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70화 (470/862)

20화. 흡혈군주 (2)

‘서늘하군.’

연우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마 저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동생이 흡혈군주를 만난 건 그녀가 잠깐 벌인 유희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자신이 그녀의 계획을 망가뜨린 것이었으니까.

최고 관리자인 타넥의 옆에서 잠복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에게 기회가 절실했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그녀의 말마따나.

‘말을 잘해야겠지.’

그렇지 않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무왕과 동급일지도 모르는 괴물을 적으로 돌리는 건 미친 짓. 하물며 관리국도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지금은.

“심처로 가는 길이 필요합니다.”

“왜?”

“묘의 라플라스가 그곳에 있습니다.”

순간, 흡혈군주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튜토리얼의 입장권을 필요로 하는군. 아카샤의 뱀을 찾으려는 건가?”

아카샤의 뱀에 대해 아직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알아차릴 줄이야.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세간에 흡혈군주가 죽었다고 알려진 장소가 바로 튜토리얼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 역시 그곳에 숨겨진 갖가지 히든 피스에 대해서도 통달했을 게 분명했다. 아카샤의 뱀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겠지.

“아카샤의 뱀. 기약도 없이, 제 주인이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연거푸 허물만을 벗어젖히는, 그런 비루한 개지. 한데, 그 주인에 대한 게 너와 관련이 있나 보지?”

흡혈군주의 입술 끝이 더 크게 비틀렸다.

“그렇다면.”

말허리를 끊는 동안, 연우는 입술 사이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톱니 이빨이 너무 흉포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칠흑의 후계가 바로 너였나?”

“……!”

그 말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워야 했다.

-키키킥! 조금 더 분발해야 할 거야. 너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이제 거의 끝이 보여 가니.

-너에게만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

올포원과 부딪쳤을 당시.

마성은 인격을 분리시키면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보고 혀를 찼다. 아직 부족하노라고. 더 분발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말이 의아하긴 했어도, 당시엔 깊이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마성이 하는 말들은 대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흡혈군주가 저 말을 한 순간, 연우는 불현듯 그 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기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너만이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던 말.

그리고 흡혈군주가 여기서 말했다. ‘이번’ 후계는 바로 너냐고.

“……칠흑왕이 누군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흡혈군주는 왼팔로 비딱하게 턱을 봤다. 너무나 오만한 모습과 함께 풍기는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위세를 더해 주었다.

“난, 아니, 짐(朕)은 달 아래에서 숨 쉬는 모든 이들을 보살피는 어미이며, 밤의 거룩한 뜻을 대변하고 집행하는 여왕이니라. 그리고 그런 달과 밤의 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느냐?”

“……칠흑.”

“당연하다. 칠흑과 공허가 있기에, 달밤이 온전히 세상을 비출 수 있는바. 그런 칠흑을 모르고 어찌 어둠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연우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흡혈군주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심장을 거세게 옥죄는 것 같았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여태껏 자신이 다뤄 왔다고 생각했던 어둠이 밀려나고, 더 짙고 그윽한 어둠이 다가와 숨통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밤이구나.

또한.

‘어둠이구나.’

연우는 처음으로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안 것 같았다.

『간만에 본, 맛난 먹잇감이로군. 아주 잘 영글었어.』

아스라이 마성의 혼잣말이 들렸다. 녀석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 언뜻 비치는 듯했다.

연우는 어둠의 속박을 억지로 밀어내면서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주 잠깐 의문이 생겼다.

“당신은 칠흑의 후계입니까?”

“그러기를 바랐으나, 끝내 되지 못했던 낙오자. 뭐, 간단히 그렇게만 말해 두지.”

“그럼 칠흑왕이란 것은…….”

“거기까지.”

순간, 흡혈군주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으나 곧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오만한 낯빛으로 돌아왔다.

“지금 질문을 던지는 것은 네가 아닌 짐이다. 너는 아직 짐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너는 ‘이번’ 칠흑의 후계인가? 그래서 아카샤의 뱀을 찾아 칠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가? 그렇게 묻는 것이다.

어차피 숨길 것도 아닌 일.

차라리 연우는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혈군주는 칠흑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를 이쪽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 하면.”

흡혈군주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짐이 그대를 도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짐이 한때 칠흑의 영광을 좇아 밤을 거니는 것들의 여왕을 자처했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칠흑의 추종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대를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지. 그런데도 짐의 계획을 이대로 접으면서까지 그대를 도와, 짐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무엇을 제안할 수 있지?”

연우는 흡혈군주가 자신을 칭하는 호칭이 ‘너’가 아닌 ‘그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를 칠흑의 후계로 인정하여 최소한 협상 테이블에 앉아 말은 들어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다행히 연우는 흡혈군주가 바라는 비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그렇기에 그녀를 찾을 생각을 한 것이었으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고.

“무엇을 돕겠다는 것이냐?”

흡혈군주는 아주 잠깐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다 이어지는 말에 처음으로 동요하고 말았다.

“페렌츠 백작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연우는 순간 자신의 몸뚱이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어떻게 저항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목이 흡혈군주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흡혈군주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면 찢어 죽이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순간, 위험성을 깨달은 그림자가 움직이려 했지만.

쿵!

갑자기 흡혈군주를 따라 새어 나온 검은 기운이 각각 다이어울프와 자이언트 뱃이 되어 그림자 위에 말뚝처럼 박혔다.

크르르릉. 그녀의 권속들은 여차 하면 그림자를 찢어발기겠다는 듯 흉포한 살의를 숨기지 않았다.

모그림과 루스트. 흡혈군주가 생전에 자신의 양팔로서 사용했다는 분신이며 권속들. 환수 출신인 마수(魔獸)로, 개개인이 가진 힘이 웬만한 하이 랭커들도 가볍게 씹어 먹을 정도라 알려져 있었다. 메리가 다루던 것과는 애초에 격부터가 달랐다.

현신하려던 샤논과 한령은 두 마수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고 전투 대기에 들어갔다. 여차하면 현신해서 칼을 뽑기 위해.

“어찌 감히 아랫것들이 웃전들이 있는 데서 함부로 날뛰느냐?”

모그림과 루스트도 똑같이 하울링을 흘렸다. 마치 자신들이 모시는 왕의 행사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듯.

그때.

츠츠츠-

연우의 뒤쪽으로 두 개의 실선이 그어지면서 분노로 잔뜩 얼룩진 부의 두 눈이 나타났다.

「죽. 고. 싶은가. 바토. 리.」

“파우스트, 그대로군. 결국 뜻하던 것을 이루었나 보지?”

뜻하던 것. 마계왕 메피스토펠레스를 좇아 끝내 칠흑의 권속으로 떨어진 부의 옛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흡혈군주와 부의 전생 간에는 아주 오랜 과거에 작은 인연이 있었다.

칠흑의 추종자였던 파우스트와 칠흑의 후계가 되길 바라던 흡혈군주. 추구하는 길이 비슷하면서도 달라 끝내 갈라지고 말았으나, 그래도 둘 사이가 나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백 년이 흘러, 부는 아직 모든 힘을 찾지 못해 흡혈군주에 미치지 못했지만, 분노만큼은 진짜였다.

“파우스트. 칠흑을 좇고자 하였던 너의 그 광기와 집착, 그것에 대한 짐의 호감이 강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방해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재롱을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감. 히.」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더 크게 타오르려는데.

갑자기 연우가 괜찮다며 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부는 아주 잠깐 연우를 보았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젓자 뜻을 짐작하고 조용히 물러섰다. 길게 늘어났던 샤논과 한령의 그림자도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흡혈군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제법 수하들이 말을 잘 듣는구나. 충실한 개들을 길렀어.”

“사과하십시오.”

“뭣이?”

“나에 대한 경멸은 참고 넘길 수 있으나, 수하들에 대한 조롱은 허락지 못합니다.”

“하!”

흡혈군주는 자신에게 목이 붙들리고도 잘도 지껄여 대는 연우가 어이없었던지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연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당장 말을 취소하라는 무언의 압박. 그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풍겼다. 여차하면 곧바로 들이받을 태세였다.

흡혈군주는 그 모습을 보다 가볍게 혀를 차면서 멱살을 풀었다.

입만 산 놈은 아니라는 거군. 제 수하를 아끼는 모습이, 제법 그럴싸하게 군주로서의 재목을 갖춘 듯했다. 과연 이번 대에 선정된 칠흑의 후계라는 걸까.

아주 잠깐 질투심도 들었다. 끝내 그녀가 거머쥘 수 없었던 자리에 앉은 이에 대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 말에 그만큼 강한 무게를 실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좋다. 사과하지.”

흡혈군주는 연우의 그림자 쪽을 보면서 말했다. 순간, 연우 주변의 공간이 떨렸다. 부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가 아는 흡혈군주는 광오했던 이. 이렇게 쉽게 사과를 입에 올릴 작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이리도 각별히 아끼는 연우에 다시 크게 감복하고 말았다. 샤논과 한령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너는 사과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겠지?”

페렌츠 백작. 흡혈군주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편. 그녀가 군주가 되었다가 몰락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또한.

‘흡혈군주가 이곳에서 수십 년을 허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를 찾는 게, 그녀의 비원이니.’

라나도 연우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알려진 친부에 대한 이야기를 연우에게서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

그런 두 모녀를 보면서.

연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 * *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흡혈군주는 입을 꾹 다문 채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라나도 그런 어머니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녀가 그토록 찾고자 애썼으나, 결코 찾을 수 없었던 존재. 수십 수백 년을 공들인 뒤에야 그의 행적이 야네크의 암굴로 향했단 사실을 알았던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페렌츠 백작에 대한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 그이가 있다는 증거는?”

“아직도 페렌츠 백작이 거기에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금세 그 뒤를 쫓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가.”

흡혈군주는 흉흉한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거짓이라면.”

“죽겠죠. 당신에게.”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건방진 것.”

흡혈군주는 몸을 반대로 홱 돌렸다. 연우는 그 말이 자신의 제안에 응한다는 것임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도 잘 되었다는 듯이 연우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도 마주 보면서 감사하다며 목례를 하려는데.

그때.

“우리도! 우리도 데려가 주오, 군주!”

여태껏 그림자에 속박되어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흡혈군주가 짜증이 단단히 난 얼굴로 그쪽을 홱 돌아보았다.

“뭐냐, 넌?”

“군주……! 제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까? 소싯적 당신의 옆에서 왼쪽 손가락을 자처하던 저를!”

“네깟 것이 무엇인데?”

흡혈군주는 메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스트리고이, 혈공가(血公家)의 계집이었군.”

“그, 그렇습니다!”

순간, 메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혈공. 그녀가 속한 가문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비록 흡혈귀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녀는 언제고 다시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다우드 형제단으로 들어간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흡혈군주는 그동안 ‘온’으로서 살며 타넥의 옆을 지켰지만, 다우드 형제단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더군다나 망자 가면을 쓰고 나면 인격이 통째로 바뀌는바. 그동안에는 흡혈군주로서의 인격이나 권능도 모두 잠들어 있었다.

“혈공가의 귀중한 영애가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있는 것이지?”

“가문을 부…… 아니, 그런 것이 어디 군주께 중요하겠나이까. 다만, 청원컨대, 지난날에 저희 가문과 일족에 내려 주셨던 은혜를, 다시 한 번만 더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처로 가는 길에 데려가 달라? 왜?”

“그것은.”

메리는 여기서 흡혈군주가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판가름 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미 저들의 대화를 전부 들어 버린 이상, 연우가 자신들을 살려 둘 것 같지 않았다. 살인 멸구. 입을 막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흡혈군주의 아량을 사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살 수 있을뿐더러, 혈정도 찾을 수 있었다. 저들이 이제 가려고 하는 곳이 심처였으니까. 그러다 흡혈군주가 부흥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같이 재기를 노려 볼 수도 있었다.

“나도! 나도 부탁합니다. 원하는 것은 전부 내어 드리겠으니 제발 거둬 주십시오.”

길피도 재빨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케미칼도 눈치껏 재빨리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흡혈군주는 세 사람을 보면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간만에 거동을 하려니 시중들 놈들이 필요하던 차이긴 했는데.”

세 사람의 안색이 확 하고 밝아졌다.

“저희 혈공가를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군주께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엘프는 갖은 심부름꾼에 있어 특화되어 있습니다. 금속, 목재…… 맡겨만 주십시오.”

“힘에 자신 있습니다. 언제든지 부려만 주십시오.”

순간, 흡혈군주가 사악하게 웃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미처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좋다. 받아들여 주지. 원하는 건 전부 내어놓겠다고 했겠다?”

“그렇습니……!”

“그렇다면 죽어라.”

“예?”

촤아악-

“무, 무슨…… 컥!”

“크헉!”

세 사람이 어떻게 반항하기도 전에.

흡혈군주는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면서 그대로 내그었다. 핏물이 세차게 튀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머리통 세 개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 사이로 피어오른 짙은 어둠이 흉악한 톱니 이빨을 드러내더니 그대로 머리통을 와그작 씹어 먹었다.

〈바토리의 흡령마(吸靈魔)〉. 튜토리얼에 던져두었던 흡혈검이 몇 층 더 진화한 유니크 스킬은 머리통뿐만 아니라 남아 있던 사체도 전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넋이 나간 세 개의 망령이 도깨비불이 되어 모그림과 루스트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죽인 뒤에 영혼과 육체를 통째로 권속으로 삼는다는 흡혈군주의 주특기가 나타난 것이다.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확실한 건 없지 않겠나? 깔깔깔!”

흡혈군주는 피로 젖은 손을 혀로 핥으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간만에 피 맛을 보고 나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어째 주군보다 더한 인성 파탄자가 나타난 것 같은데.」

샤논은 그런 흡혈군주를 보며 찝찝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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