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55화 (455/862)

5화. 대전쟁 (5)

‘……저긴가!’

궁무신 장웨이는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부서진 건물 잔해 사이로 연우가 날개를 한껏 홰를 치면서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연우를, 웬만한 건물보다도 더 큰 촉수가 바짝 뒤쫓았다.

『이게 무슨……!』

『기어 다니는 혼돈,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나!』

『크으윽!』

『이 빌어먹을 작자가!』

땅거죽을 뒤집으며 검은 마기를 뭉게뭉게 피우는 모습은 마치 검은 해일이 덮쳐 오는 것처럼 보였으니.

그 앞에 노출되어 있던 기가스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촉수는 전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결국 한두 명의 기가스가 당하고 나자 사태의 위험성을 알아챈 이들은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푸하하! 타계의 신이라! 그것도 ‘들끓는 공허’ 속에 앉은 놈을 데려올 줄이야. 대지모신! 그대도 이제 갈 데까지 간 것이로구나!』

그들과 맞서 싸우던 악마 군단의 수장은 검은 해일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고.

이. 건.

약. 정. 위. 반. 이.다.

우- 우우-

발푸르기스 밤의 주인이었던 ‘별의 마녀’와 비슷한 외양을 한 대지모신은 몸집을 크게 부풀리면서 한때 아군이었던 촉수의 주인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위로는 본 드래곤이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저주 섞인 브레스를 토해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개판이야.’

장웨이는 그런 놈들을 보면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척을 숨기느라 소리를 죽이고 있다지만, 사실 소리를 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저토록 많은 괴물들이 뒤엉키는데, 과연 자신 같은 일개 피조물에게 관심이나 가질까!

이미 엘로힘의 외우주는 여러 초월자들의 충돌 여파로 인해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간 곳곳에 균열이 퍼지고, 지진이 계속 뒤따랐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의 기척은 사실상 숨기나 마나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필멸자들은 그들이 모시는 신들에게 자비를 애원해 댔지만. 아무도 그런 그들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주고 있지 않았다.

무심(無心).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사가 다 그런 거지.’

장웨이가 세상 모든 것을 잃었던 날에도 이러했다. 심지어 그는 있는지도 모를 신의 구원을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거창하지 않았다. 소박했다. 그저, 한때 대장이라 부르며 따랐던 이의 작은 배려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그가 찾아왔다.

『준비를 하라. 나와 닮은 아이야.』

이예. 후예사일이라는 전승으로 유명한 ‘천교’의 신격. 그가 장웨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장웨이는 그 손을 맞잡으며 이 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어떤 목적이 있는 삶이 아닌, 그저 죽지 말라던 누이의 유언 때문에 살기 시작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에 처음으로 목적이 생겼다. 차연우. 한때 자신이 대장이라고 불렀던 남자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

그는 신과 악마들이 나뒹구는 전장에서 맹활약을 보이는 중이었다. 아무리 저들이 하계의 제약을 받고 있다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장웨이는 자신이 아무리 아홉 왕에 준하는 힘을 지녔다고 해도, 저기에 끼어들기엔 한참 모자라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장웨이는 포복 자세를 취한 그대로, 사일동궁의 시위에다 하얀 화살, 소증(素矰)을 걸었다. 그가 모시는 신, 이예로부터 하사받은 신물들. 한번 잡은 목표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필중의 권능이 그것에 담겨 있었다.

그는 화살의 끝을 연우에게로 겨누었다. 숨을 크게 삼킨 순식(瞬息)의 시간. 장웨이는 시간이 한껏 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식탐황제와 마그누스도 단번에 잡았다는 연우를 정면에서 부딪칠 생각 따윈 없었다.

지난날, 대장에게 확실하게 배운 바가 있었다.

자신의 불리와 장기를 빠르게 파악해서, 불리를 버리고 장기를 더 크게 취하는 것. 그것이 승리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장웨이는 탑 내에서 이만한 입지를 빠른 속도로 굳힐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다행히 연우는 저 대단한 존재들을 상대하느라 한창 정신이 팔린 상태. 그는 장웨이가 이곳에서 저를 노리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면에 장웨이는 장거리와 저격에 특화된 몸. 그리고 누구보다 연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노린다면 지금. 바로 이때가 제격이었다.

촤르륵-

그때, 연우가 쇠사슬을 잡아당기면서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화살의 끝이 그리는 좌표 안으로 연우가 들어온 순간, 장웨이는 손을 놓았다. 빛의 화살이 공간을 꿰뚫고, 동시에 한껏 느려졌던 시간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장웨이는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타깃을 맞추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들킬 위험이 컸으니 우선 몸을 내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빛의 화살이 연우를 정확하게 꿰뚫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던 그 순간.

콰르릉-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천둥소리와 함께 붉은 벼락이 떨어지면서 빛의 화살을 말끔하게 단절시켰다.

뒤로 빠지던 장웨이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소증을 잘라 냈다고?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하지만 의문은 잠시, 그는 한순간에 몸을 틀면서 다시 시위에다 소증을 걸었다.

바로 그런 그가 있던 자리로.

콰아앙!

족히 2미터는 될 법한 큰 그림자가 떨어졌다. 지반이 흔들리면서 먼지구름이 치솟고, 그 사이로 방금 전 빛의 화살을 잘랐던 것과 똑같은 색을 자랑하는 핏빛 뇌기가 파지직 하고 흘러넘치고 있었다.

장웨이는 보이지도 않는 목표를 향해 소증을 쏘아 댔다. 한순간에 빛의 화살이 수십 갈래로 쪼개지면서 먼지구름에다 구멍을 숭숭 뚫었다.

“하!”

하지만 기습을 시도한 괴한은 고작 이따위밖에 안 되냐는 듯이 코웃음을 크게 치면서 핏빛 뇌기를 더 거세게 터뜨렸다.

방출된 뇌기가 겨우 남아 있던 먼지구름을 전부 날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십 갈래의 화살을 전부 찢어 놓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판트가 함박 웃음을 터뜨리면서 장웨이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하!”

연우가 실력자들을 전부 상대하는 통에 이렇다 할 상대가 없어 심심하던 판트에게, 우연히 감지된 장웨이의 존재는 마치 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심심함을 달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간 쫓아다녔던 일족의 원수를 이렇게 만날 수 있었으니!

녀석이 왜 연우를 노렸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유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짓밟는다. 그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쿠르릉-

“귀찮게 되었군.”

장웨이는 간만에 잡은 기회가 무효로 돌아간 것에 짜증이 단단히 났는지, 이쪽으로 달려오는 판트에 맞서 손에 쥐고 있던 사일동궁을 던지고, 재빨리 소증 두 자루를 꺼내 단검처럼 양손에 쥐었다.

무왕의 아들이라면, 외뿔부족이 앞으로 더 귀찮게 굴겠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팟-

장웨이는 판트에게로 몸을 날렸다. 우선 방해꾼부터 처치해 둘 생각이었다.

* * *

[시차 괴리]

한껏 느려진 세계 속에서.

연우이지만, 연우가 아니기도 한 무언가는 공허를 찢고 나오며 몸을 빠른 속도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 5초를 빠르게 가능했다.

일반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그 시간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에 너무나 짧은 시간.

‘하지만 저놈들은 다르지.’

초월자들을 필멸자와 비교해서는 안 되었다. 신과 악마들은 연우가 빠져나온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깨달았고, 그 뒤를 맹렬하게 쫓는 촉수를 보며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빠르게 판단했다.

『이게 무슨……!』

『기어 다니는 혼돈,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나!』

기어 다니는 혼돈은 오로지 연우를 붙잡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대지모신과 기가스가 휩쓸리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때문에 기가스들은 비명을 질렀고, 대지모신은 화신체를 크게 일으키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런데도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일으킨 검은 해일은 단숨에 수십 미터나 일어나 그들은 물론, 엘로힘의 외우주 전체를 잠식할 것처럼 굴었다.

『피해라!』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티폰의 외침에 따라 기가스가 일제히 흩어졌다.

파밧-

그들과 한창 접전을 벌이던 동마왕군은 잔뜩 인상을 굳히며 그들의 주군인 아가레스를 돌아봤다. 아무리 그들이 호전적인 정복자라 할지라도, 타계의 신은 직접적으로 부딪치기엔 너무 위협적인 상대였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면서 광기에 젖은 모습으로 파안대소를 터뜨리고만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하하하! 역시! 역시 너희 형제는 너무 재미있어! 나를! 이렇게까지 나를 미치게 하는데 어찌 너희들이 탐나지 않을 수 있을까!』

5초.

연우는 그런 녀석의 반응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동생과 자신에 대한 아가레스의 광기 어린 집착이 절대 단순한 호의가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것과 경계하는 것에는 차이를 둬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어 다니는 혼돈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에 대해 집중하는 게 더 중요했다.

‘영역 회수.’

[용의 영역, ‘비나’가 회수되었습니다.]

[‘명토 설정’이 회수되었습니다.]

권역화를 해제시키자, 여태껏 외우주 곳곳에 퍼져 있던 모든 권속들의 소환이 해제되었다. 그들의 발밑에 깔렸던 그림자가 흩어지면서 그들의 존재도 같이 사라졌다.

그에 한창 대지모신을 물어뜯고 있던 본 드래곤이 연우 쪽을 힐끗 보면서 가볍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제대로 엿을 먹이려 드는구나. 인성왕이라는 말이 아쉽지 않아.」

팟-

본 드래곤의 형체가 가장 뒤늦게 자취를 감췄다.

4초.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소울 컬렉션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쇠사슬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촤르륵-

쇳소리와 함께 되돌아온 대낫이 연우를 닮은 무언가의 손에 잡혔다.

감촉이 제법 그럴듯하군.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드는 듯 차갑게 웃으면서 대낫을 아래로 거칠게 휘둘렀다.

찌이익!

공간이 아주 길쭉하게 찢어지면서, 여태껏 연우가 열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를 자랑하는 공허가 활짝 열렸다.

3초.

츠츠츠-

순간, 공허가 단숨에 외우주 쪽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탐욕스러운 괴물이 된 것처럼. 빈 유리잔에 와인을 채우듯, 공간을 타고 흘러나온 공허는 단숨에 외우주에 차올랐다. 흐름에 따라 소용돌이가 곳곳에 만들어졌다.

『으, 으아악! 이게 뭐야!』

『공허가…… 우리를 잠식…… 컥!』

『강림을 해제해야 한다! 이대로는 위험해!』

기가스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피하기 위해 달아난 곳에서, 기어 다니는 혼돈보다 더 악질적인 재앙이 그들을 엄습하려 하고 있었다. 신이나 악마 같은 존재들마저도 잘못 휩쓸린다면 존재가 지워진다는 저주받을 장소, 공허가 이렇게 날뛰고 있었다. 공허가 폭주하고 있었다.

2초.

칠. 흑!

칠. 흑!

대지모신은 연우를 닮은 무언가를 붙잡을 생각도 못 한 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기가스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신력을 안쪽으로 잡아당겨야만 했다.

아무리 화신체를 빌린 강림이라 하여도, 공허에 ‘감염’되고 만다면 자칫 본체에도 큰 타격이 갈 수 있는바. 공허는 그만큼 위험했다.

그렇기에. 대지모신은 저 하늘 위를 뱅글뱅글 맴돌면서 마구잡이로 공간을 크게 베어 대는 연우를 닮은 무언가를 보며 구슬피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키키키킥!”

촤아악-

촤악! 촤아악!

“키키킥! 볼 만하구나! 아주 모든 것이! 애당초 타계의 것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거늘. 그 규율을 깨 버렸으니, 이딴 꼴을 당하는 것이지.”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면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연거푸 베어 낸 공간을 타고 계속 흘러내리는 공허는 이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과 충돌을 벌이고 있었다.

녀석은 어떻게든 공허를 거슬러 연우를 붙잡고자 했지만. 어둠과 촉수는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공허의 폭포수를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지모신과 기가스는 그 사이에 억류되어 등 터진 새우 꼴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촤아아악!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그런 꼬락서니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창공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공허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기어 다니는 혼돈을 잠식했다.

쿠쿠쿠-

외우주를 따라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려졌다. 수천 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던 엘로힘의 유산들이 모조리 묻혀 사라지고, 그나마 목숨이 붙어 있던 생존자들도 전부 익사하고 말았다.

1초.

키키킥!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그 꼴을 보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잘난 듯이 굴었던 놈들이, 저렇게 비참한 몰골로 전락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우우-

우- 우우우-

왕.

신. 왕!

공허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촉수를 이따금 드러내며 이곳에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네놈이 바라는 것을 이상한 곳에서 찾지 마라. 어리석은 것.”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보며 비웃음을 던지더니 자신의 뒤편에다 대낫을 휘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놈들의 멍청한 꼬락서니를 더 오래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 몸뚱이는 아직 공허에서 버틸 정도로 튼튼하지 못해 아쉬움을 이 정도로 달래야만 했다.

팟!

결국 그도 스러지는 공허 속으로 묻혀 사라질 때 즈음.

쿠쿠쿠쿠!

우- 우우우-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이유 모를 울음소리만이 음산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쾅!

연우를 닮은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기 전에 본 것은.

네. 놈. 때. 문. 에.

비. 켜. 라.

공허를 찢으며 우뚝 서서 기어 다니는 혼돈을 압박하려는 대지모신의 화신체와, 그런 녀석을 집어삼키고 공허를 넘어오려는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충돌이었다.

콰콰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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