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대전쟁 (4)
연우는 순간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아냐. 발데비히가 아니야.’
분명히 똑같은 외견을 하고 있지만, 녀석은 절대 발데비히가 아니었다. 저기서 풍기는 기운은 명백히 기어 다니는 혼돈의 것이었으니까.
혹시 발데비히를 사도로 삼아 거기에 강림을 한 것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도 많이 달랐다. 저건 명백히 의념으로 구성한 화신체였다.
“이 외양을 가진 자를 잘 알고 있나 보군.”
그리고 그런 연우의 짧은 상념을 읽은 기어 다니는 혼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을 읽히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역시 신은 신이라는 걸까. 녀석은 자신의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듯했다. 연우는 마력을 끌어 올리면서 정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보기 힘든, 귀여운 피조물이었지. 거인과 인간의 혼혈이라. 초월종과 벌레가 어떻게 그렇게 섞일 수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역시나 이해를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바깥의 세계.
연우는 자신들이 ‘타계(他界)’라고 일컫는 곳에서, 이곳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타계는 스스로를 ‘안쪽’이라고 부르는 걸까.
“발데비히는 어떻게 되었지?”
“인간, 지금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기어 다니는 혼돈은 발데비히의 외양을 한 채 비웃음을 던졌다.
연우가 공허를 이용해 어느 정도 대등한 자격을 보이려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그가 어느 정도 인정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눈에 연우는 심심풀이로 갖고 놀다가 언제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피조물에 불과했다.
사실 우주적인 존재인 그가 한낱 미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나섰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짓이었다.
공허나 칠흑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의념을 아무리 내뱉어 봤자 저 멍청하고 아둔한 머리로는 감내할 수도 없을 테니, 의념의 사소한 부분을 잘라 내어 단말을 만들어야만 하는 수고로움이 너무 귀찮았다.
하지만 미물이 자신의 뜻을 이해할 필요가 있듯이, 자신도 미물의 말을 번역할 수 있어야 했다. 이 화신체는 그것을 위한 기체(機體)였다.
그는 팔짱을 끼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거래가 무엇이냐? 탑으로 들어올 길을 만들겠다고?”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과 무슨 거래를 할 수 있을지. 만약 쓸데없는 일로 자신의 기력을 낭비케 한 것이라면 절대 용서치 않을 생각이었다.
본래 유희를 위해 사는 게 삶의 낙인 그로서는 이따금 변덕을 부러 이런 것도 즐거이 받아 주곤 하지만.
지금 연우가 내뱉은 말은 절대 그렇게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탑이라는 세계는 그를 비롯해 ‘안쪽’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도무지 표현과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었으니까.
섭리를 거스르고, 법칙이 뭉개지는 곳.
이론상, 여러 우주와 차원이 겹치는 교차원적인 세계는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곳은 흔히 서로 다른 에너지의 반발로 인해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저렇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 속에는 그저 그런 초월자들도 있지만, 이따금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격이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갇혀’ 있었다.
마치 소, 돼지를 우리에 가둬 키우는 사육장처럼!
그들처럼 우주의 태초를 근간으로 두는 존재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분의 흔적도 저곳에 있지 않은가!’
우주의 섭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도저히 거스를 방법이 없어 편법으로 공허를 끌어와 가둬 둬야만 했던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안쪽’의 존재들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그’를 찾을 길이 없어 너무나 고생을 해야만 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들이 여태 인지할 수 없었던 ‘바깥’의 영역에서 흔적의 일부를 찾을 수 있었다.
‘안쪽’의 존재들에게는 너무 한미하고 궁벽지다 여겨져 별다른 관심도 끌지 못했던 곳에서 그것이 발견되리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전지와 전능을 갖췄다고 평가를 받는 기어 다니는 혼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비롯한 타계의 신들은 ‘그’의 흔적을 거두고자, 신력과 권능을 그곳으로 뻗었다.
그리고 불발되었다.
저들이 ‘탑’이라고 부르는 영역 안에는 그저 그런 미물들도 살아 가고 있었지만, 절대 그들에 못지 않은 거대한 존재들도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안쪽’의 존재들로서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다.
저리도 좁은 영역 내에서 필멸자와 불멸자가 한데 뒤섞여 살아 가는 것도 낯설진대, 그들만 한 이들 여럿이 갇혀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꼴이라니!
거기다 탑 내에는 항체와 비슷한 것이 있어 자신들의 힘을 내쫓기까지 했다. 직접적으로 부딪치기에는 조금 버겁다 여겨질 정도의 수준이었다.
만약 ‘안쪽’의 존재들이 힘을 합쳐 본격적인 침공을 시도한다면, 탑을 장악하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되었지만.
그래서는 탑 내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거대 존재들을 함부로 풀어 주는 꼴이 되어 버리는 데다가, 겨우 찾은 ‘그’의 흔적도 사라질 수가 있어 가볍게 시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방법을 바꿔, 자신을 찾는 피조물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병탄은 힘들지 몰라도, 바늘로 구멍을 계속해서 내다 보면 탑 내로 천천히 진입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였다.
아주 지루하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그들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오히려 권태에 찌들어 살아가던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서는 아주 작은 유흥거리 정도가 되어 주어 재미있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괜찮은 건수들도 더러 물렸다.
거인족과 용종 같은 초월종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타고난 격이 있으나, 결국 도태되어 스러질 운명을 가진 가련한 것들. 그가 갖고 놀기에 딱 제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난감들은 계속 실패를 거듭하더니 언제부턴가 완전히 사라졌고,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인간만 남아 버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슬슬 지루함과 짜증이 치닫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그분’의 흔적과 관련된 곳에서 연신 저 인간이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여태 심기를 몇 번씩이나 거슬리게 만든 그 인간이 길을 열어 주겠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자신들도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국 할 수 없었던 것을?
“공허.”
“……?”
“그리고 칠흑의 권능. 이 두 가지면 충분히 가능하다.”
“…….”
연우의 대답에 기어 다니는 혼돈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제대로 방법을 설명해라. 그딴 선문답이 내게 통할 것 같으냐?”
“방법을 설명하면 거래가 되질 않지. 인간을 벌레 취급하는 너희들에게 눈 뜨고 코 베이라고?”
“네놈이 하는 말이, 우리를 농락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
“나를 읽어. 그럼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정도는 간파할 수 있지 않나?”
기어 다니는 혼돈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영 귀찮게만 하는 인간이다. 사실 아까 전부터 녀석을 분석하려 계속 시도하고 있으나, 그새 정신 방벽을 세웠는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표층 의식에 언뜻 드러나는 사념은 일부 읽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말하는 바는 하나였다.
‘진실.’
정말이었다.
연우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절대 들어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탑 내로 자신들을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기어 다니는 혼돈은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무심한 눈길로, 아무런 감정 없는 시선으로 연우를 직시했다. 내뱉는 말도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아 기계처럼 딱딱했다.
“그렇다면 네가 내거는 조건은?”
“에메랄드 타블렛.”
“……?”
“그것의 원본을 주었으면 한다.”
연우의 두 눈이 기괴한 빛을 발했다.
에메랄드 타블렛만 있다면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
한낱 필멸자였던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잡아먹을 수 있었고, 베이럭이 고대종을 복원시킬 수 있었으며,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으로 거듭날 수 있게 도와준, 그리고 브라함이 근원을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지식 체계라며 찬탄했던 타계의 지식!
연우도 에메랄드 타블렛의 일부를 갖고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침공하면서 빼돌린 것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부의 기억이 되돌 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장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체계 중 일부에 불과할 뿐.
모자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것을 전부 가질 수 있다면.
연우는 한 번 더 큰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여전히 수수께끼가 많은 죄악석을 다룰 방법이나, 브라함과 부의 빠른 성장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우를 되돌릴 방법도 많아져.’
이미 베이럭이 만든 동생의 클론을 확보해 둔 상태고, 회중시계 속에는 사념체가 남아 있다. 시도해 볼 만한 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온전한 에메랄드 타블렛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해. 그곳에 칠흑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
동생의 영혼이 묻혔다는 칠흑으로 가는 방법이나, 보다 더 공허를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수단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듯했다.
그에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물건인 것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 그는 파우스트와 베이럭에게 에메랄드 타블렛을 나눠 주기도 했으니, 분명히 원본도 갖고 있을 터였다. 혹은 에메랄드 타블렛의 정체가 그의 지식을 담은 책자일지도 몰랐다.
“‘계시록의 원전(元典)’을 달라는 것인가?”
계시록?
아무래도 타계의 신들이 에메랄드 타블렛을 두고 칭하는 명칭인 것 같았다.
“맞다.”
연우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가.”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연우의 인상도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지?”
“계시록은 내 것이 아니다.”
“뭐?”
“내게는 계시록을 다룰 권한이 없음이니.”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
연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넌……!”
“미물들에게 나눠 줬던 것들을 말하는 것이냐? 우습군. 계시록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 불과한 것을 떠벌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놓…….”
“까불지 마라, 인간.”
에메랄드 타블렛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었던가?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권한이 없을 정도로?
연우는 그래도 탑 내로 진입하고 싶거든 어떻게든 내놓을 방법을 찾으라고 협박하고자 했다.
권한이 없다면 만들어라. 탑 내에서 칠흑왕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는 논리를 앞세우고자 했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런 연우의 생각 따윈 전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가 다시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놓으라 하면 주머니에서 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물건인 줄 아느냐? 모든 우주와 차원의 지식이 총망라된, 태초의 거룩한 말씀과 종말의 성스러운 예지가 담긴, 역사와 시공의 기록이 한낱 필멸자 따위가 감내할 수 있는 물건이라 여기는 것인가? 미쳤구나! 광오하도다, 인간!”
기어 다니는 혼돈의 두 눈을 따라 광기가 스산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거래의 성사 여부는 이 몸이 결정하는 것. 그대에게는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넌 받아들이기만 하라, 미물.”
츠츠츠-
화신체의 의지에 따라 다시 어둠이 출렁였다.
“너를 나의 사도로 삼아 주마. 지난 수억 년 동안 단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영광의 굴레를 한낱 미물 따위에게 씌운다는 것이 썩 내키진 않지만. 그래도 ‘그분’의 힘을 일부나마 다룰 수 있는 만큼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고 있는 터.”
고오오-
“너는 나의 뜻을 대변하는 대리자로서, 앞장서서 이 몸과 권속들이 건널 수 있는 길을 개척하라. 그리한다면 그만큼 공을 참작하여 불사와 불멸의 권능을 내릴 것인즉.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계시의 날에 그대가 앉을 옥좌도 작게나마 내어 주겠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안쪽’의 존재들이 들었다면 무슨 짓이냐며 기겁할 만한 내용들이었지만.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이다.”
연우는 들끓는 광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꿰뚫는 광망이 눈가를 따라 예리하게 치솟았다.
“내가 필요한 건, 에메랄드 타블렛. 너희들이 말하는 계시록이니까.”
“따르지 않는다면, 따르게 하는 수밖에.”
끼리릭, 끼릭!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어둠이 다시금 연우를 덮쳐 왔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는 어둠 속에 묻히면서 마지막 웃음을 내뱉고 완전히 사라졌다.
“너는 참으로 시건방졌다, 인간. 하지만 내게 유흥거리 정도는 되었으니 목숨만은 온전히 남겨 주마.”
그 순간.
〈외부 간섭 배제〉
〈불가해(不可解)〉
기어 다니는 혼돈의 권능도 작동했다.
연우는 순간 여태껏 자신을 지탱하던 하늘 날개가 강제로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로 이어지던 오천여 개의 모든 채널링은 물론, 칠흑왕의 권능, 심지어 용체 각성도 강제로 구속되고 있었다.
이곳은 녀석이 의념을 통해 구현한 심상 세계. 즉, 녀석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바. 외부의 채널링을 모두 단절시켜, 연우를 무장 해제시키는 건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탑의 법칙으로 구현되던 스킬과 자체 권능도 강제로 정지시켰으니. 녀석이 만든 법칙을 강제함으로써, 연우를 이루던 모든 시스템을 원천 무효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마신룡체의 특성까지 틀어막는 것은…… 좀 버거운데.’
연우는 한순간, 처음 탑에 입장했을 때, 지구의 몸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 가라앉는 느낌. 언제나 터질 것 같던 활력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그래도 당시보다는 발달된 육체일 테지만.
그래도 마신룡체에 비하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탑에서 자신이 쌓는다고 쌓은 것들은 어찌 보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 저토록 강맹한 존재가 그의 영역에다 자신을 가둬 놓고, 힘을 전부 앗아가 버린다면 아무런 저항 수단도 없어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기에 연우는 무결참을 완성한 뒤, 무왕이 지나가듯이 말해 주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네가 가진 것에 얽매이지 마라. 따지자면 그것은 네가 가진 것이 아니다.
-제가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이건 무엇입니까?
-탑이 너에게 부여한 것!
-……?
-네 어깨 위에 달린 건 속 빈 깡통이냐? 생각을 해 봐라. 네가 가진 것이 정말 네 것인지, 시스템으로 ‘고정된’ 것인지.
-아.
-‘아’긴 뭔 ‘아’야? 이런 가정을 해 보자. 스킬이든 권능이든 능력치든, 전부 시스템이 부여한 것들이지.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회수해 버린다면?
-……!
-아직은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다만. 그래도 세상사,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지? 그딴 불상사가 벌어져서 하루아침에 비루먹은 개가 되어 빌빌대지 말고,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란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긴.
당시의 무왕은 익살맞게 웃었다.
-돌려. 네가 아닌 세상을!
스킬과 권능은 시스템이 부여한 체계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응해 너만의 체계를 만들어라.
무왕의 가르침은 그것이었고, 연우는 언제나 그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자 하였다. 스킬과 권능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만, 내부로부터 발생한 힘은 절대 다른 이들이 앗아갈 수 없는 법. 신격도 예외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부로부터의 에너지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무공(武功).’
무(武)는 육체적 단련을 의미하며, 공(功)은 그렇게 여러 해에 걸쳐 누누이 쌓인 단련을 개화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끌어 내는 정신적 수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빚어진 의념은 고수의 영역으로 수련자를 인도하며, 세간에서 명명한 달인·명인·진인의 영역을 지나면서 서서히 발전해 세상에 아로새겨지는 지경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세상에 박힌 의념은 하늘 아래 시전자를 고정시키는 단단한 받침대가 되고, 세상을 움직이는 톱니바퀴의 주축으로써, 그를 세상에 유일케 만드니!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세상에 홀로 너만이 존귀하여, 흔들리는 세계를 스스로의 의지로 ‘돌려’ 끝내 평탄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념 통천(意念通天)!
의념을 세상에 단단히 새겨 그것을 뜻대로 개변(改變)시킬 수 있는 경지.
외뿔 부족에서는 ‘화경(化境)’이라는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세계의 법칙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네가 내딛는 진인이라는 경지의 시작이다.
콰드드득-
연우는 그렇게 자신의 의념을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발산시켰다.
순간, 어둠만이 몰리는 세계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와 연우를 감싸 안았다. 의념이 구현된 것이다. 그 속에서 온전함을 되찾은 연우는 강제로 허공을 쥐면서 비틀었다.
오로지 기어 다니는 혼돈의 권능만이 가득한 세계가 비틀렸다. 비록 녀석에 비하자면 여전히 보잘것없는 크기의 의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연우가 빠져나오기엔.
콰아앙!
연우는 무언가에 튕기듯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순간,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단절되었던 채널링이 빠르게 복구되면서 하늘 날개도 되돌아와 있었다.
[00:00:09 59]
[00:00:09 58]
……
타이머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불과 10초도 안 될 만큼 짧다. 그 안에 남은 일도 전부 처리해야 했다.
어. 딜. 가. 느. 냐.
부서진 공간의 균열을 따라, 기어 다니는 혼돈의 촉수가 연우를 붙잡기 위해 다가왔다.
그것을 보면서.
“마성.”
『잘도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재미있게 관람했으니, 그 대가로 조금은 도와주마. 키키킥!』
연우는 무의식에 침잠해 있던 마성을 위로 끌어 올려 합일을 시도했다.
5초.
그 안에 기어 다니는 혼돈을 여기서 물리칠 생각이었다.
이윽고 연우의 의식이 마성의 의식으로 침잠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의념 통천으로 정신을 단단히 세워 둔 탓인지, 이번에는 ‘묻히는’ 게 아니라 ‘섞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 그래도 조금 성장했군. 이전보다 좀 더 힘을 낼 수 있겠어. 이것도 괜찮아.』
그렇게 히죽대는 마성의 웃음소리와 함께.
동시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의념이 세상을 따라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화아악!
콰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