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대전쟁 (3)
연우는 순간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데스나 포세이돈을 만났을 때에도 그 위압감에 영혼이 위축되고, 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었는데.
이것은 그마저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세상, 그 자체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
사왕좌의 격을 개방하고, 칠흑왕의 권능을 사용하면서 신격에 필적할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 연우였지만.
그는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만 했다.
이게 바로 타계에 머무는, 여러 신과 악마들의 인지를 벗어날 정도로 우주적인 크기를 자랑한다던 바로 그 존재인 걸까.
문제는.
‘이것도 ‘일부’에 불과할 테지.’
지금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기어 다니는 혼돈이 가진 단면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녀석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선지’나 ‘예언’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영역이었다.
시공이 흐르는 3, 4차원을 넘는 영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그런데도 녀석에게선 별다른 신력이나 권능이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우주의 섭리를 비틀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녀석이 가진 본체는 지금 연우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라고 해야 할까.
물. 었. 다.
너. 는. 누. 구. 냐.
그때, 연우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자, 기어 다니는 혼돈이 다시 의념을 보내왔다.
혹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까 싶어 또박또박하게, 아주 천천히. 여기에 약간 짜증도 섞여 있었다.
하긴. 녀석으로선 한낱 벌레나 다름없어 보이는 존재에게 이렇게 집중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는 일일 테지.
그래서.
연우는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녀석이 쏘아 대는 의념 때문에 영혼이 흔들리고 있어, 하늘 날개를 다른 어느 때보다 바짝 세우면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 당신은 대체 뭐지? 어째서 내가 가려는 곳마다 있는 거지?”
부-파우스트, 에메랄드 타블렛, 고룡 칼라투스, 베이럭, 대지모신, 발데비히, 멸망한 거인족의 유적지.
이 모든 것들에 기어 다니는 혼돈과 연관이 있는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까?
연우는 세상에 절대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 주의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기어 다니는 혼돈과 만날 기회를 엿보았다. 녀석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어. 떻. 게.
공. 허. 를. 다. 루. 는. 가.
기어 다니는 혼돈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존재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 제 의지만을 내비칠 뿐이었다.
공. 허. 는.
그. 분. 이. 갇. 힌. 곳.
또. 한. 그. 분. 의. 것.
미. 물. 이.
다. 룰. 게. 아. 니. 다.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내뱉는 의념 속에 흐르는 강한 의문과 짙은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분?’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 녀석도 칠흑왕이 누군지를 알고 있어.’
칠흑왕이 신중신이며 모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근원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우는 그를 여태껏 대지모신처럼 개념신에 가까운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잘 알고 있는 신과 악마의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탑 속의 신, 악마들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는 기어 다니는 혼돈도 칠흑왕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것도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연우가 자신의 언어로 이해를 했다 치더라도, 기어 다니는 혼돈은 칠흑왕에 대해서 ‘존경’ 내지는 ‘경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칠흑왕은…… 대체 누구지?’
우. 리. 는.
그. 분. 을. 찾. 는. 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내뱉으면서.
하. 지. 만.
찾. 을. 수. 가. 없. 다.
공. 허. 에. 도.
너. 희. 들. 의. 둥. 지. 에. 도.
그 순간.
연우는 녀석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를 둘러싼 건 짙은 어둠밖에 없는데도, 연우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이유를 밝히기 위해,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좁히는 듯한 시선.
그. 런. 데. 네. 가. 있. 다.
‘네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있. 을. 수. 없. 는. 일. 인. 데.
대. 체.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서 의념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연우는 하늘 날개를 곧추세우고도 자신이 휩쓸릴 것 같은 아찔함을 느껴야만 했다.
여기서 자칫 삐끗하는 순간, 의념의 폭풍에 휩쓸려 존재가 그대로 낱낱이 해체될 것 같았다.
너. 는. 누. 구. 냐.
하지만 그런 의념의 흐름 속에 있었기에, 녀석의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아니, 녀석을 포함한 다수의 타계의 신이 칠흑왕의 흔적을 찾고 있다.’
바로 이곳, 탑에서.
‘그래서 그들 역시 제대로 인지하기도 힘든 세상인 탑으로의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여러 방해로 실패를 해야만 했고.’
여러 천계의 신과 악마들이 제 영역을 건드리려는 타계의 신을 좋게 여길 리 만무했다.
하물며 탑을 수호하고자 하는 올포원이라면 더더욱.
‘다른 방식을 강구하여 필멸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나와 부딪치게 되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언뜻 보면 아주 이해하기 쉬운 인과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우는 도리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칠흑왕은 누구인 걸까. 여태 자신이 파악하고 있던 것들도 전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이 일의 바탕에는 칠흑왕이 있는 듯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모든 사건의 중심에 다른 이가 있었다.
동생.
차정우.
정확하게는 행방불명된 녀석의 영혼이 있었다.
고룡 칼라투스가 스러지기 전에 했던 말이 있었다.
-원래 있을 곳에.
-깊디깊은 심연의 늪. 어둠과 혼돈이 뒤섞이는 알. 수많은 존재가 깨어났다가 스러지는 곳. ‘그것’? 아니면 ‘그곳’? 하여간 이를 두고 지칭하는 말은 아주 많지만, 흔히 그렇게 부르곤 하지.
-공허. 혹은 칠흑.
-연어가 다 자라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듯. 그대의 동생 또한 귀소 본능에 따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대는, 그대에게 칠흑왕의 유산이 전해진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동생에게 만통이라는 재능이 있어, 나의 간택을 받았던 것은?
-정우의 영혼을 되찾고 싶다면. 아니, 모든 것을 삼키는 그곳에 영혼이란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되찾으려 한다면.
-칠흑으로 되돌아가라. 그곳에 길이 있을지니.
동생의 영혼이 되돌아갔다고 말한 칠흑.
기어 다니는 혼돈이 찾는 흔적.
그리고 연우가 다루는 권능.
이렇게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건 왜 나한테 떨어진 거지?’
연우는 애당초 이 모든 것들의 발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 오른팔에 휘감긴 쇠사슬과 그 끝에 연결된 수갑, 칠흑왕의 절망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튜토리얼에서 큰 업적을 이루면서 받은 보상으로만 여겼었는데.
올림포스의 보고에서 제우스의 아스트라페가 부서지고, 그것을 흡수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로 세트를 모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그렇기에 연우는 이 칠흑왕의 절망이 자신에게 온 것이, 칼라투스의 말마따나 절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탑의 보상 체계는 플레이어의 기록과 업적을 기반으로 하여, 그가 쌓은 인과 관계까지 철저하게 검토한 끝에 결정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즉, 과거에 쌓인 기록뿐만 아니라, ‘미래에 쌓을 기록’까지도 얼추 반영된다는 뜻.
즉, 애당초 칠흑왕의 절망은 언젠가 자신에게 귀속될 운명이었다는 뜻이리라. 그게 좀 더 일찍 이뤄졌을 뿐.
‘아카샤의 뱀을 찾아야겠어.’
튜토리얼의 깊숙한 곳에 잠든 채, 언젠가 되돌아올 원주인을 기다린다는 마물.
그에게 칠흑왕의 절망을 보상으로 건네주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튜토리얼은 회차마다 리셋을 반복하니 아카샤의 뱀도 되살아날 터.
녀석을 잡아다 이것저것을 캐물어 볼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복수전이 끝나는 대로 기어 다니는 혼돈의 흔적을 쫓아 60층의 히든 스테이지에 있다는 거인족의 유적지나, 에메랄드 타블렛의 다른 흔적을 쫓아 부-파우스트의 기억을 되찾게 할 예정이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잠깐 뒤로 미뤄 둬야만 할 것 같았다.
연우는 속으로 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며, 여전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녀석은 여전히 그렇게 묻고 있었다.
“누가 그러더군. 칠흑왕의 후예라고.”
헛. 소. 리.
기어 다니는 혼돈은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몇 배로 더 증폭된 의념을 쏟아 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불쾌함이나 짜증을 넘어 격노가 담겼다.
그. 것. 은.
미. 물. 에. 게.
허. 락. 되. 지. 않. 은. 자. 리.
하지만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우주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리고 애초에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굴복할 이유도 없었다.
여태껏 녀석에 대한 의문 때문에 뒤를 쫓고자 했고, 지금도 의문을 갖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생의 영혼과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하지만 녀석이 동생의 영혼과 큰 접점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칠흑왕의 정체였다.
도리어 이제 확실히 같은 목적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적이 될지도 모르는 관계였으니까.
그렇기에.
‘녀석이 나를 얕볼 수 없게, 미물이나 벌레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연우는 오히려 녀석을 도발할 생각으로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칠흑왕의 형틀을 내보였다.
“이것이 그 증표라면?”
그. 렇. 다. 면.
그리고 그런 연우의 의도는 너무나 잘 먹혔다.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서는 스스로 경외하는 대상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미물이 가당치 않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미물에게서 경외하는 대상의 냄새가 풍겨 신경이 쓰이던 차에 이젠 대놓고 거슬리게 만들었으니, 아마 짓밟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할 테지.
죽. 어. 라.
아니나 다를까.
기어 다니는 혼돈의 언령과 함께, 순간 연우를 둘러싼 어둠이 확 찢어진다 싶더니, 무질서한 안개가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왔다.
여태껏 녀석이 단순히 의념을 내비친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그것을 넘어 명백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당연히 그 크기는 연우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빠져나갈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해일이었지만.
촤르륵-
연우는 쇠사슬을 잡아당겨 몸 주변에다 크게 둘렀다. 비그리드가 사선으로 공간을 길게 찢으면서 그 너머에 있던 공허를 드러냈다.
츠츠츠-
공하는 연우의 의지에 따라, 마치 물속에 퍼지는 잉크처럼 기어 다니는 혼돈이 만든 어둠을 타고 넘어와 구체 모양을 띠며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기어 다니는 혼돈이 뿌리는 격류가 공허와 맞부딪치면서 소리 없는 격동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녀석의 의념을 밀어내고 있지만,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휩쓸리겠지.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모조리 부서지면서 자신의 흔적은 티끌도 남지 않고 사라질 터였다. 그만큼 기어 다니는 혼돈은 대단했고, 당장 연우가 어떻게 도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중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연우는 격류 속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태연했다. 격노를 띤 기어 다니는 혼돈의 모든 의념이 자신에게 고정된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소리쳤다.
“거래를 원한다, 기어 다니는 혼돈!”
녀석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지만.
연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제 할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다!”
그 순간.
…….
연우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던 의념의 해일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이미 9할 이상이 깎여 나갔던 공허의 구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시선이 단단히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격노 외에 다른 감정이 섞였다.
의심 혹은 불신.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의문.
그리고.
팟!
저 어둠 너머에 있던 우주적 존재의 거대한 존재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에 연우 앞으로 다른 무언가가 툭 하고 조용히 떨어졌다.
역시나 연우에 비하면 큰, 3미터쯤 되는 크기였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 존재했던 존재감에 비하자면 너무나 초라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 속에 억눌린 짙은 혼돈과 무질서를 감지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찌릿하게 울리는 느낌.
“그 말, 자세히 해 보아라. 만약 살기 위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이라면 무사치 못할 것이다, 인간.”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는 연우를 보면서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을 둘러싼 어둠도 같이 위아래로 잘게 떨렸다.
그런데 연우는 섣불리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녀석의 화신체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외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데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