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79화 (479/862)

4화. 토끼와 거북이 (4)

명백한 도발.

타넥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년이, 감히?』

“이년 이년 하지 마라. 듣는 이년인 짐의 기분이 썩 좋지 않으니. 그리고 대체 점심으로 무엇을 먹은 게냐? 입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구나.”

『뒈지고 싶은 게로구나!』

타넥의 미간을 따라 푸른 혈관이 잔뜩 돋았다.

이렇게까지 모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면 어찌 악마왕이라 자처할 수 있을까!

하지만 흡혈군주 역시 봐주지 않겠다는 듯, 시공의 흐름을 전부 잡아먹을 듯이 위협적인 규모로 흡령마를 한껏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콰아앙!

폭음과 함께 두 명의 초월적 존재가 부딪치면서.

시공의 바다가 크게 요동쳤다.

* * *

얼마나 움직였을까.

연우는 의념 통천으로 의식을 강하게 붙잡으면서 한 발 한 발을 겨우 앞으로 내디뎠다.

시스템의 가호를 받고 있어 시공의 바다 속에서도 의식을 또렷이 차릴 수 있는 추격대와 다르게, 그는 지금 그런 걸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버텨야 했다.

하지만 시공의 바다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혼재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도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

자칫 겨우 쌓은 격이 흐트러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의념 통천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의념 속에다 또렷한 뭔가를 더 불어넣고자 했다.

‘심상.’

자아와 의식을 구성하는 근간, 심상에 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의념은 마음속에 담긴 심상을 외부로 표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로. 그렇다면 그 통로를 훨씬 더 크고 넓게 만들어 심상을 더 많이 배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한다면 흐트러지려는 격도 단단히 다져질 뿐만 아니라, 영혼이 가진 무게도 더 커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론을 정립하기는 쉬워도, 달성하는 건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연우는 이미 좇을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

네시.

심상 개변을 통해 심상 세계를 제 입맛대로 구축하던 마해의 왕이 가진 그 술수를 모방할 수 있다면.

그 방식을 자신에게 뜯어 맞출 수 있다면, 당장 심상 세계의 구축은 이루지 못할지라도 자아의 완성까지는 노릴 수 있을 법도 했다. 의념 통천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 테지.

‘검뢰를 사용했어도 결국 네시를 완전히 잡아내지 못했어. 그건 위력이 약해서가 아니야. 아직 그보다 더 확실하게 근본을 꿰뚫는 눈을 가지지 못해서지. 아직 네시에 비하면 격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혼돈으로만 가득한 마해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탄생한 왕.

어쩌면 그런 녀석을 한 번 보았다고 해서 단번에 따라잡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는 단 한 번의 충돌에서도 아주 많은 것을 얻었고, 그동안 자신이 이뤘던 것들이 아직 많이 미진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네시와 대등하게 기세를 겨루던 흡혈군주와 라플라스를 보았을 때, 자신을 둘러싸던 모든 세계관이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진인의 영역을 딛고, 궁극기를 손에 넣어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가장 수위권에 해당하는 실력을 얻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위에는 너무나 넓은 하늘이 놓여 있었다.

천외천. 하늘 밖에는 하늘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였다.

진인의 영역이 플레이어가 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라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스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던 ‘만점’의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 영역을 단어로 표현한다면.

‘신인(神人).’

그래. 아마 그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베이럭 녀석이 추구하던 이상과 같은 단어를 쓰게 되어 버렸지만.

‘어쩌면 베이럭의 이상과 스승님이 말하는 길, 내가 보려는 끝은 서로 길만 다를 뿐, 사실은 전부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외뿔부족 내에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갈래로 나눠진 시냇물이 합치고 합쳐져 끝내 바다라는 거대한 곳으로 흐르듯, 모든 길은 결국 거대한 한 곳에 닿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연우는 한 발을 내디뎠다.

쿵!

어쩌면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잘못된 길이라면 되돌아가 다시 다른 길을 찾아 걸으면 그만인 것을.

그런 생각으로 좀 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으며 어떻게든 흔들리는 시공의 흐름 속에서도 ‘나’를 온전히 갖추고자 하였고.

화아아-

언제부턴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었다.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다던 자신의 영혼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영력을 내뻗으며 무언가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초감각’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외부로의 방출과 동시에 내부로의 관조를 섞어 내외의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습니다.]

[‘초감각’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초감각’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

[숙련도의 빠른 변화에 따라 스킬이 새롭게 탈바꿈합니다.]

[스킬, ‘아트만 시스템’과 연동되어 심안(心眼)이 열렸습니다.]

……

[스킬과 관련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옵션이 추가되었습니다.]

[옵션 ‘천안통(天眼通)’이 생성되었습니다.]

[천안통]

등급: S~???

설명: 의념으로 자신의 뜻을 세상에다 아로새기고, 그 위에 심상을 부여했을 때 비로소 작은 우주인 ‘나(아트만)’가 깨어나는 법. 우주의 진리이자 끝없는 지혜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신묘한 이치를 저절로 깨달아 새로운 영적 능력을 터득하게 되리니.

이때 탄생하게 되는 6가지의 초능을 가리켜 보통 ‘육신통(六神通)’이라 부른다.

천안통은 그중에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서, 심안에서 비롯되어 세상의 진상을 비추는 거울을 대변하기도 한다.

**연동되는 다른 육신통을 추가 획득 시, 등급이 SS에서 최대 SSS+까지 상승합니다.

**현재 연동되는 스킬

1. 용신안

2. 화안금정

3. 검은 구비타라 - 현인의 눈

4. 지옥의 눈

……

[여섯 가지의 신묘한 능력, 〈육신통〉에 대한 단서를 획득했습니다.]

[자격을 갖출 시, 다른 능력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정보창을 참고하세요.]

그 순간.

연우는 여태껏 어지럽던 세계가 확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죽박죽이던 초감각의 정보들이 커다란 체계를 따라 정리되면서 머릿속에 확실한 도안을 그려 낸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초능(超能)을 깨달은 것이다.

‘영혼이 새롭게 각성했어.’

연우는 의념 통천을 깨달았을 때처럼 영혼이 다시 한 번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시스템의 제재에서 한 발 벗어났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알게 모르게 뭔가에 억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기 직전, 그 속에 있는 것들이 탄탄하게 다져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안통이 더해진 초감각을 따라, 여태껏 안개로 가려진 듯 불확실하게 어른거리던 세계가 한 꺼풀 벗겨졌다.

화아아-

그 너머에 있던 잔잔한 남빛의 바다가 서서히 드러났다.

가장 먼저, 저 멀리 하늘을 뚫고 높게 선 세 개의 산이 보였다.

봉래.

방장.

영주.

전설 속 신적인 존재들만이 머문다는 세 개의 영산, 삼신산이 차례로 나타나고.

꾸우웅-

그 아래로, 삼신산을 등에 짊어진 채, 시공의 바다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고 다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북이가 보였다.

영귀.

천룡·기린·봉황과 함께 최고 신수로 꼽힌다는 존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라플라스를 마해에서 꺼내 왔던 별주부의 모체이기도 한 존재.

서찰을 가져다 줘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많은 게 달라졌어.’

천통안을 깨달은 뒤, 연우에게 보인 건 굳이 삼신산만이 아니었다.

삼신산을 이루고 있는 천계와 하계의 여러 섭리와 법칙들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여러 격류와 폭풍을 따라 시공의 바닷속을 넘실대고 있었다.

거대한 뭔가에 접촉을 한 기분이었다.

천안통만 하더라도 이렇게 대단할진대.

만약 다른 육신통도 차례로 깨닫게 된다면 대체 어떤 광경이 보인단 걸까?

어쩌면.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을지도.’

연우는 초월적인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앉은 이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신권의 한 단면을 엿본 것 같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순간.

팟!

“영왕, 이곳에 있었구나!”

“네놈이 이리 날뛸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까지다.”

연우는 천통안과 연결된 용신안을 통해, 시공의 흐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머리 위.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가 공간을 열고 나타나며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시스템의 가호를 받고 있다지만, 시공의 격류를 가르며 건너와야 했던 까닭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이런 일을 만든 연우에 대한 화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악마의 인을 동시에 개방하며, 악마로서의 본체를 드러내어 단숨에 연우를 공격하려는데.

‘뭐지?’

‘무슨……!’

둘은 연우가 눈을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당황하기는커녕,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뭔가 위기감을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우르르- 콰콰쾅!

콰르르릉!

“컥!”

“이, 이게…… 크아악!”

별안간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지면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균열이 그대로 두 사람을 거칠게 가르고 지나갔다.

둘은 본체를 드러낼 겨를도 없이, 너무 허망하게도 피 안개와 검은 구름으로 변해 흩어지고 말았다.

“쯧.”

연우는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 삼신산이 뭔지도 모르고 쫓아온 건가?’

아무래도 급하게 오는 나머지 타넥이 녀석들에게 따로 언질을 주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연우는 편하게 되었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칼’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위대한 존재가 기거하고 있는 궁(宮)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달리 말하자면, 삼신산은 천계와 하계를 잇는 ‘계단’ 혹은 ‘사다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사는 존재라면, 당연히 신과 악마들 중에서도 격이 아주 높을 수밖에 없는바.

천계에서도, 하계에서도 그런 우회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연우는 삼신산이 있는 영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옥황상제.

천교의 최고신.

삼신산은 바로 그가 은거하고 있는 궁궐이었다.

삼신산으로 들어가는 초입, 영귀의 머리 부분에는 수 미터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 거인이 제 몸체만큼 큰 도끼를 든 채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옥황상제 있다. 여기! 칼 못 든다. 절대! 그리고 못 간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콰아앙!

그리고 ‘잠든’ 옥황상제를 대신해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 있었다.

태초의 거인, 반고가 처음 눈을 뜨고 알을 깨며 나올 때 사용했다는 도끼, 반고월의 계승자.

천하대장군.

천계의 최고 투사.

태초의 전사장(戰士長).

너무나 많은 호칭과 이력 때문에 신과 악마들도 섣불리 부딪치기를 꺼려 한다는 최고의 투사.

사실상 아무도 삼신산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끽구 말 들어야 한다!”

동생이 몇 번이고 침이 튀도록 칭찬하던 천계 최고의 투사.

끽구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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