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77화 (477/862)

2화. 토끼와 거북이 (2)

쾅!

콰콰콰-

“더럽게 부서지질 않는군.”

미의 타넥은 금이 가기는커녕 시커먼 그을음만 남은 결계를 보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를 따라 폭격을 가하던 추격대의 관리자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모두 특경단의 요원이거나, 한때 타넥을 따라 여러 차원을 전전하던 투마(鬪魔)들이었지만. 이 결계는 도무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이 장소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무질서와 혼돈이 가득한 세계. 죽은 타계의 신이 남긴 사념들로 얼룩진 외차원. 관리자는 시스템을 수호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러니 그들에게 이곳은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앗아 가는 장소였다.

라플라스가 마해로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중앙 관리국이 더 이상의 추격을 중단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냥 싸우라고 한다면 모를까, 이런 결계까지 해제하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이, 이, 이거 어쩌면 조, 좋을까요?”

해의 루피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울먹거렸다.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엄마가 시킨 심부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여성 관리자들 몇몇이 안타까운 얼굴로 루피를 보았다. 모성애를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타넥은 기도 차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었다.

라플라스를 직접 저곳에다 처박은 주제에 저딴 모습이라니. 최고 관리자로서 같이 한 지 천 년이 넘어가지만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걸 지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라플라스의 섬을 뒤덮은 결계를 보면서 씹어 삼키듯이 투덜거렸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데, 놈이라고 오죽할까. 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더 골치가 아파진 것이지.”

이래서 애당초 라플라스 녀석이 처음에 중앙 관리국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말렸던 것인데.

그들과 근본도 목적도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을지 모르니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강하게 주장했었지만.

당시에 ‘미지로만 가득 찬 타계의 존재에 대해 연구할 필요도 있다’는 주장하에 결국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그러다 결국 라플라스 때문에 겨우 정립되어 있던 천계와의 균형도 흐트러질 뻔하지 않았던가.

일찌감치 눈치챈 루피가 나서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때 라플라스를 받아들이자고 했던 게 누구였었지?’

타넥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조금씩 더듬었다. 저절로 미간에 골이 패었다.

‘이블케…… 였던가?’

당시에 라플라스를 중앙 관리국에 소개했던 것도 이블케가 아니었었나? 생각이 더 깊어지려는데, 루피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의 생각을 도중에 막았다.

“타넥.”

타넥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미 자신들이 나타났다는 건 녀석들도 알게 되었을 테지. 그렇다면 뒷구멍으로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만 했다.

“블라드 체페슈. 질 드레.”

“예.”

“예.”

그의 부름에 추격대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희멀건 얼굴에 도마뱀처럼 세로 동공을 가져 기괴한 인상을 주는 미남자와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음침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이었다.

혈왕(血王). 한때, 흡혈군주 에르체페트 바토리와 함께 흡혈귀 종족의 왕좌를 두고 다투었으나, 결국 내쫓기고 살기 위해서 관리국으로 들어서야만 했던 인물들.

비록 흡혈군주가 몰락했을 때에는 관리자로서 개입을 할 수 없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지만,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이 만반의 준비를 하는 동안.

“딴 놈들은 비켜라. 괜히 다칠라.”

고오오-

타넥은 여태 억눌렀던 격을 한꺼번에 개방했다. 루피를 제외한 추격대 대원 전부가 블링크를 시도하며 한껏 자리에서 물러났다.

[격이 개방됩니다.]

[악마왕의 본체가 현신을 시도합니다.]

[주의! 시스템이 이변을 감지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경고! 인과율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인과율의 구속이 진행됩니다.]

이미 경고 메시지가 몇 차례나 도출되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는 투가 아니었다.

이미 필요한 인과율은 클루스가 전부 감당해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던바. 그렇다면 여기서 맘껏 날뛸 생각이었다.

과거 여러 차원과 세계를 침략하며 병탄을 거듭하였던 공포의 마왕이 내뻗은 기세를 따라, 어느덧 타넥의 형체가 사라지고 마해의 운무를 가르며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쿠쿠쿠!

산악처럼 단단하게 솟아오른 일곱 개의 뿔과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용의 날개와 양의 굽.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악마왕이 포효했다.

[‘악마왕 맥스웰’이 현신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관리자가 되면서 숨겨야 했던 진명이 훤히 드러나면서.

타넥, 아니, 맥스웰은 주먹을 높이 들어 그대로 결계를 내리쳤다.

쿠아아앙!

* * *

[서든 퀘스트 / 별주부전]

설명: 전(前) 최고 관리자 라플라스는 미개척지 ‘마해’에서 무한투를 여러 번 전전한 끝에 왕이 되었고, 이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부터 세상사에 무척이나 많은 호기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세상의 구성 이유는 무엇인지, 근간은 무엇인지, 너무 많은 것들이 알고 싶었지만, 멍청이들만 가득한 이 세계에서는 그 해답을 도저히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플라스는 ‘별주부’라고 이름을 밝힌 어느 존재를 만나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고, 별주부와 함께 ‘탑’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린아이나 다름없던 그의 눈에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또한, 장난기가 많은 그가 뛰어다니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안내했던 별주부를 따돌리고, 스스로 이름을 ‘라플라스’라고 지어 돌아다녔습니다. 관리자라는 직업은 그에게 아주 유용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의 호기심과 장난은 정도를 넘어섰고, 결국 여러 번의 경고가 누적된 끝에 관리자의 직위가 박탈되고 중앙 관리국으로부터 수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라플라스는 고향으로 되돌아와 중앙 관리국의 추격을 겨우 따돌릴 수 있었지만, 이미 세상의 단맛을 보고 만 호기심 많은 토끼에게 고향은 너무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꾀를 내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이 호기심 많은 토끼의 부탁에 따라, 심부름꾼이 되어 오래전에 결별하였던 별주부에게 가 서찰을 전달하십시오.

그리한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티켓의 사용 권한을 양도받게 될 것입니다.

현재 별주부는 삼신산(三神山)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제한 시간: -

제한 조건: -

보상:

1. 삼신산 방문 자격

2. ‘튜토리얼 티켓’ 사용 권한

연우는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창을 꼼꼼하게 살폈다.

‘일단 이것만 봐서는 함정으로 보이지 않아.’

다만, 찜찜한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제한 조건을 따로 두지 않았다는 것.’

이는 삼신산에 가는 심부름꾼이 굳이 연우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찰을 건네주기만 하면 저절로 티켓의 사용 권한을 양도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티켓과 서찰을 강탈해서 대신 권한을 받아 쓸 수도 있단 뜻이기도 했다.

튜토리얼은 랭커들의 눈에 별 차지 않는 장소일 테지만, 클랜들의 눈에는 노다지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이곳을 장악할 수만 있다면, 새로 공급될 인재를 독점할 수 있단 뜻이니. 항상 인력 충원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관리국에서도 공정한 순위 경쟁을 위해 튜토리얼 티켓에 대해 엄중하게 관리하는 편이었다.

이런 와중에 연우가 튜토리얼 티켓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게 되면 당연히 달려들 승냥이가 꽤 많을 터.

아무리 그가 영왕이라 불리며 탑을 장악하다시피 했다고 해도, 반격을 꾀하는 무리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관리국도 계속 따라붙을 테지.

그러니 괜히 티켓의 봉인부터 풀 생각 말고, 퀘스트부터 빨리 수행하라는 의미인 셈이었다. 그래야 저들의 추격으로부터 한시라도 바삐 탈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철저하게, 아주 교묘하게 숨겨진 한 수인 셈이었다.

속내가 시커메도 이렇게 시커멀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삼신산.’

이곳은 사실 연우도 알고 있는 장소였다.

‘야네크의 암굴과 같은 미개척지.’

아니, 원래는 타계 신의 사체였던 암굴과 마찬가지로, 삼신산도 사실 숨겨진 정체가 따로 있었다.

편법을 써서 다른 상위 층계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

랭커든 네이티브든 관계없이,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스테이지 랭킹이 더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업적과 보상을 철저하게 관리해, 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는 자기 수행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실력은 충분히 상위 층계를 노릴 법하다고 자부하지만 이상한 시련에 발이 묶여 있거나, 무작정 위로만 가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올포원에 가로막혀 탈각과 초월의 길을 찾지 못해, 어떻게든 78층 이상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편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하이 랭커 중 다수가 히든 퀘스트를 통해 이를 알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미개척지 중 상당수가 상위 층계로 이동할 수 있는 우회로였던 것이다. 탑의 구조가 절대 일방통행으로만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다만, 이런 곳은 진즉에 관리국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어 일반 플레이어들은 절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삼신산(三神山)은 98층, 천계로 향할 수 있는 우회로였다.

98층으로 향하는 우회로!

모든 플레이어들이 들으면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장소. 그리고 천계를 벗어나 어떻게든 하계로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신과 악마들도 탐을 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당연하지만 올포원도 가장 예의주시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중앙 관리국의 관할지라서 그렇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폐쇄를 하려고 들었을지도 몰랐다.

[비마질다라가 흥미로운 눈길로 당신의 히든 퀘스트를 바라봅니다.]

[케르눈노스가 고민에 잠깁니다.]

[아가레스가 반색합니다.]

[토르가 환호성을 내뱉습니다. 어서 삼신산으로 갈 것을 권고합니다.]

[나타 태자가 당신에게…….]

……

[대다수의 신들이 흥미를 가집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이미 그와 채널링으로 연결된 신과 악마들은 서로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는 중이었다.

‘마해만 해도 골치가 아팠는데, 이제는 삼신산? 그것도 중앙 관리국이며 이놈들까지 꼬리로 달고?’

첩첩산중.

연우는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흡혈군주도 그런 연우의 기색을 읽었는지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삼신산입니다.”

“미쳤군.”

그녀는 라플라스를 노려보았지만, 라플라스는 귀엽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토끼 귀를 달고 있던 스킨헤드 중년인이 오버랩되어 속이 느글거렸다.

“물론,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만.”

콰앙!

그때, 격진이 라플라스의 심상 세계를 뒤흔들었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세상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네시와 비교해도, 아니, 그와 훨씬 강한 존재가 이 뒤에 강림했다는 뜻이었다.

라플라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우리 악마왕 폐하께서 뿔이 단단히 나신 것 같습니다만. 거기다 돼지 꼬마도 온 것 같네요.”

“타넥으로도 모자라 루피까지 왔다고?”

흡혈군주와 연우의 낯이 동시에 굳어졌다. 최고 관리자 중 두 명이나 출전했다고? 거기다 그들이 데려왔을 병력까지 감안한다면, 그들만으로 막기란 요원했다.

“어쩌시렵니까?”

하지만 라플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삼신산이 위험하다고 해도, 이렇게 된 이상, 중앙 관리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짜증 나는 건 라플라스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네놈의 낯짝은 언젠가 짐의 손으로 뜯어 버릴 것이야.”

“원하시는 대로.”

흡혈군주도 연우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으르렁거리면서 버럭 소리 질렀다.

“문 열어!”

“그럼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역시나 라플라스의 능글맞은 낯짝은 여전했지만.

[서든 퀘스트(별주부전)을 승낙하였습니다.]

“잠시 뒤로 물러서시지요.”

라플라스의 말에 따라 연우와 흡혈군주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라플라스는 품을 뒤적여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큼 큰 황금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밀어 넣었다. 공허가 열리면서 황금 열쇠의 끝부분을 집어삼켰다.

끼릭, 철컥-

황금 열쇠를 옆으로 돌리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큼지막한 공허가 열렸다.

그 너머로, 마해와 다른 색으로 얼룩진 남색 바다가 언뜻 보였다.

시공(時空)의 바다.

시간과 공간, 차원과 차원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까닭에 달리 ‘시공의 폭풍’으로도 불리는 미개척지. 삼신산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시공의 바다〉로 향하는 ‘토끼 굴’이 열렸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토끼 굴’을 통과하세요. 시간 초과 시, 공허 속에 갇히거나, ‘해일’ 혹은 ‘폭풍우’와 같은 기상 이변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주의! 당신은 〈시공의 바다〉로의 입장을 허락받지 않은 대상자입니다. 무단 침입 시, 중앙 관리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토끼 굴’에서 물러날 것을…….]

휘이이이!

시공의 바다는 천계와 하계의 특성을 전부 갖고 있어, 법칙이 뒤죽박죽 섞이기 때문에 공간이 언제나 폭풍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더니.

토끼 굴을 따라 불어닥치는 강풍이 너무 매서웠다. 어째서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시공의 바다’라는 이름보다 ‘시공의 폭풍’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지 알 것 같았다.

콰콰쾅!

때마침 라플라스의 심상 세계가 우악스럽게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와 흡혈군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끼 굴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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