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50화 (450/862)

25화. 영왕(影王) (6)

쾅!

연우와 티폰 등이 부딪친 순간, 강렬한 파장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 잔해와 실험 도구들까지 깡그리 날려 버렸다.

그리고 거대한 모래 기둥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그 끝에는, 이 좁은 곳에서는 제대로 된 전투가 힘들겠다고 판단한 연우가 하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비상하고 있었고, 티폰과 다른 기가스들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잿빛 안개에 둘러싸인 거대 촉수가 따라붙었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고층 건물보다 훨씬 크고 굵은 촉수는 베이럭에게서부터 시작되어 한계도 모르고 계속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촉수에 붙은 둥근 빨판을 따라 불길한 기운이 꿀렁꿀렁 토해지고 있었다.

쿠쿠쿠-

콰르릉, 콰릉!

외우주의 하늘은 연우와 그들 간의 격전으로 한층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천둥처럼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검은 불길이 하늘을 따라 가득 번지는 가운데.

“역시 우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하하하! 저 아이야말로, 저 몸뚱이야말로 신인에 가장 가까운 육체인 게 틀림없다고!”

베이럭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를 따라 광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이 촉수에 감염되어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하기가 힘든 형국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타계의 신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은 서열을 자랑한다는 우주적 존재로부터 축복을 받은 그는.

자신의 뇌리를 따라 휘도는 수많은 지식과 신력에 한껏 도취되어 주먹을 꽉 쥐었다.

신인을 탄생시키고 말겠다는 그의 숙원이 이제 바로 성공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이전에는 허망하게 놓쳐야만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헤븐윙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불운하게 눈을 감아야만 했던 형제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겠……!

칠. 흑. 을.

왕. 좌. 를.

가. 져. 야. 한. 다.

베이럭은 한껏 자신감에 고무되어 있다가,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영언(靈言)에 대지모신의 화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흥을 깬 것이 짜증 나긴 했지만. 베이럭은 굳이 그 점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다.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감염된’이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이제 ‘완전한’ 대지모신이 된 그녀의 심기를 굳이 거스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번 일이 끝나면,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신화(神化)의 간택을 받을 예정인 몸. 높은 격을 가지려면 그만한 품위도 미리 갖춰 놔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약속은 잊지 않는다. 저놈을 잡으면 육체는 내가, 영혼은 그대가 갖기로 한 것 말이지. 칠흑이 무엇이고 왕좌가 뭘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해. 그러려면 당신의 꼭두각시들이 일을 아주 잘해야 할 거야.”

약. 속. 은. 지. 킨. 다.

“그래. 이번에는 지켜야지. 겨우 얻은 신격을 걸었으니, 영락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걸 위해 영혼석까지 그렇게 날름 삼켰으면 말이야.”

베이럭은 오래전에 영혼석을 같이 얻은 뒤, 그것을 갈취하여 사라진 것에 대해 살짝 비꼬았지만. 대지모신의 화신은 일체 흔들림이 없는 표정이었다.

베이럭도 그녀가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양손을 활짝 펼쳤다.

“이곳엔 엘로힘의 모든 것을 공양하여 인과율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기가스는 내게 신인의 재료를 가져다줄 것이고, 마군 놈들은 곧 최후의 용왕이 남긴 유산을 차지하겠지.”

베이럭은 지금쯤 라퓨타를 급습하고 있을 마군 측을 떠올리면서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다 완벽할 적기는 앞으로도 없을 게 분명한바! 나는 어떻게든 반드시 이룰 것이다! 무엇이든!”

바로 그 순간.

콰아앙!

하늘에서부터 공간이 통째로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일대가 거칠게 격동했다.

신격쯤 되는 거대한 영혼이 부서졌을 때에나 일어날 법한 현상.

“끝났나?”

베이럭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그쪽을 보았다.

이쪽을 향해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헤븐윙이겠지. 그 육체를 두고 어떤 실험을 할까,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내린 마핵과의 융합을 어떻게 시도할까, 앞으로 할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가려는데.

쾅!

“……뭐지?”

베이럭은 자신의 발치에 추락한 게 뭔지 뒤늦게 알아보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뱀처럼 길쭉한 몸뚱이. 그가 복원시켰던 고대종, 고리 뱀이었다. 역시나 기가스 중 한 놈이 강신했을 게 분명한데…….

지금은 신력을 잃어버린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육체도 많이 쪼그라져 있었다.

아무리 하계로의 강림이라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고 해도, 육체가 육체이니만큼 플레이어 한 명 잡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순간, 베이럭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 * *

아-

아- 아아-

‘시끄럽군.’

드높은 상공에서. 연우는 자신을 따라, 아니, 하늘을 따라 쉴 새 없이 배회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칠흑의 후예이자, 사왕좌의 주인으로서 생사의 경계를 엿볼 수 있는 연우에게는. 외우주를 가득 채운 영혼들이 너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들이 내뿜는 짙은 원한과 절망까지도 전부.

베이럭과 대지모신이 외우주, ‘위대하신 분들의 종소리’에다 저지른 짓은 사실 너무 끔찍했다.

따지자면. 엘로힘은 일종의 도살장이었다.

죽은 이들이 전부 인과율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장소. 죽어서도 그들이 믿는 저승으로는 절대 가지 못하며, 구천을 한창 떠돌다가 오로지 대지모신과 그녀를 기리는 올림포스를 위한 재료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은 죽고 나서야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구슬프게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런 원한과 절망마저도 에너지로 치환되어, 이곳에 집단으로 내려온 기가스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는 점이었다.

엘로힘의 생존자들도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보였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베이러어어억!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몸이, 몸이 움직여지질 않아!”

“아아악! 내 힘이! 내 신의 인자가 모두 녹고 있어……! 안 돼! 안 된다고오!”

엘로힘의 플레이어들은 싸우다 말고, 언제부턴가 몸이 빳빳하게 굳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망량독.

베이럭이 어느새 그들 전부에게 먹여 두었던 여러 독을 일제히 격발시킨 것이다.

베이럭은 이미 과거에 용마안을 가졌던 정우를 은밀하게 중독시켰을 정도로 수완이 좋았던바. 당연히 엘로힘의 모든 플레이어들을 미리 중독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히 이때 쓰인 독은 그들이 지닌 잠재된 신의 인자와 신혈을 격발시키는 데 효과가 좋았다. 인신 공양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이 인성 더러운 형님 같으니! 내가 빤히 원로원으로 달려가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스킬을 뿌려 대면 어떡하우? 그리고! 그렇게 다 해처먹으면 대체 난 누구랑 싸우라고!”

그 외에도 판트를 비롯한 일행들이 길길이 날뛰고 있는 게 보였고.

「개판 오 분 전이군.」

「그만큼 할 일이 많아지는 거지. 그보다 주인님 쪽의 상황이 복잡하게 흐르는 듯한데.」

「그럼 넌 그쪽으로 움직여. 난 이쪽을 맡고 있을 테니. 디스 플루토!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샤논과 한령도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역할을 분담하면서 한번 잡은 승기를 계속 몰아 붙여 나갔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라퓨타 쪽에서는 여태껏 보이지 않던 마군이 기습을 시도하고 있었다. 마침 라퓨타에 상주하고 있던 칸과 도일, 빅토리아가 바빠지는 게 보였다.

선술을 이용해 이미 도통을 이룬 칸이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적들을 마주한 도일로부터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침입자 중에 도일을 대주교에게 ‘그릇’으로 바쳤다던 친부가 나타난 것 같았다. 그와 연결된 채널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듯.

외우주 ‘위대하신 분들의 종소리’는 완전히 연우의 권역화(權域化)가 이뤄진 상태였다. 덕분에 권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들이 초감각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 위에서 강신을 시도한 기가스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계라 그런가, 제법 강해졌어. 아니면 그 짧은 사이에 다른 뭔가를 얻기라도 한 건가?』

티폰은 거센 폭풍을 휘몰아치면서 연우를 압박했다. 다른 기가스들도 연우의 하늘 날개를 꺾기 위해 전방위로 공세를 가했다.

쿠릉, 쿠르릉-

전세는 비교적 치열했다.

원래대로라면 엘로힘의 인신 공양으로 생성된 막대한 에너지가 녀석들에게 제공되어 강신을 넘어 신격의 강림(降臨)까지도 이뤄져야 할 테지만.

『이딴 꼼수도 잘도 해 먹고 있구나! 어디 언제까지 그 수가 먹히는지 보자!』

기가스의 강림은 언제부턴가 단단히 가로막혀 있었다.

연우가 권능인 권역 설정을 이용, 인과율의 축적에 계속 훼방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기가스들은 일이 좀처럼 풀리질 않아 짜증이 단단히 난 상태였다.

강림은 더디기만 하지, 몰아붙이려 해도 권역화의 간섭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가해져 도저히 천계에서처럼 힘을 마음대로 낼 수가 없어 갑갑해 죽을 지경인 것이다.

반면에 연우는 하늘 날개를 펼치고, 죄악석과 드래곤 하트의 연동으로 사왕좌를 개방해 신격에 모자라지 않는 힘을 마구 발사하고 있는 상태.

그러다 보니 연우는 간간이 반격을 가해 기가스의 강림을 강제로 퇴거시키기도 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힘을 잃고 추락한 바르바로이가 그중에 하나였다.

이래서는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던 것과 다르게, 칠흑을 강탈하기는커녕 죽음의 왕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천계로 되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이래서는 르 인페르날과의 전쟁을 바로 코앞에 둔 상태에서, 몸소 위기를 무릅쓰고 하계에 나타난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조바심과 다르게. 연우는 시차 괴리와 권역화 설정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기가스들을 상대로 침착하게 승세를 계속 굳혀 나갔다.

하지만.

‘나도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연우도 일이 마냥 순조롭게만 풀리는 건 아니었다.

인과율의 축적에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고 해도, 완전한 정지는 불가능하다. 기가스와의 전투에 집중하는 것만 해도 그와 라퓨타의 연산 처리가 한계에 부딪힐 지경이었으니.

더구나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남긴 촉수가 계속 그를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대지모신이 침식(浸蝕)을 시도하면서 권역화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상황.

게다가 하늘 날개의 제한 시간도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신성의 부족이 가지는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지구전으로 들어간다면 연우가 불리했다.

물론, 이 판을 뒤집을 만한 패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게 없었더라면 애당초 이렇게 기가스들을 상대로 싸움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엘로힘을 제물로 바치고, 후퇴했을 것이다. 패퇴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는 숱하게 해 보았던 전략이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연우가 하늘 날개의 제한 시간을 소모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시간을 끌었던 것은. 계속 머리 한편을 간질이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가 내심 걸리는 건, 총 세 가지였다.

첫째. 기가스는 대체 무엇을 믿고, 르 인페르날과 멸망전을 앞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많은 신격들의 강신을 시도한 걸까?

아무리 티탄과 기가스가 천계에 오르며 신격을 되찾아 타르타로스에서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추었다지만.

르 인페르날의 아가레스나 바알만 하더라도, 절대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제아무리 티탄-기가스라 하더라도 그만큼 사활을 걸어야만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하계로의 대규모 강신을 시도했다. 그것도 수장인 티폰은 물론, 가장 큰 배경인 대지모신과 함께!

정말 단순히 연우가 가진 칠흑의 권능과 죽음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던진 걸까?

‘대지모신에 대한 대처도 이상하고.’

두 번째는 대지모신이 나타났는데 어째서 아스가르드나 데바를 비롯한 여러 사회들은 개입을 거부한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대지모신은 이미 여러 신화들에서 공통된 적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들과 전쟁을 치러 왔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올림포스를 차지하며 천계에 화려하게 나타난 이상, 다른 사회들도 단단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텐데.

그들은 공동 전선을 취하기는커녕, 한발 물러서면서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그리고 대지모신과 기가스는 그런 반응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대지모신과 다른 사회들 간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어째서 죽음의 신과 악마들도 지켜보고만 있는가.’

하늘 날개를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된 666명의 신과 악마들은 물론, 권능을 하사해 주었던 5천여 명의 신과 악마들 역시 꿈쩍도 않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자신이 하는 일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그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철저한 방관자적인 자세를 고수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그러는 이유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칠흑을 추종하면서도, 쉼 없이 연우에게 자격 여부를 묻는 이들. 이번 시련도 응당 칠흑의 후계라면 당연히 넘어야 할 난관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른 5천여 명의 신과 악마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연우에게 호의를 보이기에 앞서 각 사회에 소속된 몸이니 홀로 뜻을 세우기가 어려웠을 테지.

애당초 당연하다는 듯이 참전을 선언한 아가레스와는 포지션이 다른 것이다.

그래도 두 번째 의문과 마찬가지로 대지모신에 대해서 경계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건 확실히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보려 했지만.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이 어떻게 시련을 극복할 건지 살펴봅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시련 극복을 주시합니다.]

……

저들은 여전히 방관적인 자세 그대로였다.

‘원래는 의문이 전부 풀리면 시도하려 했지만.’

[00:02:11]

[00:02:10]

……

연우는 타이머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어쩔 수 없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더 이상 패를 무를 수 없어진 이상, 나설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연우는 얼굴을 찔러 오던 티폰의 공격을 크게 튕겨 내면서 대지에 착지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건물이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을 대지는 시커멓게 그을린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이제 꼼수가 바닥나기라도 한 것이냐?』

티폰은 그런 연우를 보면서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그의 힘이 많이 소진된 것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도리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냉소를 던졌다.

“아니. 이제 시작이지.”

『한낱 필멸자의 격으로 그 이상한 권능 집약체를 감당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한계? 당연히 있지. 하지만 너희들 덕분에, 평소에는 시도해 보지도 못할 만한 것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헛소……!』

“칠흑!”

『……?』

“그렇게 말하면 알지 않나?”

『……!』

티폰은 수수께끼 같은 연우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 소리쳤다.

『막아!』

기가스들은 연우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같이 공간을 열어젖히면서 연우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하지만.

“세워라.”

연우의 명령어와 함께 외우주를 장악하고 있던 권역화의 범위가 갑자기 축소되었다.

넓게 퍼졌던 그림자가 연우에게로 집중되는 것과 동시에 연우와 외부 공간을 단절시키는 거대한 장벽을 높다랗게 세웠다.

[망자의 벽]

끼아아-

쿠쿠쿵, 쿠쿵!

수만 마리의 망령으로 가득한 그림자의 벽이 기가스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과 동시에.

연우는 왼손을 활짝 펼치면서 허공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톱니 이빨이 공간 한가운데에 틀어박혔다. 손바닥을 따라 작은 균열이 퍼졌다.

“삼켜라.”

[하데스의 식령검]

이번에는 그림자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톱니 이빨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수챗구멍을 따라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남들이 본다면 자신이 퍼뜨린 그림자를 도로 삼키는 멍청한 짓으로 보이겠지만. 하데스의 식령검이 먹는 것은 그림자만이 아니었다.

갈 길을 잃고 외우주를 따라 떠돌아다니고 있던 영혼들. 인과율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들이 통째로 ‘뜯기고’ 있었다!

『이 미친놈이이이!』

티폰이 결국 참지 못하고 강제 강림을 시도했다. 이대로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야 할 인과율을 통째로 빼앗길 판국이었다. 이후 올포원의 제재를 받더라도 막을 건 막아야 했다.

그가 있던 화신체가 영압을 견디지 못하고 잘게 부서지면서, 거대한 신력의 폭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화신체가 있던 자리로 티폰이 자랑하는 거대한 눈이 드러났다. 뒤이어 곧 공간을 찢고 엄청난 크기의 팔이 내려와 연우를 내려찍었다. 본체가 통째로 강림할 수 없어 신체의 일부만 끌어온 것이다.

콰아앙!

어마어마한 신력이 연우는 물론, 대지 전체를 눌렀다. 얼마 남지 않았던 외우주의 내구도를 전부 박살 내고도 남을 힘. 외우주에 퍼진 균열을 따라 공간의 조각들이 금방이라도 우수수 쏟아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티폰의 거대한 손바닥은 대지를 완전히 누르지 못했다. 어느 지점에 다다라 강한 반발력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그 아래에는 망자의 벽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인과율의 흡수를 거의 끝낸 연우가 있었다.

소울 컬렉션은 이미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가득 차 있었다. 엘로힘은 물론, 혈국과 사자 연맹, 마군 등 용의 미궁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흡수한 수천수만 개의 망령들이 함께 울부짖는 중이었다.

애당초 베이럭과 대지모신이 확보하려던 제물보다 훨씬 많으면 많았지, 절대 부족하지 않을 양. 그 안에는 신과 악마들도 탐내할 만한 랭커의 것들도 있었다.

“여기서 문제.”

연우는 거대한 손가락 틈 사이로 비치는 티폰의 눈동자를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핏대가 잔뜩 선 티폰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들이 집단 강신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공양물을,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걸 여기에다 바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연우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형틀을 살짝 들어 보였다. 티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만둬라! 그만……!』

하지만.

“바친다.”

그 모든 것을, 연우는 칠흑왕의 형틀 안쪽으로 불어 넣었다.

“그러니 깨어나라.”

우우우웅-

세 개의 형틀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칠흑 공명(漆黑共鳴)!

『재미난 짓을, 저지르려 하는군. 제법이야! 네가 여태 하던 멍청한 놀음 중에서 그나마 썩 제일 괜찮은 시도였어! 하하하!』

일이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들려오는 마성의 웃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연우는 아직도 옵션이 해제되지 않았던 마지막 형틀, ‘칠흑왕의 격노’를 깨우고자 했다.

쩌어어엉!

이윽고 목에서 개운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철컥, 철컥-

여태 오른팔을 따라 단단히 감겨 있던 검은 쇠사슬의 구속이 해제되더니.

촤르르륵!

이윽고 쇠사슬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색의 운무를 한가득 뿌리면서…….

『어디 한번 놀아 보아라. 재미나게 구경해 줄 테니까. 키키킥!』

칠흑의 진정한 권능이, 연우의 손에서 처음으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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