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78화 (478/862)

3화. 토끼와 거북이 (3)

“이 편지를 보고 난 후에 별주부의 얼굴이 어떨지 궁금하군용.”

라플라스는 연우와 흡혈군주를 집어삼키고 서서히 닫히는 토끼 굴을 보다가,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간만에 짓궂은 장난을 시도하기 때문일까. 그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콰콰쾅!

기다렸다는 듯이 심상 결계가 잘게 부서졌다.

푸른 하늘이 사라지고, 붉은 하늘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정말이지, 객으로 찾아와 놓고서 이런 행패라니. 이리도 예의가 없어서야 쓰겠어용? 그러니 평생 장가도 못 가는 거랍니당.”

라플라스는 붉은 하늘을 뒤덮을 듯이 높게 서 있는 악마, 타넥-맥스웰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느새 토끼 귀를 단 스킨헤드의 중년인으로 되돌아 있었다.

귀엽게 토끼 귀를 접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본 순간, 타넥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의 언짢은 기색에 따라 주변의 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또 해괴한 짓거리를 잘도 해 대고 있구나, 라플라스.』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 아닐까용?”

타넥은 이미 라플라스의 저런 몰골을 몇 번씩 겪어 봤기에, 괜히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려서는 골치만 아파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라플라스가 아니었다.

『거긴가!』

타넥은 기파를 터뜨려 연우 등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했다. 라플라스의 낙원 뒤쪽, 빠르게 닫혀 가는 토끼 굴이 있었다.

“말씀드렸지만, 손님이면 손님답게 다음 순서를 기다리십시용!”

라플라스는 우악스럽게 생긴 양 손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여태 낙원을 뛰어놀던 토끼를 비롯한 동물들이 갑자기 놀던 것을 멈추고, 전부 고개를 타넥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부르르, 화악!

잘게 몸을 떨더니 강렬한 마기를 터뜨리면서 저마다 마해의 괴물로 변하며 타넥에게 달려들었다.

네시의 권속들과 마찬가지로, 라플라스의 심상 세계에 살면서 힘과 권능을 부여받은 그의 권속들. 마해 속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강해져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위협적이었다.

『미안하지만, 너의 상대는 내가 아니다. 라플라스.』

그때, 타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편에 있던 추격대가 움직였다. 특경단은 관리자의 기능을 써서 힘을 한껏 강화시키고, 타넥의 옛 수하들이었던 이들은 군단을 형성하며 괴물들과 부딪쳤다.

쿠쿠쿵!

삽시간에 얼룩덜룩했던 하늘을 따라 강렬한 기의 파장이 퍼져 나가고.

동시에 라플라스 앞으로 루피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 이번에야말로, 머, 먹어 주, 주, 줄게요!”

루피는 울먹거리며 잘게 떨면서도, 전혀 거리낌 없이 몸을 날렸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입가는 짙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이런, 또 골치가 아파지겠네용. 정말이지 귀찮은 분이에용.”

탐욕의 괴물, 루피. 라플라스는 녀석에게 이미 한 차례 고전을 면치 못했기에 가볍게 혀를 차면서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렇게 전·현직 최고 관리자들이 부딪치면서.

콰아앙!

섬의 절반 이상이 단번에 날아가는 가운데.

타넥은 구름 사이로 거대한 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잡아 비틀었다.

콰드드득-

그러자 토끼 굴을 둘러싼 공간이 우악스럽게 비틀렸다. 이미 거의 닫히다시피 하던 토끼 굴이 강제로 열렸다.

타넥은 허공을 움켜쥔 손을 안 쪽으로 잡아당겼다. 토끼굴도 거대한 깔때기 모양을 그리면서 그대로 타넥이 있는 곳까지 딸려 왔다.

콰르르릉!

어마어마한 인력(引力)이었다.

그리고.

팟!

파밧-

여태 대기하고 있던 혈왕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가 토끼 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타넥도 그 속으로 의념을 불어넣었다.

츠츠츠-

마기가 마치 촉수처럼 토끼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 * *

[미개척지 ‘시공의 바다’에 입장하였습니다.]

[경고! 당신은 관리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은 무단 침입자입니다. 지금부터 중앙 관리국의 집중 감시 대상에 기록됩니다.]

[경고! 이곳은 시스템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장소입니다. 혼란에 대비하세요.]

[경고! 이곳에서 물러날 것을…….]

……

수많은 경고 메시지가 나열되는 것과 동시에.

“……온다.”

연우는 어지러운 정신을 겨우 다잡아야만 했다.

모든 게 어지러워지는 세계. 시공의 바다, 혹은 폭풍이라 불리는 이곳은 전후좌우, 상하의 구분이 없는 곳이었다.

도저히 균형을 잡을 수 없고, 감각도 교란되는 곳이라, 까딱하면 바로 정신을 잃어 시공 속에 빠져 미아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의념 통천을 이루면서 정신력은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바. 연우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겨우 감각을 찾아 가고 있던 중이었다.

분명히 남색 바다로 보이는 어떤 풍경이 있는 것 같은데도, 이리저리 제멋대로 뒤틀리다 보니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흡혈군주는 그보다도 먼저 정신을 차렸던지, 무뚝뚝한 목소리로 뒤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뒤쪽이라 생각되는 이상한 곳을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네놈을 잡아 백작님이 어디에 계신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흡혈군주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목소리. 그녀는 슬쩍 라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야 겨우 잡은 다짐이 어그러질 테니, 그래서야 군주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없는바. 이곳은 짐이 맡고 있을 테니, 어서 그 물건을 가져다주고 오너라.”

연우는 흡혈군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있었다.

시공의 바다는 모든 섭리가 혼재되는 장소. 거리도 여기선 무소용이었다. 당연히 한 번 떨어지게 되면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아주 극소수였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네놈을 찾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짐이 알아서 찾아갈 것인즉.”

하지만 흡혈군주는 그런 연우의 우려를 알고 있다는 듯, 네 일이나 어서 서두르라며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어지러워지는 공간을 뚫고 다가오는 이들에게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연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찰을 움켜쥐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앞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라플라스가 건네준 서찰에는 길을 안내하는 마법이 따로 부여되어 있어서 방향을 가늠하기가 쉬웠다.

그렇게 폭풍처럼 흘러오는 시공의 흐름 속으로 연우가 사라지면서.

흡혈군주는 뒤쪽을 슬쩍 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슬쩍 벌린 입술을 따라 날카로운 송곳니가 훤하게 드러났다.

“어느 놈들이 왔나 했더니. 참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아닌가.”

격류를 일으키는 시공의 파도를 뚫고,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가 나타났다.

둘의 인상은 다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장한 기색도 역력했다.

자신들을 꺾고 ‘왕’이 되어 종족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웅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들 역시 세월이 흐른 만큼, 관리자로 있으면서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제 옛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지를 개척했다지만.

그래도 수백 년 전 뇌리에 박힌 패배의 기억은 도무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흡혈군주를 잡아 지난날의 설욕을 하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던 마음이, 잔뜩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만큼 흡혈군주를 따라 흐르는 기세는 너무 거칠었다.

츠츠츠-

찰칵, 찰칵!

흡령마. 그녀가 초월을 이루면서 탄생시켰다는 또 다른 인격은 시공의 흐름 사이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톱니 이빨을 마구 부딪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덤비지 않고? 이리 간만에 해후하게 되었으니 짐이 갸륵한 마음으로 놀아 줄 의향도 있다만.”

“…….”

“…….”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가 서로 눈빛만 주고받고 있을 무렵.

『멍청한 것들.』

두 사람 주변을 돌면서 위협적으로 굴던 흡령마를 밀어내는 힘이 있었다.

스스스, 그들 앞으로 검은 마기가 뭉치면서 타넥이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타넥이 만들어 낸 의념체(意念體). 화신체였다.

하지만 그 역시 초월을 이룬 악마왕답게, 의지가 닿는 곳에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부여할 수 있었다. 본체는 외부에 있으면서 토끼 굴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있다지만, 의식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악마의 인(印)도 깨우치며 각성을 이뤘는데도 아직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냐? 너희들은 결국 평생 저 계집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타넥은 오래전에 권속으로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흡혈군주에 짓눌려 있는 두 사람을 강하게 질책했다.

두 권속은 그가 사도로 삼을까도 생각하고 있는 후보군. 그런 녀석들이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을 욕보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다, 이내 무언가를 다짐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마왕이시여. 저자를 어떻게든 도모하여, 잠시나마 마왕께서 가지셨던 언짢은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짓은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있는 저딴 망령이 아닌, 죄인 ###이다. 놈을 어떻게든 데려와라!』

타넥은 이제 연우에게 강한 집착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크게 물도 먹지 않았던가. 그의 자존심상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무왕의 제자를 이 이상 내버려 두었다가는 얼마나 더 많은 사고를 칠지 모르는 일. 보아하니 이미 라플라스와도 접촉하면서 뭔가를 하려는 것으로 보였기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라플라스가 삼신산에 용무가 있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더 이상 놈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해서는 안 돼!’

삼신산은 하계에서 곧장 천계로 올라갈 수 있는 우회로. 아니, 정확하게는 하계와 천계의 법칙이 뒤섞이는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질 않아, 중앙 관리국에서도 섣불리 발을 들이기를 꺼려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블랙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윗줄에 올라와 있는 연우와 라플라스가 그런 장소에서 어떤 꿍꿍이를 꾸민다고?

본능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야네크의 암굴이 무너졌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재앙이 닥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제아무리 영왕이라 해도, 이미 악마로 개화하기 시작한 두 혈왕이라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테지.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는 흡혈군주를 쓰러뜨리는 데 한몫을 거들고 싶었지만, 주인의 명령이 있어 연우의 뒤를 쫓고자 했다. 두 개의 붉은 빛살이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짐이 이곳에 있거늘, 감히 허락 없이 어딜 함부로 가려 드느냐!”

흡혈군주가 크게 호통치는 것과 동시에 흡령마가 검은 가시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삽시간에 만들어진 검은 그물망이 두 붉은 궤적을 잡아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위에서부터 마기가 칼날처럼 강하게 내리꽂히면서 그물망을 찢어 버렸다.

콰르르릉!

『망령! 감히 그동안 나를 옆에서 농락하였겠다? 네년이 무엇을 노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타넥은 일곱 개의 뿔을 단단히 세우면서 으르렁거렸다.

온. 그의 오랜 오른팔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수하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화가 단단히 났던 그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정체가 흡혈군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참담했던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기 때문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타넥, 그거 아나?”

흡혈군주는 안면을 후려치려던 타넥의 우악스러운 주먹을 가볍게 막아 내면서 차갑게 웃었다.

“너의 입 냄새는 아주 지독하였다. 시궁창이라도 달고 있는지, 그동안 참는 데 짐이 아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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