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꼬락서니였다.

하지만 대지모신의 화신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쓰다듬듯, 인형을 보살피듯, 얼굴 부근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다시 연우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넌.

모. 른. 다.

역시나 개념적인 존재로 변했기 때문인지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연우는 용의 지식을 최대로 높이면서 녀석의 의사를 해석하고자 했다.

“뭘 모른단 거지?”

네. 가. 알. 기. 나. 알. 까.

이. 것. 은.

나. 의. 인. 형.

“뭐?”

나. 의. 배. 우. 자.

우. 리. 는. 운. 명. 이. 었.다.

대지모신의 화신은 연우가 분을 삭이거나 말거나,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우. 리. 의. 사. 랑.

잠. 시. 멀. 어. 졌. 지. 만.

이. 제. 는. 놓. 지. 않. 아.

방. 해. 마. 라. 인. 간.

칠. 흑. 은. 내. 것.

그. 러. 니.

너. 도. 내. 것. 이. 다.

왕. 좌. 를. 내. 놓. 아. 라.

그 말과 동시에.

대지모신의 화신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긴 울음소리를 냈다.

우-

우우-

필멸자라면 절대 들을 수 없을 영적인 주법(呪法). 연우도 죽음의 왕좌를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기에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대지모신의 요청에 따라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클랜 ‘아르티야’에 적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클랜 ‘아르티야’와 관련된 모든 동맹 단체 및 가호 사회가 ‘올림포스’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았습니다.]

[클랜 ‘숲의 아이들’이 ‘올림포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클랜 ‘철의 왕좌’가 ‘올림포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클랜 ‘녹염의 별’이 ‘올림포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과 ‘올림포스’ 간에 적대 관계가 성립하였습니다!]

[‘올림포스’가 당신에게 ‘시련의 굴레’를 예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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