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68화 (468/862)

18화. 중앙 관리국 (10)

메리가 공포에 질려 빳빳하게 굳는 사이.

츠츠츠!

발밑에서 그림자가 잔뜩 올라와 개미지옥이 개미를 삼키듯이 그녀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림자의 늪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메리는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들의 정체가 대체 뭐지?’

연우는 조용히 잠든 메리를 느끼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케미칼과 메리. 이만한 인물들을 한데 묶어서 움직이는 세력이라면, 절대 만만치 않을 곳일 텐데.

‘시의 바다는 아니야.’

시의 바다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성향만 따진다면 이들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을 상징하는 인장(印章)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따지자면, 시의 바다는 ‘클랜’이라기보다는 ‘비밀 결사 조직’에 가까운 색채를 자랑했다.

철저하게 점조직으로만 운영되며, 수뇌부를 제외하면 클랜원들도 서로 간의 정체를 알기 힘든 곳. 머릿속에 오로지 한 가지의 공통된 목표만을 담은 채, 그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에 드러난 신분들이 제각각 달랐다. 대부분이 자유 용병으로 돌아다니는 편이었지만, 각 층계의 네이티브 등으로 머물기도 하고, 상인 조합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때로는 정체를 숨기고 거대 클랜에 잠복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각 클랜들은 그런 세작들을 걸러 내는 데 사활을 걸기도 했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의 바다를 구분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임무를 맡아 처리할 때면, 서로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몸의 어딘가에 표식을 남겨 두었다.

모종의 장치를 사용해야만 알아낼 수 있는 표식을.

그들은 이를 두고 ‘시(時)’ 혹은 ‘시(詩)의 인장’이라고 불렀다.

시의 인장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각 클랜들이 잠복한 시의 바다를 걸러 내기 위해 그리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시의 인장은 각 임무에 참여한 이들이 따로 수뇌부로부터 전해 받은 방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연우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가 부리는 ‘그림자 영역’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림자 영역]

등급: 권능

숙련도: 72.6%

설명: 사왕좌에서 비롯된 권능이 칠흑의 권능과 함께 빚어져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권능.

그림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다른 권능들과 연계하기 쉬워 다루기가 수월하며, 안쪽은 공허와 연결되어 이 속에 물건이나 사람 따위를 잠식시켜 보관할 수 있다.

이때 잠긴 물체에 대한 사념 정보는 시전자에게 전달된다.

영역에 수용한 물체에 대한 정보를 캐낸다. 이것을 통해 케미칼과 메리에게서 그들의 몸체 어디에도 시의 인장이 없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녀석들이 흡혈군주인지 아닌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 파악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아직 거기까지 기능이 발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곳은 시의 바다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단 하나.

‘다우드 형제단.’

다우드 형제단은 시의 바다와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상반된 성격을 자랑했다.

테러 조직.

아마 그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실제로 놈들은 혈국이나 마군보다 더한 미친놈들이었다. 둘은 그래도 자신들만의 신념이라도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었으니까.

파괴와 광기.

이외에 추구하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거기서 나오는 쾌락만을 추구할 뿐이었다.

이상을 두고 움직이는 시의 바다처럼, 다우드 형제단도 최초로 결성되었을 때에는 그들만의 이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형제들’ 간에 존재하던 목표와 이상은 빛이 바래고 말았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파괴와 광기만이 남아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파괴와 광기를 위해서라면 수십 년을 공들여서 쌓은 탑을 무너뜨리기도 주저하지 않는 미친놈들.’

다우드 형제단은 레드 드래곤을 제외하면 아르티야와 가장 거칠게 대립한 곳이기도 했다.

그들의 수장, 흑태자와 동생이 부딪쳤을 당시.

녀석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면서 했던 말은 일기장을 보았던 연우의 머릿속에도 단단히 각인되어 있을 정도였다.

-파하하! 참으로 우스운 걸 묻는군. 왜 싸우냐고? 그야 재미있으니까!

재미.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싸웠다는 뜻이었다.

하늘 위에 고고히 떠 있는 태양, 차정우. 그를 떨어뜨리는 것이 못내 즐겁다고 했다던가. 그 희열이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어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했다.

‘아가레스와 비슷한 놈이었지.’

[아가레스가 당신의 생각을 읽고 강하게 항의합니다!]

[아가레스가 그런 미친놈과 비교되는 것이 불쾌하다며 언짢은 기색을 보입니다.]

[아가레스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당신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종용합니다.]

[아가레스가 짜증을 냅니다.]

[아가레스가 생각을 바꿀 것을 채근합니다.]

[아가레스가 다시 따집니다.]

[아가레스가…….]

……

[사용자의 권한으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임시 차단되었습니다.]

[관리국에서 아가레스의 과도한 메시지 남발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가 거세게 항의합니다.]

[관리국이 묵살하였습니다.]

[‘르 인페르날’ 소속의 악마들이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를 외면합니다.]

[바알이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를 보며 혀를 찹니다.]

‘아니. 그래도 그놈보다는 낫나.’

최소한 아가레스는 동생에 대한 집착은 심해도 이따금 도움은 주었으니까. 악마술을 사용하면서 마법에 큰 발전이 있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항의가 취소되었습니다.]

[‘르 인페르날’ 소속의 악마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바알이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반면에 흑태자는 오로지 동생의 날개를 꺾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동생이 쓰러진 순간, 곧바로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듯, 다우드 형제단은 언젠가 연우가 혈국이나 엘로힘처럼 반드시 박멸해야 할 벌레처럼 생각하는 곳이었다.

다만, 녀석들의 움직임이 너무 은밀해 찾기가 어려워 한동안 계속 내버려 두었던 것인데.

‘꼬리를 이런 곳에서 밟게 되었다 이거지?’

게다가 다우드 형제단은 그도 알지 못하던 혈루석의 사용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흡혈귀들을 이용해 그들의 종족 스킬로 이 속에 담긴 에너지를 드레인 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발상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모르나, 그만큼 혈루석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야만 가능했다. 저들은 이 혈루석과 혈정에 숨겨진 어떤 비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계의 신과 관련된 비밀…… 혈루석과 혈정은 타계의 신이 흘린 신혈이 응고된 혈병(血餅, 응고된 피) 내지 혈청이야. 혈루석이 찌꺼기인 혈병, 혈정이 순수하게 인자가 담긴 혈청이겠지.’

문제는 그런 것이 어떻게 ‘광맥’의 형태로 이리 많이 남아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 관리국은 대체 이곳을 어찌 찾아낸 것이고.

타계의 신은 탑에 예속되지 못한 ‘바깥’의 존재들이다. 반면에 이곳은 미개척지이기는 하나, 탑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곳. 타계의 신의 흔적이 절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조차도 탑 내에 간섭할 때에 의념을 투영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주 오랜 과거에 이쪽의 신이나 악마들과 전쟁이라도 있었나? 그것도 아니면…….’

순간, 연우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여전히 크게 요동치고 있는 갱도를 보았다.

수십 명의 인파가 지나가고도 남을 만큼 넓은 갱도는 자세히 보면 온통 선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모양도 대개 둥글고 모난 곳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거세게 흐르고 지나가던 통로처럼.

‘……설마.’

연우는 얼핏 떠오른 가정이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나머지 고개를 털었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타계의 신이란 것들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상상하는 것보다 더 먼 존재일 테니까.’

그래서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찾으러 왔다는 칠흑왕에 대한 정체 추측이 더 힘들어지게 되니.

여하튼.

연우는 그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고개를 털면서 하늘 날개를 수거했다.

이로써 케미칼에 메리까지, 이쪽에서 원하던 이들은 전부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명령, 완수했어. 주인.」

「놈을 그림자 속에 포박하였습니다.」

샤논과 한령이 동시에 각각 임무를 완수했다는 전언을 보내왔다.

온과 길피도 똑같이 납치했다는 뜻. 이제 이대로 관리자들이 찾을 수 없는 공간으로 숨어 라나를 소환해서 흡혈군주를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 순간.

흠칫!

연우는 허리를 쭈뼛 세웠다.

‘벌써?’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오는 데 그래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와아아앙!”

콰아앙!

타넥이 지반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했다. 녀석이 흘리는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게 불어닥치는지 아래로 우르르 쏟아지던 낙석 따위가 지면에 닿기 전에 가루가 되어 부스스 흩어질 정도였다.

그 뒤로 역시나 살벌한 기세를 흘려 대는 이들이 나타났다.

특경단. 중앙 관리국이 자랑한다는 최정예들이 나타난 것이다. 관리자가 되기 전에는 하나같이 탑에서 한 끗발을 날렸던 전투형 하이 랭커 출신들.

“무왕과 똑같은 짓을 저지른단 말이지? 그것도 내가 있는 곳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리도 내가 우습게 보였던 것이냐? 감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아가레스가 내뿜던 기세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힘.

연우는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하늘 날개를 재차 펼쳐서 견디고 있다지만, 아직 격이 모자란 그는 타넥과 일대일로 붙을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최고 관리자쯤 되는 이들과 부딪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운이 좋아 어떻게 꺾는다고 해도, 탑을 떠날 것이 아니라면 계속되는 시스템의 제재와 관리국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

그래도.

‘일단은 뒤로 빠져야겠지.’

다행이라면 관리자는 각자가 맡은 구역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연우는 우선 영역을 벗어날 생각으로 날개를 펼쳐 크게 홰를 쳤다.

그 순간, 타넥에게서 발출된 마기가 채찍처럼 뻗쳐 나오면서 그가 있던 자리를 휘갈기고 지나갔다.

쿠쿠쿠!

엄청난 깊이의 고랑이 여기저기에 길게 남았다. 붕괴 속도도 현저히 빨라지면서 격진이 더 심해졌다. 그 위로, 타넥이 뿔을 단단히 앞세우면서 육탄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아니,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세에 짓눌려 그대로 피떡이 될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연우는 그 앞에서 초라해도 너무 초라해 보였다. 하늘 날개로 권능을 크게 개화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싶은 큰 위기 앞에서.

“스승님, 여깁니다!”

연우는 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타넥의 뒤쪽을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고.

“뭣이?”

타넥은 이쪽으로 달려오다 말고, 갑자기 무왕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가 살면서 유일하게 패배를 겪게 만들었던 존재가 바로 무왕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태 연우가 암굴에 들어온 것에 모종의 음모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왕과 관련된 음모가.

그러니 당연히 즉각 반응할 수 밖에.

“…….”

하지만 당연히 무왕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저 쏟아지는 돌덩이와 싸늘한 바람만이 전부일 뿐.

타넥은 그제야 연우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인상을 더 팍 찡그리며 돌아봤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연우를 따라 검환들이 생성되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마치 반딧불이 점멸하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타넥을 비롯한 특경단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단 한 발로 중산을 무너뜨리고, 스테이지를 붕괴시켰던 게 불과 반나절 전이었다. 저런 미친 걸 한두 개도 아니고 백여 개나 꺼낸다고? 그것도 이렇게 좁은 동굴에다가?

등골이 저절로 오싹해졌다.

그리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영왕은 제 스승보다 더 막 나가는 놈이었다!

“이런 미……!”

타넥이 연우의 노림수를 읽고 비명을 질렀지만.

“터져라.”

위이잉. 매섭게 회전하던 백여 개의 검환이 일제히 빛을 터뜨렸다. 빛무리에 가려지기 직전, 타넥은 연우가 사악하게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인성이란 것이, 폭! 발! 한! 다!」

샤논의 즐거운 외침과 함께.

콰르르릉-

팽창하는 열이 단숨에 야네크의 암굴을 가득 채우면서 퍼져 나갔다. 비명이나 경악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꾸어어어어!

그리고 텔레포트로 폭발하는 암굴을 떠나기 직전.

연우는 암굴을 이루는 ‘무언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뱉는 듯한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