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카샤의 기록 (2)
그 시각.
댕댕댕-!
“전원, 서둘러라!”
“라플라스의 위치부터 파악해!”
중앙 관리국은 완전히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연우 일당과 라플라스를 잡기 위해 보냈던 추격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었다.
그 때문에 중앙 관리국에는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다.
사안의 정확한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조사대를 급하게 꾸리고, 추가로 토벌대를 구성했다. 타넥과 루피, 최고 관리자를 둘이나 죽인 녀석들이니만큼 토벌대의 인원수나 구성원들도 역대 최고였다.
“……대체.”
국장 클루스는 그런 조사대와 토벌대 구성에 필요한 결재 서류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타넥은 한때 수많은 차원과 우주를 병탄했던 악마왕이었고, 루피는 여러 신과 악마를 잡아먹는 기행을 벌였던 괴물이었다. 둘 모두 시스템에 갇혀 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위인들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었단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미 클루스도 관리자 명단에서 미(未)와 해(亥)가 사라지고, 묘(卯)가 유달리 커진 것을 확인한 상태. 속이 끓을 수밖에 없었다.
‘천계. 기어코 어떻게든 하계로 내려오겠다는 건가? 우회로를 개척해서라도?’
클루스는 라플라스와 마해의 군단은 일종의 첨병(尖兵)일 뿐, 그 배후에는 천계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옥황상제의 대리자이자, 영귀의 화신체인 별주부가 라플라스를 시스템에 귀속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98층에 억류된 천계의 신과 악마들은 언제나 하계에 영향력을 뻗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는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번번이 올포원에 가로막혀야만 했다.
그럴 때면 관리국은 숟가락을 얹듯 올포원에 힘을 실어 주는 한편, 반대로 올포원이 위쪽 층계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립된 3개 세력의 미묘한 균형도 어느덧 수천 년.
그동안 양차 용살대전이니, 루시퍼 반란이니 하면서 균형이 흐트러질 뻔한 위기는 많았지만, 그래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역사의 뒷면에 있어야 하는 관리국 내에서도 이따금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천계도 지금까지 큰 사달이 일어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화가 잔뜩 차 있는 상태였다.
계속해서 팽창하다 보면 그만큼 압박도 커질 수밖에 없는바. 그 압박도 결국 한계치까지 다다르면서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다만, 트리거(Trigger)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트리거를 기어코 천계가 찾아내고 말았다.
각 사회의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로 분류되는 여러 고대신과 개념신들이 직접 나서서 올포원과 전쟁을 시도하는 한편.
마해라는 새로운 아군을 찾아 관리국을 직접 공격하게 만든 것이다.
‘두 개의 첨병을 앞에 세워서 올포원과 우리 관리국을 한창 압박하다가, 한데 모은 전력을 단번에 밀어 압도적인 물량으로 넘으려는 속셈인 것이겠지.’
클루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천계 내에 분란도 같이 커지고 있어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천계가 그동안 대단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98층에 억류되어 있어야 했던 까닭은 간단했다. 그들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올림포스 내의 분란이나, 올림포스와 르 인페르날의 멸망전, 천교와 절교의 계속된 대립 등을 보듯, 그들은 절대 하나로 섞일 수가 없는 집단이었다.
양 진영 간의 대립, 각 사회 간의 갈등, 그 속에 있는 초월자들 간의 개인사까지. 워낙에 쟁쟁하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이다 보니,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대체 어떻게 합의점을 찾은 것인지 몰라도, 단단히 힘을 합친 것 같았다.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라플라스의 관리국 이탈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음모가 있었던 거야. 철저한 계산 아래,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포석들을 치밀하게 깔아 뒀다가 단번에 거둬들이는…… 그야말로 신묘한 재주. 대체 누구지? 이런 음모를 꾸민 것이?’
클루스는 천계를 하나로 모아 움직이게 한 주체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일을 주도하지 않고서야, 절대 이렇게 자로 잰 듯이 딱딱 맞아 떨어지게 움직이지 않을 테니.
‘문제는 우리는 그자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대체 누구지? 본 국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천계와 올포원의 성향이나 동향까지 정확하게 꿰뚫을 만한 위치이면서 그만한 머리를 가진 자가……?’
더 큰 문제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막이 다음 차례로 무엇을 계획했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때.
“국장.”
갑자기 그의 앞으로 포탈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타났다.
금방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피부와 간교한 눈매를 가진 자. 사(巳)의 하양으로, 주로 참모 역할을 맡는 최고 관리자였다.
“라플라스의 위치는? 알아냈나?”
하양은 클루스의 명령에 따라 라플라스의 행적을 쫓던 중이었다. 너무 간교한 나머지 인간적인 정은 잘 가지 않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일 처리에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의가 갔다.
다행히 하양은 이번에도 클루스의 명령을 무사히 잘 완수한 모양이었다.
“그렇소. 한데…….”
하양은 고개를 끄덕이다 잠깐 말끝을 흐렸다.
클루스는 눈살을 좁혔다. 하양이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하양의 눈가에는 미미하게 두려움마저 얽혀 있었다.
“놈이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라플라스가 가는 곳은…… ‘뇌’가 있는 곳이었소.”
“뭐?”
쾅!
클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탁상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양이 말하는 ‘뇌’는 분명히 죽은 타계 신의 머리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죽은 타계의 신이 억겁의 세월에 걸쳐 삼킨 먹이들이 혼재된 별세계가 위장이라면, 머리 부분은 본체의 사념이 가장 강하게 남은 별세계였다.
최초의 우주가 혼돈을 가로지르며 창생된 이래 시작된 역사. 그 모든 것을 관찰한 신의 사념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위험했다.
라플라스는 바로 그곳을 정복하려는 것이다.
놈이 직접 죽은 타계의 신, 그 자체가 되려 하고 있었다!
“라플라스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그런 놈이 ‘극권의 군왕’이 되어 버린다면 탑의 균형이 완전히 망가지거늘! 이놈이 기어이 천지분간도 못 하고……!”
타계의 신, 그중에서도 ‘위대한 옛것들’ 중 하나가 플레이어가 되어 버린다면. 탑이 가진 기능이 유명무실해져 버리고 만다.
한 번 뚫는 게 어려울 뿐이지, 한 번 뚫리고 나면 두 번, 세 번이 연달아 이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탑이 금세 타계의 신으로 가득 차 버리고 말 테지.
관리국장이 되면서 탑이 세워진 이유를 알게 된 클루스였기에. 그것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트리니티 원더들이 맺었던 〈최초의 맹약(盟約)〉이 여기서 깨어져서는 안 되었다.
‘아직은 그럴 ‘날’이 아닐……!’
콰아앙!
하지만 클루스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큰 폭발과 함께 국장실의 벽이 통째로 뜯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국장…… 피하……!”
“란덴!”
역시나 최고 관리자인 축(丑)의 란덴이 잔뜩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나타나 중얼거리다 털썩 쓰러졌다. 절명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클루스와 하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저벅-
“오효효효! 정말이지, 지난날의 정리로 편하게 안식을 드리려 했는데. 이러면 힘들어지신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건지.”
“……이블케?”
“안녕하신가요, 국장님. 산책하기 딱 좋은 아침이지 않은가요?”
클루스는 란덴의 시체를 밟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고블린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블케는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입술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가 오늘따라 흉흉해 보였다.
그의 뒤에는 진(辰)의 디아블로와 유(酉)의 라피스 라줄리 등, 최고 관리자 몇몇과 특경단원들이 서 있었다.
이미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시스템이 곳곳에서 가동되고,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로 나뉜 두 세력 간의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반란이었다.
더불어.
클루스는 여태껏 머릿속에 들었던 모든 의문이 단번에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흑막이 당신이었나?”
천계를 끌어오고, 라플라스를 움직이며, 마해를 배치했던. 그리고 올포원의 손발을 묶고, 이제 관리국까지 유명무실하게 만들려는 자가 이블케라면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최초로 최고 관리자가 되어 자(子)의 칭호를 얻은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모든 일들을 획책할 수 있을까.
“오효효. 흑막이라니요. 저는 모두 다 같이 잘살아 보자는 뜻에서 힘을 내는 것에, 한 손을 보탠 것밖에 되지 않은 것을요.”
클루스는 이블케의 말 따윈 무시했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지?”
“탑을 위해서랍니다.”
“탑? 웃기는군. 겨우 잡은 균형을 망가뜨리고, 시스템까지 흔들려는 짓이 탑을 위해서라고?”
“아뇨. 탑을 위해서가 맞답니다. 탑이 탑으로서 있기 위해, 원래의 기능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한 작업. ‘최초의 맹약’이 제대로 이행되도록 하기 위한 보수 작업이지요.”
저는 관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답니다. 이블케는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클루스는 이를 꽉 다물었다. 이블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도.
반박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맹약의 추구는 그것과 전혀 궤를 달리했으니까. 하지만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이블케를 비롯한 조직은 거사를 진행했고, 거기서 자신은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방해꾼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대로 방해꾼이 되어 주지.’
클루스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콰드득하고 가슴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뜯기는 소리가 났다. 본체를 해방하려는 것이다.
“이런. 아무래도 국장님은 저희와 뜻을 함께하실 것 같지 않군요. 아쉬워요.”
하지만 이블케는 말과 다르게 여유 가득한 미소를 잃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디아블로가 앞으로 나섰다. 최초 관리자 중에서 클루스와 함께 쌍벽을 이룰 것이라 일컬어지던 무력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정체는 최초의 마룡(魔龍)이었다.
“국장, 당신과는 언젠가 제대로 된 생사투를 벌여 보고 싶었지.”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콰르르릉-
두 존재가 해방한 격의 파도가 중앙 관리국을 통째로 날리면서.
범과 용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 * *
[이곳은 0층, 튜토리얼의 관입니다.]
[튜토리얼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관전자의 신분이 주어집니다.]
[경고! 당신은 이미 튜토리얼을 통과한 전력이 있습니다. 튜토리얼은 탑에 입장하고자 하는 도전자들을 시험하는 관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개입할 시, 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을 위험이 큽니다. 그러니 절대 도전자의 시험에 개입하지 마십시오. 만약 개입이 이뤄질 시,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가 주어질 것입니다.]
[경고! 튜토리얼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은 장소입니다. 오히려 이곳에 장기간 거주할 시, 업적에 악영향이 끼칠 수 있습니다. 원래의 층계로 되돌아갈 것을 추천합니다.]
[경고! 당신은…….]
……
연우는 튜토리얼 스테이지에 입장하자마자 망막을 가득 메우는 경고 메시지에 혀를 찼다.
‘청화도 놈들은 이런 걸 감수하고 아랑단을 운영했었단 말이지? 이곳으로 넘어온 놈들에게 보상이 적잖게 줬어야 했겠군.’
연우는 아르티야의 지배 체재가 굳건해지면 튜토리얼에도 손을 뻗쳐 볼까 했던 생각을 재고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렸다간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클 것 같았다.
‘어차피 튜토리얼은 이번 회차로 완전히 문을 닫게 만들 생각이지만.’
그는 중앙 관리국이 들었다면 또 크게 분통을 터뜨릴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보다 여기도 오랜만인데.’
라플라스가 준 티켓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튜토리얼을 재시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저층 구간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해 업적을 처음부터 다시 쌓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소량으로만 판매되는 티켓.
자칫 연우가 그동안 쌓은 업적이 단번에 날아갈 수도 있었던 셈이었다.
이미 깨달은 바가 많아 진짜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위험했던 건 사실이었다. 라플라스로서는 가볍게 한 장난이었겠지만.
그 때문일까.
연우가 도착한 곳은 대기실이었다.
처음 지구에서 게이트를 열어 입장했을 때 들어섰던 곳. 어둡고 좁은 실내가 숨 막힐 듯이 주변을 에워쌌다.
[372:88:65_04]
[372:88:65_03]
……
‘시간은 대략 2주쯤 지났나?’
연우는 카운터를 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보름 넘게 남았다. 이 정도면 아카샤의 뱀을 생포하고, 이리저리 연구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다 연우는 카운터를 끄고, 주변으로 인지 영역을 크게 확대했다.
‘이블케가 보이지 않아.’
튜토리얼은 보통 녀석의 관할일 텐데? 그가 여태 저지른 사고를 생각해 본다면 이곳으로 바로 찾아와야 했지만. 이블케는 전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연우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라플라스가 그렇게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제아무리 이블케라고 해도 튜토리얼에 집중하기 힘들 테지.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그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인 셈이었다.
화악-
연우는 불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우선은 이 함정 많은 트랩 구획부터 통과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