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59화 (459/862)

9화. 중앙 관리국 (1)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도, 머무는 네이티브도, 지켜보는 랭커도, 시스템을 어루만지는 관리자도, 한 발 물러선 낙오자들까지도.

언제부턴가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수백 년간 공고하던 8대 클랜의 질서가 드디어 붕괴되기 시작했노라고.

전란의 시대가 열렸노라고!

아르티야의 등장과 함께 거대 클랜 중 상당수가 줄줄이 무너졌다. 그러자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화를 바라던 여러 네이티브들이 눈물을 머금으며 다시 무기를 쥐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건 스스로의 무력밖에는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다시 층계를 올랐고, 랭커들은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용병, 연합, 클랜…… 어느 곳 하나 가릴 것 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거대 클랜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분쟁이 도처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 플레이어들이 감지할 수 없는 영역, 천계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올림포스와 르 인페르날 간에 벌어진 멸망전을 시작으로, 여태껏 여러 사회들 사이에 흐르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해졌다.

바야흐로.

대전쟁의 시작이었다.

* * *

펑, 퍼버벙-

판트는 〈천왕보(天王步)〉를 무겁게 밟아 나가면서 몸을 과격하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바람을 매섭게 가르는 파공음이 잇달아 울려 퍼졌다. 주먹을 내뻗을 때마다 공간이 우르르 울리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전사경의 이치에 따라, ‘오른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을 때.

퍼어어엉!

그를 가로막던 큰 바위가 호박처럼 너무 쉽게 으깨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뒤에 있던 숲의 일부가 날아갔다. 충격파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딛고 있는 지반이 위아래로 요동칠 정도였다.

푸스스-

판트는 만족에 찬 얼굴로 오른팔을 거둬들였다. 열기가 채 식지 않아 주먹 끝에서 연기가 풀풀 날렸다.

“어때?”

가만히 뒤에서 그의 수련을 지켜보던 연우가 물었다. 옆에 시립해 있던 에도라의 눈망울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판트가 히죽 웃었다.

“따로 말이 필요하우?”

“그도 그렇군.”

연우는 자신이 별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과 브라함이 머리를 맞대어 판트 녀석에게 주었던 오른팔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녀석에게 잘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본래의 팔과 가장 가까운 형태를 한다고 해도, 새롭게 이은 것이다 보니 보통 적응과 재활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판트는 단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적응해 내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궁무신과의 접전에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던 건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이었으니.

보다 순조로운 내력 수발에 이어서 자유분방한 움직임,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핏빛 뇌기까지.

‘의념 절기를 이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거야.’

경지로 치면 명인 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부족원들과 비교해도 괄목할 만한 성장인 게 틀림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젊은 시절의 무왕이나 대장로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매번 그들 두 사람의 전철을 뛰어넘을 거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판트는 벌써부터 그 약속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상승세를 탄다면 정말 그들 두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이 팔, 이전보다 훨 좋은 것 같수?”

“그만큼 신경 썼으니까.”

이왕에 새롭게 달아 줄 팔이라면 부가 기능을 넣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연우와 브라함은 그런 생각에서 많은 장치를 달아 두었다.

대부분 자잘하지만, 주로 무공을 펼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 덕분에 판트의 오른팔은 아티팩트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그것도 S등급의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음.”

“왜?”

연우는 고민에 잠긴 판트를 보고, 왜 그러나 싶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니. 그렇게 좋은 기능들이 달렸다니까, 이참에 다른 부위들도 싹 갈아 치워 볼까 싶어서 말이우.”

“…….”

이건 또 무슨 참신한 병신 같은 소리인 건지. 바뀐 오른팔이 마음에 든다고 몸을 통째로 갈아 치울까 고민하는 모습이, 연우를 할 말 잃게 만들었다. 문제는 판트는 농담이 아니란 점이었다.

“진심인데.”

“이 멍청이가, 진짜!”

결국 에도라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나서고 말았다.

그렇게 죽을 위험을 겪어 놓고도 그딴 말이 나오냐, 머릿속에 제정신은 박고 다니냐, 그딴 식으로 쓸 거면 차라리 팔이 아니라 머리통을 잘라서 오지 그랬냐.

잔소리를 기관총처럼 쏘아 대는 통에, 판트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즐거워서 히죽대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고 말았다.

연우는 어쩐지 요즘 들어 에도라가 판트 때문에 침착하던 모습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어머니도 아니고……!”

“지금 그딴 걸 말이라고! 왜, 내가 직접 팔다리 잘라 줄까? 어? 어?”

“야! 야! 그건 위험하다고! 치워! 으아아!”

결국 에도라는 신마도를 직접 뽑아 판트에게 달려들었다. 판트는 동생이 진심이라는 생각에 진땀을 흘리면서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

연우는 소란스러운 연무장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사이에도 에도라의 판트 사냥(?)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탑 외 지역의 상공을 떠돌아다니는 부유성 라퓨타.

그곳에서 있었던 작은 해프닝이었다.

* * *

“왔나?”

브라함은 나선 계단을 타고 지하 연구소로 내려오는 연우를 보면서 인사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구소 내부를 쓱 훑어보았다.

라퓨타 내 지하에 마련된 연구실은 생전에 칼라투스가 만든 곳답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동안 용종들이 집필하고 수집한 서적들은 물론, 연구 자료와 논문, 희귀한 재료들이 보관된 창고와 여러 시약이 저장된 냉동고까지.

연우는 그런 연구소를 기꺼이 브라함에게 내어 주었고, 브라함은 크게 기뻐하면서 곧바로 외뿔 부족의 마을에 마련해 두었던 던전을 고스란히 이곳으로 이전시켰다.

여태껏 그가 신으로서 쌓은 고대 지식, 연금술사로서 하계를 유랑하며 터득한 연금술 체계에 더해 이제 용의 지식까지 얻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많아진 셈이었다.

그리고. 브라함은 라퓨타에 자리를 잡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판트의 오른팔은 그 중간 과정에서 얻은 성과물이었다.

“성과는 좀 있으십니까?”

“있다마다.”

브라함은 피식 웃으면서 탁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여러 플라스크와 비커를 옆으로 치우고, 그 아래 깔려 있던 책자를 덮었다.

목성(木星)의 서.

책자의 겉면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행성. 그 이름을 붙인 만큼 저 속에 서술되는 내용은 엄청날 터였다.

“저놈을 이리저리 쥐어짜서 내용을 취합해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기어 다니는 혼돈이 저놈에게 준 에메랄드 타블렛은 과거에 파우스트가 받았던 것과는 별개의 것이었어.”

에메랄드 타블렛. 최근 들어 브라함이 다시 연구를 시작하게 된 타계의 지식 체계.

현자의 돌을 만드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던 지식 체계는 사실 ‘시작’에 불과했다. 때문에 브라함은 최근 들어 밤낮없이 텍스트 복원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우는 슬쩍 한쪽 구석에 놓인 입방체 형태의 유리 상자를 보았다.

끄어어-

「살…… 려 줘. 제발……!」

좁은 입방체 안에는 망령 하나가 불길에 휩싸인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신음에 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베이럭이었다.

“계속 저런 식이라네. 살려 달라는 말을 계속 해 대더군. 저 말이 지겹지도 않은 건지. 참 끈질긴 놈이야.”

죽여 달라가 아닌 살려 달라. 그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단 뜻이었다. 그동안 연옥로의 불길에 그토록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연우와 브라함은 더 즐겁게 녀석을 쥐어짜고 있었지만.

“하여간. 그렇게 해서 얻은 두 에메랄드 타블렛을 이리저리 대조해 보면서 취합한 결과…… 이것이 원래 멀쩡했던 텍스트를 찢어 놓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그리고.”

브라함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본래 있을 원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도.”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도 듣지 않았던가.

-‘계시록의 원전(元典)’을 달라는 것인가?

-계시록은 내 것이 아니다.

-내놓으라 하면 주머니에서 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물건인 줄 아느냐? 모든 우주와 차원의 지식이 총망라된, 태초의 거룩한 말씀과 종말의 성스러운 예지가 담긴, 역사와 시공의 기록이 한낱 필멸자 따위가 감내할 수 있는 물건이라 여기는 것인가? 미쳤구나! 광오하도다, 인간!

계시록의 원전.

모든 우주와 차원의 지식이 총망라된 집합체.

태초와 종말, 역사와 시공의 기록.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에메랄드 타블렛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 탑에 전파된 건 아주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전지와 전능에 가깝다는 우주적인 존재인 그도 접근할 권한이 없노라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현자의 돌을 탄생시킨 지식 체계가 단지 그것의 일부라면. 대체 원전은 얼마만큼 거대한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는 걸까?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연우와 브라함은 여기 있는 것을 바탕으로, 그 크기와 내용을 가늠해 보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목성의 서’였다.

비록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으로, 아직 밑그림도 그리기 힘든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연우와 브라함은 이게 실패할 거라고 예상치 않았다.

“물론, 이렇게 해서 얻은 성과도 절대 작지 않네만.”

연우는 브라함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에 마련된 유리관 안에는 동생의 클론이 이상한 액체에 잠겨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 액체는 목성의 서를 토대로 만든 새로운 현자의 돌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심장에 박은 현자의 돌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사실 ‘현자의 돌’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도 난감한, 전혀 다른 형태의 마력 기관이라 보는 게 옳았다. 앞으로 에메랄드 타블렛에 대한 연구가 더 깊게 진행될수록 저 액체도 계속 강화될 테지.

그리고 여기서 완성될 클론은 언젠가 되찾아올 동생의 영혼과 사념체가 머물 그릇이 되어 줄 것이다.

베이럭에게 고마운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면. 동생의 ‘부활’에 큰 이정표를 세워 주었단 점이었다.

「살고 싶…… 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풀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녀석은 영원토록 저 안에 갇혀 불길 속을 굴러다녀야만 했다.

“그럼 그걸 토대로 죄악석도 다룰 수 있겠습니까?”

동생의 육체 복원과 더불어 연우는 한 가지를 더 추구했다.

겨우 얻은 죄악석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

비에라 듄은 영혼석 하나만으로도 대지모신을 감염시켜 대신격으로 거듭났다. 물론, 거기엔 대지모신의 거대 의지도 있었다지만, 그에 비하면 영혼석을 두 개나 가진 연우는 너무 걸음이 느렸다. 죄악석이 가진 가능성의 겉면만 핥아 대는 꼴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부족한 신격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바라는 마지막 소망도 이룰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번에도 브라함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여기서 얻은 텍스트에는 현자의 돌로 향하고, 그것을 조합해서 완성시키는 방법밖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네. 이것을 활용할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으니 아무래도 다른 텍스트를 구해야 할 걸세.”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어쩔 수 없지.”

“역시 칠흑으로 가는 길을 확보해 놓고 나서, 에메랄드 타블렛의 남은 텍스트도 구해야겠습니다.”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래도 해야겠지.”

“예.”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함도 마주 끄덕이다, 화제를 돌렸다.

“그럼 칠흑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확보할 생각인가? 튜토리얼로 건너갈 생각이라는 건 알겠네만,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관리국의 허락이 있어야 할 텐데?”

“예.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관리국은 아마 자네라면 이를 갈고 있을 걸세. 아무리 시스템이 있다 해도, 저들도 사람인지라.”

그동안 연우가 연루되어 망가졌던 스테이지만 세 개였고, 최근에는 대전쟁을 일으키면서 도처에 크고 작은 혼란이 계속 빚어지는 중이었다. 거기다 그의 여파로 천계에서도 한창 소란이 벌어지는 중이었으니.

당연히 관리국은 가뜩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천계까지 감시해야 하니 죽어 나갈 판국일 것이다.

그런 데다 대고 새롭게 열릴 이번 회차의 튜토리얼에 접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고?

관리국으로서는 펄쩍 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또 연우가 무슨 사고를 쳤다가는 이번 회차는 고스란히 날려 먹는 셈이었으니.

“우선 관리국으로 가서 사정을 좋게, 잘, 설명해야겠죠.”

브라함은 어쩐지 ‘좋게’와 ‘잘’이라는 단어의 억양이 비틀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들이 자네를 피할 텐데?”

“피할 수 없게 만들어야죠.”

연우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럴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스테이지 하나가 또 망가져 나가겠구만.’

브라함은 또 며칠간 야근에 시달릴 예정인 가련한 관리자들을 위해 명복을 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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