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중앙 관리국 (6)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아아!”
연우가 어슬렁거릴 때마다 지면에다 머리를 박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은 눈두덩이에 저마다 시퍼런 멍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씨발, 대체 어디서 저딴 놈이…….’
‘괴물 같은 새끼! 정말 시스템이 사라진 거 맞아?’
‘이거 대체 언제 풀어 주는 거지? 으아아! 머리 빠개지겠다.’
처음에는 신입이 들어왔다며 잔뜩 들떠 있었다. 채굴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이런저런 잔심부름도 시킬 겸 해서 부려먹을 생각이었는데.
시비를 건 순간 눈앞이 번쩍인다 싶더니 분명 암굴에서는 볼 수 없을 별을 보고 말았다.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만 것이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임들이 호통을 치며 달려들었고, 그렇게 줄줄이 싸움이 이어지면서 패싸움이…….
‘패싸움은 무슨! 그게 일방적인 구타였지, 어떻게 패싸움이 되겠냐고!’
정말이지 신입은 ‘날아’ 다녔다. 시스템의 가호를 따로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족히 수십 명은 될 장정들이 둘러싸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더니 죄다 때려눕힌 것이다.
마지막에는 죄수들 사이에서 ‘왕’이라고 불리는 케미칼마저 양쪽 눈에 멍을 주렁주렁 달고 땅에다 머리를 박아야 했으니.
뒷짐을 지고, 머리와 두 발로만 바닥을 지탱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못할 짓이었다.
그나마 그동안 개인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줄줄이 쓰러질 뻔했으니. 하지만 이마저도 몇 시간이 지나고, 다른 기합을 연달아 받으니 죽을 맛이었다.
“씨팔…… 어디서 무왕 같은 새끼가 또…….”
결국 어떤 녀석이 참다못해 중얼거린 혼잣말에 다른 이들이 전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엿 됐다!’
‘젠장! 저 새끼 나중에 뒈졌어!’
그런데.
“음? 스승님을 아나?”
‘스, 스승?’
기합을 받던 죄수들의 시선이 죄다 연우 쪽으로 쏠렸다.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무왕의 제자라니!
죄수들의 머릿속으로, 아주 오래 전에 거하게 사고를 치고 갔던 무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쩌렁쩌렁하게 웃어 대던 모습까지.
‘그러니까 이렇지!’
‘무왕이라니! 왜 하필!’
‘젠장! 그놈이 이제는 제자까지 보내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아아아아! 사제지간이 쌍으로!’
그들은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 *
“일어나.”
연우가 녀석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녀석들의 눈 밑은 어느새 퀭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시비를 걸었던 두셋만 두들겨서 이것저것을 캐물을 속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암굴에 있던 대부분의 죄수들과 줄줄이 싸움이 붙고 말았다. 간만에 직접 몸을 움직이는 싸움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흥이 돋았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부딪쳤던 수장쯤 되는 작자는 그래도 다른 놈들과 다르게 제법 실력이 뛰어나 재미도 있었다.
뭐, 그래 봤자 다섯 합을 못 넘기고 다른 놈들처럼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상태에서도, 연우가 빈틈을 보이면 바로 달려들겠다는 듯 반항심 섞인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열사(熱砂)의 사형인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어.’
열사의 사형인. 지금은 잊힌 지 오래였지만, 아홉 왕이 탑을 지배하기 이전에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50여 년 전, 51층의 중산에서 산을 오르던 랭커들과 시비가 붙어 그들을 학살하면서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던 그는.
비록 ‘쌍성(雙星)’이라 불리던 마군의 검은 새벽과 외뿔부족의 핏빛 현자에 비하면 몇 끗발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식탐황제나 마그누스에 비견할 만한 자였다.
그러다 아홉 왕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갑자기 종적을 감춘 걸로 알려져 있었는데.
설마 암굴에 들어와 있었을 줄이야.
‘죄수들 중에 관리자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다더니. 이자도 그걸 위해 놔둔 건가?’
관리국과 죄수들 간의 관계, 형벌의 집행과 관련된 자세한 사안은 알려진 바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열사의 사형인이 여기에 있는 정확한 내막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유추하는 게 전부일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이곳은 중앙 관리국이 직접 관리하는 감옥. 특히 야네크의 암굴은 A급 이상의 블랙리스트들이 투옥되는 곳이었다.
여기에 있는 죄수들 모두가 한창 탑에 오를 때에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거들먹거릴 만한 실력자였단 뜻이었다. 지금은 비록 연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원산폭격이나 하고 있는 비루한 신세였지만.
“케미칼.”
“왜 그러오?”
열사의 사형인, 케미칼은 부리부리한 눈매로 연우를 계속 노려보았다.
“내 몫까지 부탁하지.”
각 죄수들에게는 매일 배정된 채굴 할당량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은 채굴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교도보들도 되도록 죄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을 하지 않는 편. 그러니 그가 책임지고 알아서 자신의 양을 채우란 의미였다.
한때, 공포의 대명사로 통했던 케미칼이었지만, 지금은 한낱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케미칼은 순간 짜증이 났는지 관자놀이가 꿈틀거렸지만.
“……맡기시오.”
꾹 목소리를 억누르면서 몸을 반대로 홱 하고 돌렸다.
쿵.
쿵.
그래도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으려는 듯, 고의로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수하들을 데리고 갱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반항기 가득한 모습을 보여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않았다.
「울 주인, 삥 뜯네. 캬! 여름여왕도 다스리려고 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던 게 저 열사의 사형인인데. 이제 그런 인간한테도 삥을 뜯는 인성……. 역시 인성왕, 당신은 그저 빛.」
연우는 한순간 샤논에게 유성검결을 먹여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다가, 그냥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케미칼과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녀석의 뒤를 따르는 죄수들을 보았다.
‘의념 통천. 용신안.’
우웅-
순간, 연우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가볍게 떨리더니, 눈가를 따라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지되었던 ‘아트만 시스템’이 일부 가동되었습니다.]
[스테이지 효과가 일부 배제됩니다.]
[힘을 일부 되찾았습니다.]
[민첩을 일부 되찾았습니다.]
……
[스킬 ‘용신안’이 발동, 대상자들을 관찰합니다.]
연우는 의념 통천을 사용해서 능력을 일부 되찾는 한편, 용신안으로 빠르게 죄수들을 훑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턱도 없나.’
동생이 만났던 흡혈군주는 분명히 그녀가 전성기로 활동하던 시절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발전한 면도 있다고 했다. 그건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그런 그녀가 종적을 감추려 한다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을 테지.
‘흡혈군주는 얼굴을 바꾸는 재주도 있다고 했었고.’
특히 그녀의 시그니처 스킬, 〈망자 가면〉은 죽은 영혼에게서 기억과 인격을 가면의 형태로 강제로 뽑아내는 스킬.
때문에 흡혈군주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을 때에도, 수많은 가면으로 존재를 바꿔 가면서 살아 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만약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망자 가면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면, 지금도 어떤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의 행세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꿰뚫는다는 용신안과 화안금정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터.
더 정확하게 찾기 위해서는 모든 능력을 다 되찾는 게 좋을 테지만, 감시도 심한 판국에 지금은 굳이 눈길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 의심 가는 후보는 총 넷.
첫 번째는 방금 전에 자신을 한껏 노려봤던 케미칼.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열사의 사형인 같은 유명인의 행세를 하고 있으면 정체를 숨기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녀석과 손속을 섞어 본 결과, 그럴 가능성은 적은 것 같았다.
‘그랬다면 용신안이 뭔가를 눈치챘을 테니까. 비록 지금은 약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두 번째는 케미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면서 암석 바구니를 나르고 있는 하플링, 메리.
겉보기에는 어린 소녀처럼 보이고, 케미칼과 그 무리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일꾼으로 보였지만.
‘강해. 케미칼쯤은 쉽게 거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저 어리숙해 보이는 얼굴 아래에 가려진 힘은 아직 연우도 다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따금 연우와 눈이 우연히 마주칠 땐 겁을 먹은 듯 고개를 내리깔았지만, 지면을 보는 동공은 아주 평온했다.
세 번째는 한쪽 구석에서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괭이질에만 몰두하고 있는 마른 체구의 다크 엘프, 길피.
그녀는 다른 죄수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괭이질. 정확하게 광맥의 중심만 노리고 있었다. 혈루석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르단 뜻이야.’
겉보기엔 속도가 느리고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괭이질에 들어가는 힘 조절이나, 캐내는 혈루석의 등급은 하나같이 뛰어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죄수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수완가란 뜻이었다. 실력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흡혈군주가 아니라면, 순전히 혈루석을 얻는 데 혈안이 있는 녀석일 테고.’
듣자 하니 다크 엘프는 본래 ‘니다벨리르’라는 행성의 지하 마을에서 살면서 온갖 광석과 금속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자랑한다고 했다.
때문에 그녀가 정말 다크 엘프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날 감시하고 있는 자.’
타넥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뒤를 몰래 밟고 있는 녀석. 용신안을 제대로 열 수가 없어 정체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제 딴에는 숨는다고 숨었지만, 연우의 예리한 감각까지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가진 실력만 놓고 본다면 케미칼이 시스템의 가호를 받았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처럼.
이들 넷 모두 정체를 알기 힘들고, 힘을 숨기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일이 건드려 볼까?’
연우는 내심 강한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래서는 조용히 라플라스에게 접근해서 입장권만 얻고 돌아온다는 계획이 일그러지게 돼.’
흡혈군주는 모종의 이유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암굴에서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섣불리 그녀의 은거를 방해했다가는 미움만 살 수 있었다.
더구나.
‘스테이지에서와 다르게 여기선 사고를 치면 타넥이 즉각 나설 테니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바로 제압될 게 분명해.’
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라나라도 소환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동생을 라나의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찾아올 정도로 혈육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흡혈군주였으니. 〈사자 소환〉을 사용해서 라나를 부른다면 흡혈군주도 당장 반응을 보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조용히’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셈이니.
만약에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흡혈군주가 아닐 경우, 사자 소환을 했다간 권능을 사용할 줄 아는 걸 바로 들키게 된다.
결국 형벌 시간이 다 채워지기 전에 저들을 계속 관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다면, 의심 가는 놈들을 전부 납치해 버리면 그만이지.’
타네의 개입이 두렵다면, 애당초 녀석이 나설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사이에 후딱 일을 해치우면 되는 거고.
다만, 이때 사용할 방법은 관리국을 완전히 엿 먹이는 짓이라, 가뜩이나 51층의 붕괴로 잔뜩 약이 올랐을 관리국의 화에다 부채질을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자칫 완전히 공적으로 낙인 찍힐지도 몰라 꺼려졌던 것인데.
「주인이 언제 그런 걸 일일이 따졌다고?」
샤논의 말도 틀리지 않아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도 이렇게 하고 잘만 돌아다니셨다고 하니. 여기서 사고를 친 것도 죄다 스승님께 전가 되겠지.’
[의념 통천]
여태 잠겼던 의념이 유동하면서 죄악석과 드래곤 하트를 동시에 깨우기 시작했다.
쿠쿠쿠!
덕분에 퍼져 나간 그의 기세가 대기를 격동시켰다. 저만치에서 움직이던 죄수들이며 교도보들까지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트만 시스템이 전부 회복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제자가 스승 따라간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려고.’
활짝 열린 용신안의 시야에 따라 천장에서부터 벽을 가로지르는 무수히 많은 결이 보였다. 이곳 암굴을 가로지르는 혈루석의 광맥이었다.
연우는 그중 한 곳에다 손을 얹었다.
「언제는 스승이 별 도움 안 된다고 투덜거리더니, 이제는 따라간다고 하는 거 보소…….」
콰콰콰!
연우가 결을 따라 마력을 쏟아 부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천장에서부터 돌가루가 부스스 쏟아졌다.
암굴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