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카샤의 기록 (1)
티켓을 찢기 직전.
“……뭐지?”
연우는 갑자기 주변에 흐르던 모든 시공의 흐름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삼신산 저 너머, 막대한 크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수챗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토끼 굴 속으로 시공의 흐름이 모조리 비틀리고 있었다.
‘타넥!’
아무래도 연우 일행이 삼신산에서도 탈출할 기미를 보이자, 저 너머에 있던 타넥이 조바심에 결국 무슨 수를 쓴 것 같았다.
연우는 어떻게든 버티며 티켓을 찢고자 했지만.
[포탈 생성이 실패하였습니다.]
[포탈 생성이 실패하였습니다.]
……
[여기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공의 좌표를 특정할 수 없어 포탈이 생성되질 않습니다. 안정된 지역으로 이동하여 재사용하십시오.]
타넥의 계속된 방해 때문에 도무지 쉽지 않았다.
결국.
화악-
연우는 버티지 못하고 풍압에 같이 휩쓸리고 말았다.
* * *
『이런 거지 같은!』
타넥은 정말이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본체가 있는 마해에서는 라플라스가 괴물들을 부리며 방해를 하지 않나, 화신체가 있는 시공의 바다에서는 흡혈군주가 이상한 어둠을 부려 대질 않나.
거기다 연우를 잡으라고 보냈던 블라드 체페슈와 질 드레는 곤죽이 되어 되돌아왔다.
악마로 각성한 덕분에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어 복구를 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이래서는 위험하다.
그래서 타넥은 결심을 내리고 말았다. 이래서는 본체에 치명적인 타격이 갈 수 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콰직!
마해에 있던 타넥의 본체가 여태 강제로 쥐고 있던 토끼 굴을 더 세게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부르르. 거체(巨體)가 크게 떨렸다. 마치 산자락이 지진에 울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히든 스테이지와 히든 스테이지를 잇는 공간의 균열을 비틀어 쥔다는 것은.
그리고 강제로 잡아당겨 너머에 있는 놈들을 강제로 끌어온다는 것은. 그처럼 격 높은 존재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타넥이 잡아당긴 건, 비단 공간의 균열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있었던 인과(因果)도 섞여 있었다.
연우 일당이 토끼 굴을 열었다는 인(因, 원인)과 시공의 바다로 넘어갔다는 과(果, 결과)를 같이 비틀어 ‘없던 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인과의 강제적인 역전이었다.
콰직, 콰지직-
타넥이 우려했던 대로, 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지면서 본체를 따라 균열이 잔뜩 퍼져 나갔다. 격에 손상이 간다는 뜻. 클루스가 감당할 수 있는 인과율의 허용치를 넘었다는 신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넥은 눈에 불을 켜고 연우 일당을 이곳에다 강제로 꿇어앉히고자 하였다. 오늘, 어떻게든 녀석들을 씹어 삼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 너머에 있는 놈들도 만만치 않은 자들. 연우는 사왕좌의 계승자였고, 흡혈군주는 마해의 왕이었다. 쉽사리 인과의 강제 역전이 일어나지 않아, 타넥의 속이 타들어 가던 무렵.
“꺄하하! 돌아왔네용! 드디어!”
라플라스가 갑자기 와락 달려들던 루피를 마력으로 밀어내다 말고 하늘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킨헤드의 중년인이 콧소리 섞인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라플라스는 아주 크게 기뻐했다. 양팔을 펼치면서 환희에 젖는 모습을 본 순간, 타넥은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라플라스가 마해에 도로 갇힌 이유는 간단했다. 관리자로서의 무간섭 원칙을 저버리고, 플레이어에게 직접 손을 뻗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괜찮은 플레이어를 잡아, 그가 가진 시스템을 강탈하려 한 것이다.
직접 플레이어로서의 자격을 얻어 자유를 득한다. 마해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이 보고 싶었던, 관리국의 엄격한 규율이 싫어 탈출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던 녀석에게 그만한 것도 없었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클루스가 먼저 눈치를 채고 루피를 보내 녀석을 제지했기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큰 사달이 날 뻔했던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앙 관리국에서는 녀석에게 주어졌던 최고 관리자로서의 직분을 빼앗으면서 모든 시스템 권한을 정지시켰다. 마해로 도망치다시피 해야 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탑 내에서 ‘이레귤러’로 지정된 자가 맞이하게 될 결말은 아주 뻔했으니까.
반대로 중앙 관리국에서도 시스템의 가호가 덜 미치는 마해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 그동안 내버려 뒀던 것인데.
갑자기 라플라스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토끼굴 너머에는 시공의 바다가 있고, 삼신산이 있으며, 옥황상제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옥황상제는 중앙 관리국의 의결이 없어도 직접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몇 안 되는 존재. 그와 어떤 거래를 한 것이라면?
“이미 늦으신 거 같은데 어떡하죵?”
히죽 웃는 라플라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그리고.
콰아아-
[새롭게 플레이어로 지정된 ‘라플라스’에게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능력 수치를 산정합니다.]
[스킬 목록을 정리합니다.]
[권능을 도식화합니다.]
……
[플레이어 ‘라플라스’에 새로운 칭호 ‘관리를 때려치운’이 생성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라플라스’에 새로운 칭호 ‘단번에 격을 갖춘’이 생성됩니다.]
라플라스를 따라 어마어마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마해의 어떤 왕들도 내뿜을 수 없는 기세.
“어, 어떻게 된 거야? 프, 프, 플레이어가 되, 된 거야?”
루피는 겨우겨우 균형을 잡으면서 흔들리는 눈망울로 타넥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타넥은 루피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루피 역시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 상황이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 그랬을 뿐.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수천 년에 달하는 탑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
최고 관리자가 플레이어가 되었다.
혹은.
타계의 존재가 플레이어가 되었다.
“뭐긴 뭐겠어용?”
라플라스는 그토록 바라던 시스템의 가호가 완전히 적용되고, 자신의 눈앞에 스테이터스 창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여러분들 다~ 좆 된 거죵.”
그리고 스킬 목록 중에 가장 상단에 적힌 것을 시전했다.
〈본체 해방〉
쾅!
토끼 귀를 단 스킨헤드의 중년인이 갑자기 풍선처럼 펑 하고 터졌다. 대신에 휘몰아 닥친 혼돈의 마기가 뒤섞이면서 하늘을 가르고,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시와 타넥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계 신의 위장을 전부 뒤덮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마해의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비대하고 막강하기에 마해에서도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본체였지만.
시스템의 가호를 받은 이상, 마해가 그의 영역으로 인정을 받은 이상, 더 이상 부담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만큼 시스템의 가호를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컸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비록 인과율의 저촉을 받게 된 게 귀찮긴 했지만.
『이 귀엽지 않은 분들을 쓸어 내기에는 충분하니까용.』
거대 토끼, 라플라스는 의념파를 마구잡이로 쏟아내면서 무지막지하게 큰 손을 흔들었다.
콰아앙-
겉보기엔 단순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만 보였지만.
세상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격 높은 존재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법칙이 뭉개지고 있었다.
손끝에서 수많은 인과와 진리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부서졌다. 공간이 허무로 되돌아갔다. 피부를 따라 혼돈과 무질서가 증기처럼 들끓고 있었다. 저기에 휘말린다면 비단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칫 영혼이 낱낱이 분해되어 소멸될 우려가 더 컸다.
연우와 흡혈군주가 인과 역전으로 인해 마해에 다시 나타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보이는 마해의 광경은 그를 충격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건 대체……!」
샤논도 기함을 터뜨릴 정도였다. 다른 권속들도 말만 하지 않을 뿐이지, 충격에 빠진 지 오래였다.
라플라스의 손끝에서 모든 것이 줄줄이 부서지고 있었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라플라스가 소환했던 괴물들은 물론, 타넥과 함께 왔던 특경단이며 추격대가 전부 작은 입자로 쪼개지며 사라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아주 오래전, 위대한 악마왕 타넥-맥스웰을 따라 여러 차원과 우주를 병탄하며 돌아다녔던 군세가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해의 루피도 있었다. 언제나 굶주린 식성에 미쳐 마음에 드는 건 무조건 먹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는 악명 높은 최고 관리자가 내뱉은 유언은 너무 이상했다.
“머, 먹으려고 하는데 먹혔어! 무, 무, 무서워! 하지만 이, 이것도 재밌어!”
펑!
콰콰콰콰-
라플라스의 본체는 마해 위에 있던 방해꾼들을 전부 말끔하게 치운 뒤, 흡족하게 웃으면서 이번에는 타넥의 본체로 향했다.
타넥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악마왕은 태어나 처음으로, 아니, 두 번째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왕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 악마왕으로서 절대 있을 수 없고,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치욕스러운 감정이었지만.
『안 된다! 안 돼!』
『순순히 저의 ‘간’이 되세용.』
라플라스는 그딴 건 알지 못한다는 듯, 아주 쉽게 타넥을 덥석 붙잡아 그대로 사지를 뜯었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단숨에 마해를 붉게 물들였다. 마해의 깊숙한 곳에 살던 괴물들이 수면으로 올라와 맛난 살점을 뜯어먹었다.
아아아악.
타넥이 지르는 비명과 절규가 마해를 빼곡하게 물들였다.
「저것은. 이미. ‘위대한. 옛것들.’ 급입니다.」
연우는 반쯤 경악하며 최고 관리자가 허망하게 죽는 것을 보다가, 뒤에서 조용히 나타나 말하는 부를 돌아봤다.
위대한 옛것들?
「달리.」
“다르게는 ‘옛 지배자’라고도 부르지.”
흡혈군주가 어느새 나타나 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타계의 신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하는 놈들이다. 이 위장의 주인, ‘극권의 군왕’도 원래 거기에 속했었지. 물론, 저놈은 아직 거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말석을 차지할 정도는 되지.”
괜히 마해의 두 번째 왕이 아닌 셈이야. 흡혈군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키득거렸다.
연우는 다른 말들보다도 ‘마해의 두 번째 왕’이라는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았다.
마해에는 여덟 명의 ‘왕’이 있다고 했었지. 거기서 두 번째가 저 정도라면 첫 번째는 대체 얼마나 더 강하다는 걸까? 분명한 건, 흡혈군주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뿌리가 되는 극권의 군왕이라는 놈은 또 무엇이고?’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떠올렸다. 아마 그놈도 위대한 옛것들이니 하는 것에 소속되었겠지. 도무지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줄줄이 튀어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식사를 전부 끝낸 라플라스가 거대한 몸을 다시 일으키면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연우는 바짝 긴장했다. 단번에 권능을 전면 개방하고, 하늘 날개를 뽑아 비그리드를 움켜쥐었다.
순간, 녀석의 얼굴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히죽 웃음기를 드러냈다.
『이런. 이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당. 제가 아무리 배고파도, 은인에게 위해를 끼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아용.』
“…….”
『어쩌다 보니 갈 길을 못 가고 여기로 휘말리신 것 같은데. 미안해용. 이제 갈 길 가시면 됩니당.』
순간, 라플라스가 망가뜨렸던 마해가 정지했다.
〈심상 개변〉
그리고 마치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듯, 무너진 모든 것들이 되돌아왔다.
증발한 마해가 수복되고, 소멸한 괴물들이 재조립되어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시공의 바다와 연결되었던 토끼 굴도 완전히 닫히면서 불안정하던 공간이 진정되었다.
라플라스는 이제 가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우는 그런 라플라스를 잠시 경계 어린 눈빛으로 보다, 튜토리얼 티켓을 찢었다. 발아래에 붉은 포탈이 생성되면서 그와 흡혈군주를 천천히 삼켰다.
『잘 가용.』
라플라스는 그 거대한 손을 쿰척거리면서 배웅을 했다.
포탈 너머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면서.
연우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대체 어떤 괴물을 이 세상에 풀어 놓은 거지?’
* * *
『예전부터 느꼈지만, 재미난 친구에용.』
라플라스는 연우가 사라진 자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더 히죽 웃었다.
튜토리얼 때부터 이블케가 직접 관심을 가지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고 여겨졌다. 어쩌면 ‘그들’이 하려는 일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 다시 움직여 볼까용. 이블케가 오라고 자꾸 재촉을 해대니까용.』
쿵.
쿵.
라플라스는 큰 몸집을 움직였다. 지금쯤 동료들이 단단히 사고를 치고 있을 곳으로.
중앙 관리국.
옛 직장이기도 했던 곳을 방문해야만 했다.
마해가 요란하게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