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흡혈군주 (3)
“이곳이 바로 네가 찾던 심처다.”
“넓군요.”
연우가 흡혈군주를 따라 미개척지를 한참 동안 통과해 도착한 곳은 별세계(別世界)였다.
‘여긴 타계 신의 사체 속이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는 거지?’
블링크와 텔레포트를 수십 번씩 전개하면서 시작된 이동은 여태 연우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지구로 치면 이미 반 바퀴 정도는 돌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멀었던 거리. 그만큼 갱도는 아주 깊었다.
더구나 비슷하고 똑같은 광경만 계속 반복되다 보니 언제부턴가 미로 속에 갇혀 같은 곳을 뱅글 뱅글 도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나마 계속 설정되는 좌표가 변하는 것으로 이동 중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흡혈군주가 복잡한 갱도 속에서도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움직여서 안심되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여태껏 그가 보았던 갱도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탁 트인 세계.
너무 트여서 지평선이 어딘지 알기도 힘들었다.
비록 해와 달이 없다지만, 붉은 하늘도 있었고 빛도 비치고 있었다. 평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풀들이 자라 일부는 숲을 조성하기도 했다. 저 멀리, 언덕과 산맥도 보였다. 그 사이사이로 강도 흘렀다.
누가 봐도 스테이지를 옮겨 둔 것 같은 모습.
연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 모르겠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뭐 그런 얼굴이로군.”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탑과 다를 바 없는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어쩌면 자신의 예측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신의 사체라는 건 이미 안 것 같은 눈치고.”
“예.”
“그럼 이야기가 편하겠군. 이곳은 그 사체의 위장 안이다.”
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연우의 눈이 커졌다.
누가 봐도 지형지물이 조성되어 있는 스테이지인데? 소화 기관이라고?
거기다 이곳에는 저런 지형지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눈에 밟히던 게 있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이상한 수풀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형(異形)의 괴물들. 하나같이 과연 진화론적으로 탄생이 가능할까 싶은 기괴한 형체를 갖고 있었다. 발 없이 뛰어다니는 짐승, 속이 투명한 형태의 생명체,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 5미터 체고의 촉수 괴물들까지.
문제는 그것들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절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연우가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개체가 가득했다.
개중에 몇몇은 웬만한 신격과 견주어도 절대 부족하지 않을 듯했다. ‘우두머리’ 급으로 보이는 것들은 대신격과 비교해도 될 법했다.
연우는 순간 자신이 타르타로스에 온 것인가, 아니, 그보다 더한 지옥에 온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흡혈군주는 연우의 시선이 꽂힌 이형의 괴물들을 보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것들은 제 존재를 잃어버린 옛 망령들이다. 한때 위대한 존재였으나, 이 거대한 것에 잡아먹히고 남은, 미처 소화가 다 되지 못하고 위벽에 남은 찌꺼기들이지.”
“……!”
“물론, 그렇다고 해도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 격의 일부는 남아 있어 저딴 식으로나마 있는 거지만.”
하지만 자아도 없이 본능만 남은 버러지들이지. 흡혈군주는 한때 여러 우주와 차원을 거닐었으나, 지금은 자아도 갖추지 못한 괴물들을 보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이 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케르눈노스가 침묵합니다.]
[아가레스가 인상을 찡그립니다.]
……
[다수의 신들이 경악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혀를 찹니다.]
[소수의 신들이 중앙 관리국이 숨기고 있던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최고 관리자와의 접선을 시도합니다.]
연우를 통해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계의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불신과 경악. 그리고 이것을 여태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숨기고 있던 관리국에 대한 의심까지.
‘이들의 눈에는 멸망한 사회의 결과가 저렇게 보일 테니까.’
천계가 전쟁을 그친 지 천 년이 넘어간다지만, 신과 악마 간의 대립은 한쪽 진영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거기에 대한 예언도 숱하게 많지 않던가. 아마겟돈. 라그나로크. 여러 이름 따위로 불리는 최후의 전쟁. 그 결과의 한 단면을 벌써부터 보는 것 같아 불쾌하면서도 선뜻 두려울 것이다.
“그리고 저기에 있는 것들은.”
흡혈군주는 이형의 괴물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또 다른 괴물들을 가리켰다. 다른 것들보다 체구는 훨씬 작아 얼핏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들이었다.
“탈각을 이루려다 실패한 것들이다. 관리자도 초월자도 되지 못한 반편이지.”
연우는 침음을 삼켰다. 이제 흡혈군주가 하려는 말을 언뜻 알 것 같았다.
야네크의 암굴에 수용된 죄수들 중 관리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이 전부 관리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정한 시험을 필요로 하겠지.
문제는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관리자 개개인은 천계의 웬만한 신격들과도 자웅을 견줄 수 있는바. 당연히 ‘탈각’은 기본 소양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탈각은 올포원 때문에 시스템에 눌려 있다는 게 문제지. 초월까지는…… 바라지도 못할 테고.’
관리자 등용 시스템을 이용해 어찌어찌 관리자로 각성한 경우라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전부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을 모아 둔 쓰레기장이 바로 이곳, 심처.
“하지만 저것들도 무시해서는 안 될 거야. 이 위벽의 환경에 노출되면서 별 이상하게 된 신의 인자란 인자는 닥치는 대로 먹고 자랐을 테니.”
혈루석과 혈정에도 그만큼 신의 인자가 담겨 있었는데, 아예 자체적인 생태계가 조성된 여기는 곳곳에 노출된 게 신의 인자겠지.
연우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곳에 도착했는지를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대체 타계의 신, 이것들의 정체는 뭐지……?’
[지식과 탐구를 좇는 신들이 타계의 신에 대해 논의를 시작합니다.]
[힘을 갈구하는 악마들이 타계의 신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가집니다.]
“여하튼 저것들과는 절대 접촉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괜히 엮여서는 귀찮기만 할 테니.”
“알겠습니다.”
흡혈군주나 되는 이가 ‘귀찮다’고 할 정도면 정말 골치가 많이 아프다는 거겠지. 괜히 이쪽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 힘들어지게 된다.
연우로서도 저들의 관심을 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기에 최대한 기척을 죽일 생각이었다. 마력을 체내로 갈무리하고, 바람길을 사용해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그럼 찾도록 하지.”
흡혈군주는 손바닥을 활짝 펼치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진언. 다만, 연우의 귀에는 ‘발동’이라는 단어로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화아악!
그녀의 손바닥을 따라 역십자가 형태를 띤 문장(紋章)이 검은빛을 내면서 올라왔다. 역십자가 문장의 주변에는 반구 형태의 보호막이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순간, 연우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저거로군. 흡혈군주를 상징하는 모순(矛盾, 창과 방패) 중 ‘순’에 해당하는 망녀순(亡女盾)이.’
흡혈군주는 모그림과 루스트라는 권속을 다루어 적아를 공포로 물들였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본신에는 두 개의 창칼이 있어 대단한 무위를 자랑했다고도 알려져 있었다.
그중 ‘모’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영육을 삼켜서 권속으로 부린다는 흡혈검이었고.
‘순’에 해당하는 것이 영육을 찾아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망녀순이었다.
그리고 망녀순은 흡혈군주가 각성을 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유니크 스킬로 변모했으니.
〈바토리의 마녀방(魔女防)〉
촤르르-
순간, 역십자가 문장이 나침반 바늘처럼 돌기 시작하더니 동북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멈췄다. 그리고.
팟!
문장이 그대로 잘게 부서지면서 아주 긴 궤적을 남겼다. 마치 이곳으로 따라오라는 듯이.
“라플라스와는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 아주 오래전, 짐 역시 튜토리얼로 넘어갈 일이 있었으니.”
바토리의 마녀방은 점찍은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려준다. 그 존재가 크면 클수록 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반대로 외부로부터 존재감을 지울 수도 있기 때문에 그동안 흡혈군주는 적들의 추적을 따돌리며 자취를 감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페렌츠 백작은 이것으로도 찾지 못했었지. 알아낸 건, 그가 암굴로 왔다는 게 전부.’
만능은 아니란 뜻이었다. 상대가 다른 수를 써서 존재를 숨기려 들면 답이 없었으니. 사실 마녀방은 ‘방패’라는 이름처럼 추적보다 방어에 특화된 스킬이었다.
“그럼 다시 가도록 하지.”
둘은 마녀방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다시 움직였다.
여태 움직였던 것보다 훨씬 은밀하고 조용했다.
* * *
현실 시간으로 얼마나 지났을까. 연우는 대략 닷새에서 엿새 정도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도 밤도 없는 세계에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동만 계속했다. 그 와중에 간간이 그들의 종적을 눈치챈 이형 괴물들의 추적을 따돌리느라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흡혈군주는 신신당부했다.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네가 해볼 만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녀석도 어떤 힘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리고 이들은 사바나 세계와 똑같아, 한 놈이 물리면 도미노처럼 다른 놈들의 관심을 끄는 식이라 절대 호기심을 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간간이 거대 괴물들의 영역을 몰래 지나칠 때마다, 연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한 영역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것들. 다른 존재와 섞이길 꺼려하는 고고한 것들은 감히 그가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의 시선을 빌려 상황을 지켜보던 신과 악마들도 이제는 경악을 넘어 침묵하고 잇는 중이었다.
‘그만큼 두렵단 뜻이겠지.’
세력전에서 밀려 죽은 일개 타계의 신 속에서 이런 것들이 우글대며 자랄진대, 다른 타계의 신들은 어떻겠는가.
아마 하위 급들은 비빌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창조신이나 최고신, 개념신 급은 되어야 겨우 상대나 될 수 있을까.
이곳 위장에 만들어진 세계는 웬만한 스테이지를 훨씬 압도하는 규모를 자랑했다.
스테이지들의 규모가 작은 행성이나 대륙 정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와. 씨. 이거 욕밖에 안 나오는데.」
「역시…… 세상은 넓군요. 저는 탑이야말로 모든 우주와 차원의 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샤논과 한령도 이제는 놀라기만 하는 가운데.
“여기까지군.”
두 사람은 어느새 어느 높은 산자락의 끄트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마녀방이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아래 마녀방의 끝이 닿은 곳이 있었다.
절벽 아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기분 좋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가슴이 탁 트인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산성의 바다. 마치 지옥의 유황불을 끌어 올린 것처럼 탁한 회색으로 빛나는 바다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위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는 매캐한 독을 잔뜩 품고 있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정도였다.
「저거 전부 다 위액 맞지? 미쳤다, 진짜. 이거 진짜 죽은 거 맞아?」
연우는 멀어지려 하는 샤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겨우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위이잉-
주인의 이상 상태를 눈치챈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극심한 독성이 육체를 잠식합니다. 상태 이상, ‘중독’ 상태에 빠집니다.]
[상태 이상, ‘현기증’ 상태에 빠집니다.]
……
[주의! 현재 지형에서 물러나세요. 현재 능력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중독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독성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무채독’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12.6%]
[특성 ‘천독불침(千毒不侵)’을 획득했습니다.]
‘단순히 환경에 노출된 것만으로 스킬 숙련도가 오르고 특성까지 얻게 될 줄이야.’
연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망량독이나 무채독 따위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여길 독과 산성의 바다를 어떻게 건너라는 거지? 하지만 라플라스는 분명히 이 너머에 있었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간간이 ‘섬’들도 있었다. 죽은 이형 괴물들의 사체가 겹겹이 쌓여 이뤄진 섬. 지금 이 순간에도 위액으로 부패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라플라스도 저 중 어딘가에 있는 듯 보였다.
대체 관리국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라플라스를 이런 미친 곳에다 가둬 놨을까. 이렇게 해야만 절대 탈옥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 의도였다면 정답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더 끔찍한 사실은 초감각의 영역을 넓혀서 확인해 본 결과, 이 위액의 바다 아래에도 수많은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개중에는 크기가 좀처럼 짐작도 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어쩌면 지상에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한 괴물들일지도 몰랐다.
공략 불가.
연우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제아무리 흡혈군주라고 해도 통과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기서 잠시 물러서도록 하죠. 이 바다를 어떻게 건널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우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흡혈군주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후퇴는 이미 그른 것 같다만. 저쪽이 이미 우리가 여기에 온 걸 읽었어.”
“무슨……?”
연우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꾸우웅-
갑자기 세상을 요란하게 울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위액의 바다를 가르며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안개로 가려져 그림자만 졌지만, 도무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도 너무 컸다.
“저게…… 대체 뭡니까?”
연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떨렸다. 저 존재는 갖가지 초월적 괴물들이 넘쳐 나는 이곳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네시(Nessie).”
흡혈군주는 두려운 존재를 맞이하고도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이 마해(魔海)의 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