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대전쟁 (6)
엘로힘의 외우주, ‘위대하신 분들의 종소리’의 외곽에 위치한 탑 외 지역.
지면을 따라 짙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퍼지더니, 그 위로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르티야에 충성을 맹세했던 산하 조직의 플레이어들이었다.
“……헉. 헉.”
“이건…… 대체 뭐야?”
플레이어들은 지친 기색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로힘과의 격전이 있은 직후, 그들은 외우주를 뒤흔드는 신격들의 충돌을 보면서 한창 넋이 나가 있어야만 했다.
대단하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던 광경.
자신들이 여태껏 이룬 것들이, 여태껏 보아 오고 경험했던 것들이 전부 부질없고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연우의 모습은 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었으니.
마지막에 그들에게 남은 감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경외(敬畏).
사실, 처음 그들이 아르티야의 산하 조직으로 들어왔던 데에는 다양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다.
과거의 미련이 남아,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위명을 알리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외심 다음에 든 생각은 연우를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다 외우주가 거의 무너질 때 즈음, 그림자에 잡아먹혔다가 탑 외 지역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연우가 보이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이지 위대한 분이시다.”
철의 왕좌의 수장, 하나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 연우를 따르겠노라고 마음을 먹고 라퓨타에서 충성 맹세를 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자신의 선택은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 머지않아 철의 왕좌가 새로운 거대 클랜으로서 발돋움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희성의 부성주, 차투라도 비슷했다.
‘마희께서는 저분을 계속 지켜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었지…… 어쩌면 그때 하셨던 말씀이 이런 의미였을지도.’
차투라를 비롯한 여러 플레이어들이 마희 에도라를 따라다녔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라면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록 에도라는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지만. 그래도 추종자들은 에도라가 머지않아 탑의 새로운 질서를 보여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만큼 지난 수십수백 년 동안 8대 클랜이 탑 내에 만들었던 아성은 너무 견고하기만 했으니까.
절대 도전자의 탄생을 허락지 않았고, 저들끼리 으르렁거리다가도 새로운 싹이 나타난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잡고 짓밟았다. 어느 누구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허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쓰러졌다. 헤븐윙과 아르티야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8대 클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아등바등했다. 차투라는 그것을 에도라가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 마희성은 그 족쇄 같은 그림자를 지울 사람으로 에도라를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에도라는 그 일은 자신의 몫이 아니며, 연우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투라는 에도라의 말이 적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있어. 그리고 바뀌고 있어.’
청화도의 붕괴를 시작으로, 레드 드래곤이 해체되고, 혈국이 궤멸했다. 그리고 이제 엘로힘이 자취를 감췄으며, 마군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말았다.
모든 질서가 붕괴되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뒤에 찾아올 것은 분명히 더 큰 혼란일 테지만.
8대 클랜의 그림자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모든 플레이어가 더 이상 아무런 방해 없이, 원래 그들이 추구하던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순수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시련’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도 보라.
저 그림자의 중심에 서서 가만히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서는 가까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격의 향연이 휘몰아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그때.
차투라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그림자가 걷힌 뒤에는…… 만약 저분이 그림자가 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그녀는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연우가 머지않아 탑의 굳건한 지배자가 될 것은, 유일한 절대자가 될 것은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연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그의 위로 무왕과 올포원이 있다지만. 그리고 그의 대적자로 아직까지 왈츠와 대주교가 있다지만. 과연 그들로 연우가 앞으로 탑에 미칠 영향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단연코, 없었다.
무왕은 탑의 일에 무관심하고, 올포원은 77층을 떠나지 않는다. 왈츠와 대주교는 가진 무력은 강할지언정 세력이 이미 거의 몰락해 버리거나, 할 예정이였다.
그때, 연우가 ‘왕’으로서의 권력과 입지를 선보이고자 한다면.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태까지 보였던 패도적인 행보를 돌이켜 본다면. 그는 절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누군가가 나타날 것을 허락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더 큰 그림자가…… 찾아오려는 것이다.
꿀꺽.
차투라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킬 무렵.
[00:02:01_02]
……
[00:00:00_01]
[00:00:00]
[‘하늘 날개’의 플레이 타임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연우는 하늘 날개의 발동 시간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찾아오는 막대한 패널티를 감당하는 중이었다.
[상태 이상, ‘빈사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체력이 50% 아래로 저하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체력 회복력이 30% 경감됩니다.]
……
[상태 이상, ‘착란’ 상태가 되었습니다.]
……
동시에 마성과 뒤섞였던 정신도 되돌아오면서 현기증이 뒤따랐다.
『호오. 이제는 완전히 정신을 잃지도 않는군. 장해. 많이 컸군. 기특한걸? 키키킥!』
연우는 낄낄 웃어 대는 마성의 비웃음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태연한 척 굴었다.
산하 조직을 비롯해,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아르티야의 멤버만 있다면 모를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여태 자신이 보인 신위에 넋이 나가 있다지만.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언제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몰랐다.
저들에게 자신은. 언제나 태산처럼 굳건하고, 하늘처럼 드높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가 이해한 플레이어들이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었다. 호시탐탐 제 욕심만 채우고자 하는 승냥이 떼들.
『센 척하는 것도 그렇고. 간만에 재미있었어.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무럭무럭 자라나라고. 그래야 내가 널 맛나게 먹지 않겠냔 말이야.』
연우는 무의식 아래로 깊게 침잠하는 마성의 목소리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도라.”
“네.”
“인원 점검을 부탁한다.”
에도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쁘게 인원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야와 엘로힘-마군 간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금세 거대 클랜들 사이로 퍼져 나갈 터.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 중에는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놈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빠른 피해 파악과 전열 재정비가 필요했다.
그래도 다행히 주력이 되는 디스 플루토가 멀쩡했고, 랭커들도 크게 부상을 입은 자는 없어 보였다. 대충 어림잡아 헤아려 봐도, 인원수에 그리 큰 변동은 없는 듯했다.
대승인 건 확실했다.
다만, 연우는 들끓는 마력을 진정시키는 데에 모든 의념을 쏟아 부어야 할 판국이라,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도라도 〈혜안〉으로 그런 연우의 상태를 보았기 때문에 별다른 대꾸 없이 곧바로 명령을 이행했다.
“철의 왕좌의 피해는 정원 152 명 중 사망자 12명, 부상자 31명, 실종자 2명…….”
“마희성은…….”
“녹염의 별은…….”
그렇게 인력을 빠르게 파악하던 중, 에도라는 뒤늦게 아르티야의 멤버 중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라버니.”
“왜 그러지?”
연우는 과열된 죄악석을 겨우 진정시켰을 때 즈음, 에도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명이 보이질 않아요.”
“뭐?”
연우가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화아아-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위로 연결되는 채널링이 아닌, 아래로 연결되는 채널링. 사도와의 링크가 활짝 열렸다.
‘도일?’
『카인 형, 죄송해요. 사정이 다급해서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연우가 보고 있는 세계는 도일의 시야였다. 그와 칸이 풀숲을 가로지르면서 누군가를 맹렬하게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블랙 스컬과 마군의 주교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베이럭과 한창 충돌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빠져 있던 마군의 주교들이 라퓨타를 급습한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칠흑의 권능을 개방하고, 여러 신격들과의 충돌에 집중하는 것만 해도 아슬아슬해 주변에 눈을 돌릴를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도일은 채널링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고스란히 연우에게 전달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버…… 아니, 블랙 스컬과의 교전은 없었어요.』
‘뭐?’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당시 도일이 겪었던 기억이 복구되었다.
-이런. 아무래도 대지모신과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날뛰기 시작했나 보군. 그럼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우리는 떠나도록 하지.
-무슨……!
-우리는 애당초 너희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이제는 속세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지. 그런데도 여기에 들른 건.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도일, 너라도 데려갔으면 하는 나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물으마.
블랙 스컬은 도일과 칸이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슬픈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다.
-이 아비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도일은 두말할 것 없이 거부했다.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버지 행세를 하려는 모습이 같잖았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부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말은 무엇이며, ‘속세의 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블랙 스컬과 주교들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라퓨타를 훌쩍 떠났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을 절대 고이 보낼 생각이 없던 도일은 칸과 함께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라퓨타와 탑 외 지역을 벗어나, 탑의 층계를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자잘한 접전도 계속 벌어졌다.
『애당초 엘로힘을 도울 생각이 없었던 건 같아요,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사실 연우도 그게 궁금했었다. 아르티야와 직접 맞닥뜨린 건 엘로힘이 전부였다. 대지모신과 기가스, 기어 다니는 혼돈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있었으면서 정작 마군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너무 이상했다.
만약 녀석들과 충돌하고 있는 와중에 대주교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사실 그가 참여만 했었어도, 연우가 이렇게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고행의 산에서 겪었던 대주교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거기다 용의 미궁에서 강림했던 사타왕까지 나섰더라면…… 연우가 패배했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군은 동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투에 거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대지모신과 기가스들이 강림을 시도하자, 아무런 미련 없이 훌쩍 떠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도일도 연우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연우의 눈빛이 빛났다.
‘너…… 저들이 무슨 목적인지를 알아내려고 뒤쫓는 거냐?’
『예. 엘로힘을 미끼로 던질 만큼의 목적이라면…… 분명히 작은 건 아닐 테니까요.』
마군이 연우에게 가지는 원한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포기를 했다는 건, 더 큰 계획을 그리고 있다는 뜻. 위험할 게 분명했다.
도일은 어떻게든 그것을 막고 싶었다. 여태 자신과 칸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제멋대로 희롱해 놓고서,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막…….』
그 순간, 도일이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췄다. 저만치 앞서 달려 가던 블랙 스컬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방향을 이쪽으로 꺾으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진언(眞言)을 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블랙 스컬을 따라 엄청난 강풍이 휘몰아쳤다.
신력을 동반한 강풍. 녀석의 몸뚱이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는 게 보였다. 천마와 대지모신을 전부 받아들이며 영통(靈通)이 트인 도일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일전에 대주교에게 내려앉았던 사타왕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대신격이었다. 동주 칠마왕 중 다른 누군가가 강림을 시도한 것이다.
채널링이 끊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아직 제대로 된 신격을 갖추지 못한 연우로서는 채널링이 너무 약해, 외부의 강한 충격에 쉽게 흐트러졌던 것이다.
“부!”
연우는 도일이 있던 곳의 좌표를 떠올리고, 곧장 부에게 포탈을 열라고 명령하려 했다.
그런데.
“오라버니.”
갑자기 에도라가 연우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연우는 이따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말하려 했지만, 순간 에도라의 눈동자를 보고 흠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적들에게 포위되던 상황에서도 전혀 흐트러지던 기색이 없던 그녀가.
순간, 연우는 에도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 그중 두 명은 칸과 도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은 누구란 거지?
그러고 보니, 외우주를 떠났을 때부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녀석이 한창 소란스럽게 굴어야 할 텐데.
설마. 하는 마음에 에도라를 보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고 말았다.
“판트 오빠가…… 보이질 않아요.”
에도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