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69화 (469/862)

19화. 흡혈군주 (1)

[망자의 벽]

쿠쿠쿠…….

“끝났나?”

미개척지 한가운데에서. 연우는 그림자를 몇 겹이나 포갔을 뿐만 아니라, 망령을 이용해 벽까지 형성하며 지진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격진이 끝났다 싶을 때, 망자의 벽을 거두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은 온통 낙석으로 뒤덮여 앞뒤를 분간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마다 연우가 움직일 공간은 남아 있었다.

화아악!

연우는 그림자의 영역을 넓히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말끔히 치웠다. 그림자 위로 검은 불꽃이 피어나면서 암석들이 전부 부서지거나 잘게 태워졌다.

그럴수록 연우는 더더욱 자신의 예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역시.

이곳은 평범한 ‘굴’이 아니었다.

스테이지를 붕괴시켰던 유성검결을 한곳에다 집약시켜 터뜨렸다. 평범한 굴이었다면 당연히 붕괴되다 못해 아예 통째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연우도 완전히 붕괴하고 나면 이곳을 탈출하거나, 여차하면 다시 텔레포트를 사용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갱도는 망가졌을지언정, 외곽의 광산은 ‘형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평범한 광산이 아니다. 그저 그런 히든 스테이지 따위가 아냐.’

연우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잔뜩 망가진 천장 너머 붉은 빛깔로 빛나는 외벽이 보였다.

‘사체. 그것도 타계의 신이 죽어서 남긴 사체가 분명해.’

신의 사체(死體)!

분명히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절대 아니었다.

[다수의 신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이것이 말이 되냐며 경악합니다.]

연우는 자신에게 연결된 채널링을 통해 신이며 악마들이 경악해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웬만해서는 꿈쩍도 않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동요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크다는 뜻이었다.

만약 연우의 예상대로 이곳이 타계의 신이 죽어 남은 사체가 맞는다면, 자신들이 있는 곳도 어디쯤 되는 부위인지 쉽게 유추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혈병과 혈청이 그렇게 덕지덕지 남은 걸로 봐서는…… 혈관쯤 되겠지.’

백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수십 년에 걸쳐서 개척했던 미개척지가 사실은 신의 사체,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최소로 잡아도 웬만한 행성 규모…… 아니, 어쩌면 항성 몇 개를 합칠 만큼일지도 모르겠지.’

[신의 사회, ‘데바’가 중앙 관리국이 가진 비밀에 대해 논의를 나눕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격하게 항의할 준비를 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을 조용히 관찰합니다.]

……

[악마의 사회, ‘절교’가 타계의 신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강한 탐욕을 느낍니다.]

……

[관리국이 천계에서 쏟아지는 여러 항의에 대해 침묵합니다.]

타르타로스에서 크로노스의 사체를 처음 봤을 때에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며 욕지거리가 나왔었는데.

이건 아예 그쯤은 아기 재롱처럼 아주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신과 악마. 그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선 대신격이나 마왕 급으로 분류되는 작자들이라면 존재감이 우주와 차원을 넘나들기도 했다.

우주적 존재. 그런 형용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중에서 이만 큼이나 무시무시한 형체와 크기를 자랑하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태초신이나 개념신들과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그들은 자아를 갖는 경우가 드물어 일정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곧 법칙이고, 순리가 곧 그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교할 거리가 아니란 뜻이었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다른 타계의 신들도 이 정도인가? 그렇다면 이 사체는 원래 그들 중에서 어느 정도이지? 우두머리? 아니면 졸개?’

이만한 크기를 가졌던 녀석이 우두머리 급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각 사회의 수장들이 나서면 괜찮을 테니.

하지만 하급이라면? 그래서 최상급쯤 되는 것들이 성단이나 성운 급의 크기를 자랑한다면? 그때는 초월자의 사회가 통째로 나서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연우는 어쩌면 자신이 만났던 기어 다니는 혼돈이, 타계에서도 사소한 일부, 그것도 아주 극히 사소한 일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아직 탑 내에 있는 신과 악마들도 넘지 못한 판국에,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더 클지 모르는 존재들이라니.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놈들이 찾는 칠흑왕은 대체……?’

[대다수의 신들이 침묵합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침음을 삼킵니다.]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복수를 완료하고, 동생의 영혼을 찾고서, 언젠가 탑을 부수는 것. 그 외의 일은 그가 당장 신경 쓸 거리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타계의 신에게서 힘을 빌릴 생각도 하고 있으니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모른다.

‘타계의 신에 대한 신살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만한 존재가 죽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건, ‘죽음’은 녀석들도 피할 수 없는 개념이란 뜻이었다.

더구나 그는 현재 혈정을 잔뜩 흡수하면서 사체가 생전에 가졌던 인자와 신성을 조금씩 획득하고 있는 상태.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의문은 잠시 뒤로 미루고, 지금은 흡혈군주를 찾을 때였다.

스르륵-

그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의 늪으로부터 납치된 네 사람이 토해졌다.

케미칼, 메리, 온, 길피. 그들은 모두 혼절해 있다가, 바깥바람을 쐬고 나자 정신이 드는지 저마다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다 길피가 가장 먼저 눈을 번뜩 떴다.

“이, 이곳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갱도 깊숙한 곳. 빛이라곤 연우가 띄운 광구(光球)가 전부인 곳에서 길피는 뒤늦게 연우를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나를 어찌할 속셈이시오? 왜 날 이곳에다 데려온 거요! 그 소란은 또 대체 무엇이고!”

길피는 단숨에 연우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서 혈루석을 잔뜩 캐내어 언젠가 고향 행성으로 되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뜻하지 않게 전혀 원하지 않은 사태에 휩쓸리고 말았으니.

“…….”

“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 읍읍!”

연우가 아무 말도 않고 고요히 바라보고 있자, 결국 길피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를 포박하고 있던 그림자가 다시 올라와 입술에다 재갈을 물렸다.

그사이 다른 세 사람도 천천히 눈을 떴다.

케미칼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떠는 중이었고, 메리는 여전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타넥의 호위병, 온은 아무 저항 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처음 보게 된 민낯은 의외로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아름다웠다. 날렵한 콧대하며 눈매까지. 마치 옥을 직접 빚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전사에 있어 미추(美醜)의 여부가 무엇이 중요하겠냐마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을 흡혈군주가, 저렇게 눈에 띄는 외양을 하지는 않을 것 같고.’

케미칼, 메리, 온. 셋 전부 다 이렇게 보니 흡혈군주라고 하기엔 어려운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길피였지만, 그녀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다.

혹시 후보군을 잘못 선택한 걸까? 연우는 언뜻 불안감이 들었다. 자칫 저 엉망이 된 갱도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렇게 안 되길 빌면서. 연우는 목에 착용하고 있던 펜던트를 손으로 매만졌다.

동생의 두 번째 스승, 라나가 떠나기 전에 고맙다며 그에게 주었던 케토의 신물, 해수 부적이었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라나.”

칠흑의 권능에 따라 검은 기류가 한데 뭉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라나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곳은……?」

“오랜만입니다, 라나.”

연우는 간만에 만난 라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면서 슬쩍 네 사람을 살폈다. 오래전에 헤어진 딸이 죽어 나타났으니 어미라면 당연히 어떤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고 연우를 노려보기만 할 뿐. 이들에게선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이 중에는 없는 건가.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시 라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양해를 구하고, 저들이 들을 수 없게 어기전성을 이용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동생의 영혼을 찾기 위해 알아낸 사실을 전부 공유했다.

「그러니 쉽게 말해, 네 말은 정우의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칠흑으로 가야 하는 길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 어머니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못난 딸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로군. 이런 식의 모녀 상봉은 생각도 않았었는데 말이야.」

라나는 쓴웃음을 짓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은 영혼의 모습으로 친모를 만난다는 것.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 먼저 죽은 자식을 보는 것만큼 부모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는 일도 없을 테니.

하지만 연우가 가진 사정도 잘 이해하고 있기에. 라나는 주저 없이 움직여 어느 인물 앞에 섰다.

사실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는 아주 익숙한 향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헤어져야만 했던, 그래서 더 그리웠던 향.

「어머니.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못난 딸을 용서하세요.」

라나가 선 곳은 바로 온의 앞이었다.

순간, 온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싶더니, 이내 그녀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하나로도 모자라, 권속들이며 이제는 딸까지…… 이런 비루한 꼴이 되고 말다니.”

온은 가녀린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 가죽이 통째로 뜯기면서 전혀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휘이이-

크고 늘씬하던 외양도 어느새 140센티미터대의 작은 체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날카로웠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짓누르는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기세도 대단해 연우의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녀가 바로 흡혈군주.

한때, 탑의 밤과 달을 지배하던 자.

퍼걱!

흡혈군주는 힘을 주어 여태 그녀를 ‘온’으로 만들어 주었던 하얀 가면을 부쉈다. 한번 들킨 가면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법. 굳이 둘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작은 손을 뻗어 가만히 라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영체의 미끌미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찌 달께서는…… 이리도 무정하시단 말이냐.”

「어머니.」

“하긴. 원래 그런 분이셨지. 예나 지금이나.”

탄식을 길게 내뱉으면서. 흡혈군주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해후한 딸아이와 나누고 싶은 말들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그들 모녀를 이리 갖고 놀려는 연우의 꿍꿍이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딴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면서까지 나를 찾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더냐?”

고오오-

연우는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면서 흡혈군주의 기세가 자신과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느꼈다.

그의 기운이 죽음을 의미해 깊고 때론 뜨겁게 타오른다면, 그녀의 기파는 밤을 의미해 그윽하면서도 아주 서늘했다.

도저히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밤.

심연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여태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흡혈군주의 진면목은. 용신안과 화안금정으로 아무리 살펴도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어도 너무 깊었다.

마치 차가운 칼날이 목덜미에 닿는 듯했다. 피부가 많이 따끔거렸다. 등골이 서늘했다.

위험하다는 본능의 경고였다.

‘아무리 못해도 상위 ‘왕’급…… 어쩌면 스승님에 비견할지도.’

진짜 ‘괴물’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었다.

탑 안에 무왕과 견줄 만한 존재가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칠흑의 권능을 끌어 올려 흡혈군주의 기세를 물리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단, 말 한마디 한마디 아주 똑바로 잘 해야만 할 것이다. 정우, 그 아이가 오래전에 내게 주었던 인상이 아주 좋았기에 이딴 오만방자한 행동을 벌였어도, 겨우 이뤄 뒀던 거사를 망가뜨렸어도 내버려 둔 것뿐. 한데도, 만약 별 게 아니라면.”

흡혈군주는 근처 바위에 앉아 짧은 다리를 오만하게 꼬면서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입술 사이로, 여태껏 바토리의 식령검에서나 보던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네놈의 목을 물어뜯어 타넥 앞에 개밥으로 던져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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