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중앙 관리국 (8)
“……뭐? 다시 말해 보아라.”
타넥은 수하 온이 가져온 보고에 인상을 찡그렸다.
온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놈을 제압하고자 나섰습니다만…… 기세가 너무 거센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타넥은 침음을 삼켰다.
온은 구구절절한 변명 없이 그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지난 수십여 년 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맡은 임무에 충실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상황이 그만큼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그도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으니, 녀석을 바로 옆에서 감시하고 있던 그녀는 얼마나 황당했을지 훤히 보였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더니. 이놈은 더한 놈이었구나!’
무왕의 옛 별칭은 ‘걸어 다니는 재앙’. 사건이란 사건은 다 치고 다니고, 지나는 곳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면서 얻은 별칭이었다. 그랬던 녀석마저도 사흘 동안 조용히 굴었던 곳이 바로 여기, 야네크의 암굴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암굴에 수용된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벌써 사고를 쳐 버렸으니!
그것도 단순히 죄수들이나 교두보들을 두들겨 패는 수준이 아니라, 암굴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니. 광맥을 건드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기함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친놈 같으니라고! 여기가 무너지면 자기도 똑같이 생매장당하는 신세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물론, 무왕의 제자 놈에게 그런 상식 따위를 바라는 건 사치나 다름없는 일이기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시스템의 제약은 또 어떻게 탈출했느냐 하는 의문도 잠시 스쳤지만, 역시나 상식 따위를 바라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야네크의 암굴은 중앙 관리국에 있어서도 절대 망가져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아다만틴의 주재료가 되는 혈루석을 비롯해 다양한 중요 광물이 생산되는 광산이니만큼, 언제나 금전적으로 많이 쪼들리는 관리국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자금원이기도 했고.
비밀리에는 타계의 신을 비롯해 ‘바깥 존재’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절대 이대로 망가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중앙 관리국에 뼈아픈 타격으로 다가올 테니까. 심처에 갇혀 있을 라플라스에게 아직 캐내지 못한 것도 많은 까닭에 그를 잃을 것 역시 걱정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한때 악마왕이라고 숭상받았던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무왕 때처럼 이번에도 농락을 당한다면 정말이지 혀를 빼물고 죽어야 할지도 몰랐다.
『교도보들은 지금부터 내가 지정해 준 위치를 따라 집결하도록 한다. 최소한의 인력만 남아 죄수들을 통솔하고, 나머지는 전부 무장하라. 목표는 영왕 ###!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놈을 잡아라! 필요하다면 사살도 허락하겠다!』
타넥은 암굴 곳곳에 퍼져 있는 교도보들을 비롯해, 잠시 휴식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게까지 모두 어기전성을 날렸다.
관리국의 존재 목적은 스테이지 관리 및 질서 유지. 당연히 플레이어들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시스템의 제재를 받게 된다.
그래서 관리국도 죄수들을 다루는 데 있어 시스템을 이용하긴 해도, 그들에게 물리적인 제재는 절대 가하지 않았다.
특히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라도 한다면 격의 손실이 따를 정도로 대가가 컸다.
그런데도 사살을 허락한다는 건, 그 모든 책임을 타넥이 다 짊어지겠다는 뜻.
그만큼 타넥이 이번 사안에 대해서 절대 그냥 묵고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기도 했다.
“온, 너는 즉시 중앙 관리국에 연락을 넣어라. 특경단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되도록 빨리, 많은 인원수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전해. 상대는 아홉 왕 중에서도 수위에 꼽힌다는 작자이며, 신살을 해내고, 무왕의 제자이기도 한 괴물이다.”
온이 알겠다면서 다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갑자기 그들 사이로 다른 수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냉. 암굴에서 수하로 거둔 온과 다르게, 타넥이 마계에 있을 시절부터 줄곧 호종해 온 수천 년 된 오른팔이었다. 현재는 암굴의 부소장이기도 한 자. 그런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급(至急)입니다!”
암굴이 무너지려 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 뭐가 있다고?
타넥이 쓸데없는 보고라면 나중에 연우를 제압하고 나서 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 들리는 보고에, 그는 경악하다 못해 이제 두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해하고 말았다.
“케미칼을 비롯한 다우드 형제단의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문에 죄수들의 저항이 극심해 교도보들이 애를 먹고 있습니다!”
“뭐?”
엎친 데 덮친 격.
타넥이 처한 상황은 딱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 * *
쿠쿠쿠!
요란하게 흔들리는 암굴 안에서.
“뭐지, 이건?”
연우는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광맥을 흡수하다 말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를 당황케 한 건 총 두 가지.
그중 하나는.
[‘초감각’으로 감별한 〈혈루석〉을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흡수합니다!]
[최상급 혈루석을 15만큼 획득했습니다.]
[중급 혈루석을 179만큼 획득했습니다.]
[중상급 혈루석을 90만큼 획득했습니다.]
……
[획득한 혈루석이 농축되어 새로운 형태의 광석 〈혈정〉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혈정을 3만큼 획득했습니다.]
[혈정을 5만큼 획득했습니다.]
……
혈루석은 애당초 아다만틴의 주재료가 되기 때문에 잔뜩 챙겨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하데스의 대신물, 퀴네에의 바탕이 된 아다만틴 노바를 다시 재생산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흡혈군주도 납치하고, 비싼 혈루석도 잔뜩 챙기고. 제자리에서 일석이조를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혈루석을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채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혈루석이 저들끼리 농축되더니 별 이상한 형태의 광석이 되고 만 것이었다.
[혈정(血精)]
종류: 광물
등급: EX
설명: 극순(極純)한 상태의 혈루석 성분들이 농축되어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성질의 광석. 짙은 피보다 더 선명한 선홍색이 인상적이다.
정확한 근원은 알 수 없으나, 어떤 거대 존재가 흘린 피가 응고 되어 남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 단단한 경도를 자랑해서 쉽게 사용할 수 없으나, 만약 이 속에 담긴 물질을 정제하여 쓸 수 있다면 막대한 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탱크(Energy Tank)로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엿보인다.
혈청은 연우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물질이었다. 심지어 수많은 특전을 통해 탑이 가진 비밀이란 비밀은 거의 알아냈던 동생마저도 찾은 적이 없었다.
혹여 이와 비슷한 정보가 있나 싶어 일기장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역시나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설명창에 적힌 ‘EX등급’과 ‘에너지 탱크’란 단어가 가장 강렬하게 연우의 눈을 사로잡았다.
EX등급이라면 탑 내에서도 절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물질이라는 뜻.
거기다 에너지 탱크로서의 가능성이 크다면, 하이 랭커들조차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언제나 마력의 고갈에 시달리는 이들, 특히 마법사나 정령사 계통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일 테지.
연우로서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니었다. 원하던 아다만틴이 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브라함과 헤노바에게 가져다준다면 이리저리 실험을 하다가 알아서 뚝딱뚝딱 좋은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줄 테니.
문제는 혈정이 담고 있는 기운이 어딘지 낯이 익다는 점이었다.
신력(神力).
그것도 탑 내의 신적 존재에게서 나는 신력이 아닌,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진 신력.
혼돈을 품고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처럼, 타계의 신들에게서 느껴질 법한 신력이 왜 여기에 담겨 있단 말인가!
‘이건 진짜 생물의 혈청(血淸)이 응고된 것처럼 보여. 생물이되, 생물이라 하기 힘들 어떤 것의 혈청…… 관리국 놈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애당초 혈루석에 대한 연원은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그저 관리국이 관리하는 광산에서 나는 금속이라는 것이 전부일 뿐. 하지만 연우가 봤을 때, 혈정이 진짜고, 혈루석은 그 주변에서 나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야네크의 암굴이라는 곳, 정확하게 위치나 좌표가 어떻게 되는 거지?’
흔히 ‘미개척지’라고 분류되는 관리국의 영역들이 사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큰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탑의 존재 의의나 근원에 대한 비밀이 있을지도…….
여하튼 뜻하지 않게 관리국이 숨기고 있는 비밀의 한쪽 단면을 엿본 것 같아, 생각지 못한 소득이라면 소득을 얻은 셈이었다.
화다하기는 해도 그로서는 절대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연우를 당황케 했던 두 번째 이유는 조금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반란?’
혈루석의 광맥이 빠른 속도로 흡수되면서 암굴이 무너질 것처럼 굴자, 갑자기 죄수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겁에 잔뜩 질려 혼란스러워질 거란 예상과 다르게, 녀석들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질서 있게 움직였다.
각자가 정해진 조별로 움직이면서 진형을 구축하고, 후방에 있던 이들이 어디선가 무기 따위를 가져와 공급하면서 교도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죄수들은 대부분 가루가 되도록 곱게 빻은 혈루석을 저마다 입에 한가득 털어 넣으면서 움직였다.
그러자 여태껏 정지되었던 마력이 움직이면서 시스템의 가호가 되돌아왔다. 온갖 스킬들이 발현되면서 화려한 이펙트가 암굴을 가득 메웠다. 교도보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죄수들의 반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교도보들의 힘이 더 강하다지만.
이렇게 좁은 갱도에서 수적으로 압도적인 죄수들을, 그것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을 당해 내기란 요원했다.
그래도 그들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정도는 아닌지라, 갱도는 단번에 두 세력 간의 충돌로 번잡스러워졌다.
“교도보들을 몰아내라!”
“감히 그동안 우리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이거지? 다 뒈졌어!”
“형제단의 이름으로! 혈루석을 독점하여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했던 너희 관리국을 처벌하겠다!”
한쪽에서는 곡괭이나 죽창 따위를 무기로 삼아 매섭게 스킬을 터뜨리고.
“젠장! 막아!”
“대체 시스템의 제약은 어떻게 벗어난 거지?”
“그게 지금 중요해? 이 빌어먹을 플레이어 새끼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자기네들 착취라도 하는 줄 알겠네! 돈에 눈이 멀어서 여기 남겠다고 징징대던 건 네놈들이었잖아!”
“타넥 님이 곧 오신다! 그때까지 버텨라!”
다른 한쪽에서는 관리국들이 시스템을 컨트롤하여 다시 죄수들에 대한 제약을 시도하는 한편, 권리를 사용해서 방호막을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
뚫으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 위에서 암굴의 낙석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건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투였다.
「캬! 개판이구만, 개판이야. 어째 우리 주인님이 행차하시는 곳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 이 정도면 과학 아녀?」
샤논이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였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그냥 무시하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납치도 실패했어.’
원래대로라면 암굴이 무너질 위기에 한창 혼란스러울 때, 후보자 놈들만 싹 그림자 속으로 납치해서 튈 생각이었건만.
타넥의 추적도 갱도가 일부 붕괴되고 나면 혼란을 수습한다고 정신이 없을 테니, 자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라고 계산했다.
그래서 그 틈에 유유히 라플라스가 있는 심처로 가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다.
혼란은 발생했지만, 원하던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보아하니 죄수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가, ‘우연히’ 자신이 사고를 치려 할 때 즈음에 맞춰서 봉기한 것 같았다.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무엇보다. 저들이 편법이긴 해도,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아낸 이상, 괴이를 통한 납치는 이미 물 건너간 셈이었다.
‘이거, 일이 너무 복잡하게 꼬였어. 대체 어디지? 관리국의 감시를 피해서 이 정도 규모의 일을 저지를 만한 곳은 몇 곳 없을 텐데?’
당장 의심 가는 곳은 두 곳.
다우드 형제단과 시의 바다.
두 곳 모두 거대 클랜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외부 활동을 크게 하지 않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비밀 결사 조직쯤으로 치부되는 곳.
당연한 말이지만, 녀석들의 목적에 대해서도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동생도 녀석들과 이렇다 할 큰 접점은 없는 편이었던지라, 좀 더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일을 꾸민 놈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힘들 것 같았다.
‘흡혈군주의 짓일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야네크의 암굴에서 정체를 숨겼다고 해도, 흡혈군주의 솜씨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도 아니면.
‘둘 다 거나.’
어떤 세력이 잠적해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을, 흡혈군주가 적당하게 이용해 먹는 것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 가는 상황 속에서, 연우는 적당히 난리만 피우다가 뒤로 빠져야겠다던 첫 계획과 다르게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연우는 초감각을 이용해, 이런 사달을 일으킨 케미칼과 하플링 메리 등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인지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갱도의 깊숙한 안쪽으로, 타넥 등이 절대 접근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던 미개척지 쪽으로 서둘러 이동 중이었다. 숫자는 다섯.
심처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반란은 졸들에게 맡겨 눈을 가리면서, 자신들은 다른 뭔가를 노린다는 거지? 성동격서에 양동 작전. 괜찮은 수로군.’
이쪽에게 읽히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연우는 그런 뒷말을 삼키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미 이 근방에 있는 광맥에서 혈루석이란 혈루석은 모조리 흡수해 버린 상태. 이제 이곳은 하급 따위의 찌끄레기밖에 남지 않았으니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아마 이렇게 계속 충격이 주어져서야, 암굴은 그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붕괴될 가능성이 더 컸다.
“샤논, 한령.”
「으하하! 드디어 우리도 사고 치는 거야? 주군만 계속 재미 봐서 얼마나 좀이 쑤셨는지 알아?」
「하명하십시오.」
“너희는 길피와 타넥의 수하를 끌고 와라. 그동안 나는 놈들의 뒤를 쫓는다.”
「분부, 받듭니다요!」
「복명.」
스르륵-
두 개의 그림자가 연우의 그림자에서 분리되어 빠른 속도로 갱도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부.”
「명. 을. 받듭. 니다.」
순간, 연우의 발밑에 붉은 포탈이 깔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다른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발밑 아래, 케미칼과 하플링 메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인영이 갱도 안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기척을 느꼈는지, 케미칼과 메리가 달리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넌……!”
그 순간.
[하늘 날개]
쐐애액-
연우는 화려하게 날개를 피우면서 강하하고 있었다. 타넥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상황. 조금이라도 바삐 놈들을 제압해서 몸을 숨기는 게 이득이었다. 대답해 줄 시간 따윈 없었다.
가장 먼저 제압을 시도한 녀석은 케미칼.
“놈!”
케미칼은 벌써 시스템의 가호를 되찾았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좀 전에 당한 수치를 되갚아 줄 기회였다.
맨몸이었다면 모르되, 열사의 사형인이라 불리던 힘을 되찾은 지금이라면. 저 오만방자한 목을 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쾅!
케미칼이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그의 머리통은 지면을 내려 찍고 있었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 모두가 ‘어?’ 하는 순간에 케미칼은 이미 입에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었다. 몸뚱이가 빠르게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놈.”
연우는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즐긴 것처럼 작게 중얼거리면서 다음 타깃인 메리에게로 움직였다.
그 순간.
“삼켜, 저놈을 당장!”
화아아!
갑자기 활짝 열린 메리의 앙증맞은 손에서부터 엄청난 힘의 인력(引力)이 발생하면서 연우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바토리의 흡혈검!
흡혈군주의 시그니처 스킬이 연우가 아닌 타인의 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