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84화 (484/862)

9화. 아카샤의 기록 (3)

[E구획에 입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바깥 영역입니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접으면서 빠르게 동굴을 빠져나왔다. 간만에 통과해 본 튜토리얼은 오래전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들었다.

「추억 회상하면서 다른 도전자들 넋 나간 건 못 봤어, 주인? 아예 기가 꺾였더만. 에구. 불쌍한 것들.」

샤논은 트랩에 갇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도전자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가 불의 날개를 펼치며 여유롭게 통과하는 모습을 어찌나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지.

오히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샤논이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개중 상당수는 아예 리타이어를 했을 것 같았다. 그들로서는 연우가 자신들과 같은 도전자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컸으니까. 탑에는 저런 괴물들밖에 없냐며 자책을 하겠지.

스테이지를 박살 내서 관리국을 들썩이게 만들던 것보다, 초보자들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준 게 더 나쁘다 싶었다.

“그러라고 한 거야.”

「왜?」

“어차피 그들 중 대다수는 탑에 들어와서도 좌절밖에 겪지 않을 테니까.”

「…….」

어쩐지 샤논도 거기에 대해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한때는 랭커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해야만 했던, 그래서 50층 이상을 통과하지 못하고 낙오해야만 했던 신세였으니까.

“거기서 그칠 놈들이었다면, 그냥 마음 접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게 훨씬 나아.”

「쩝.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딱히 할 말이 없네.」

사실 샤논이 우스갯소리로 ‘순수한’ 초보자들이라고 했다지만, 그들 중에 정말 순수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탑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갖춘 것부터가 이미 각 세계와 행성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는 뜻일 테니까.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순수한 구도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찾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탑을 이대로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연우로서는 가장 먼저 튜토리얼을 폐쇄시킬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니 도전자들 중 상당수가 의욕이 꺾였다면, 그들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한편으로, 단순히 자신의 실력만 뽐낸 건 아니었다.

‘괜찮은 자질을 가진 이들도 보였지.’

개중에는 아르티야로 데리고 와도 괜찮겠다 싶은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이미 리스트에다가 그들의 용모파기도 따로 담아 도일에게 전달해 놓은 상태였다. 아마 그들이 튜토리얼을 통과하는 대로 포섭하러 움직일 터였다.

「그래도 간만에 튜토리얼을 지나다 보니 아주 재미있었다. 어렸을 때로 되돌아온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들었어.」

어느새 연우 옆으로 아지랑이가 살짝 흔들리더니 라나가 나타났다. 기다란 창을 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살아생전에 푸른 장미로서 대선단(大船團)을 이끌었던 그녀였지만, 언제부턴가 쫓기듯이 살아와 여유로움을 느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사자 소환이 이뤄지고 난 뒤부터는 정우에 대한 걱정으로 날밤을 지새웠으니 더더욱 마음이 조급하던 차였다.

그러다 어린 시절을 되새길 수 있었으니 기분 전환에 좋았던 것이다.

연우는 그런 라나를 따라서 살짝 웃다가, 문득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흡혈군주는 어디로 간 거지?’

사실 포탈을 통과했을 때부터 찾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척이 바깥 영역 쪽으로 나 있어서 일단 통과했다지만, 당연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질 않으니 당혹스러웠다.

페렌츠 백작의 소재지도 듣지 않고, 라나도 두고 이렇게 훌쩍 떠날 사람이 아닐 텐데?

그때.

『날 찾나?』

연우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뭘 하는 게야? 눈이라도 벤 것이냐?』

“어디에 계신 겁니까?”

연우는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흡혈군주가 보이질 않자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분명히 목소리는 지척에서 들리는데, 존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은신술이라도 쓰는 건가 싶어 용신안을 활짝 열었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전혀 없었다.

『아둔한 것. 아래를 봐라!』

‘아래?’

역시나 밑을 봤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그저 아공간에서 꺼내 혁대 뒤쪽으로 걸어 뒀던 비그리드와 마장대검, 크라슈나의 단검이 전부일 뿐.

그러다 갑자기 비그리드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웅, 우웅-

『무엇을 그리 멀뚱하게 서 있는 것이냐?』

순간,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카인,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라나도 헛웃음을 흘리면서 비그리드를 보았다. 연우가 비그리드를 혁대에서 뽑아 올리자, 순간 떨림이 더 심해지면서 그 위로 시커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츠츠-

아지랑이는 이리저리 뭉치면서 뱁새만 한 크기의 페어리가 되었다. 크기가 아주 작아지면서 품고 있던 기운도 너무 작아져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차갑고 흉악한 눈빛은 여전했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겁니까?”

『왜일 것 같으냐?』

“……올포원 때문입니까?”

『흥! 아주 짜증 나고, 무례한 놈이지.』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아주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흡혈군주는 이미 마해에서 무한투를 거쳐 탈각과 초월을 이룬 몸. 문제는 그런 상태로 스테이지로 올라올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올포원의 제재 때문이었다.

이미 연우도 죽음의 왕좌를 계승하면서 올포원과 마주친 적이 있지 않던가.

다행히 녀석을 여러 창조신과 태고신들에게 던지며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녀석은 만약 연우가 탈각이나 초월을 이룬다면 즉시 나설 놈이었다. 지금은 기준점에서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기에 더 이상 제재를 하지 않을 뿐이었다.

반면에 흡혈군주는 달랐다.

그녀는 이미 웬만한 대신격들과도 견줄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바. 자연스레 올포원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동안 가면을 쓰고서 정체를 숨겼던 것도, 올포원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서 관리국에 잠시 의탁하고 있었겠지만.

그 순간.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을 예의주시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찾고자 합니다.]

연우는 하늘을 꿰뚫으면서 이곳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여느 신, 악마들 따위와는 전혀 다른 시선. 의욕이나 감정 따윈 전혀 없는 무심(無心)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올포원이었다. 〈천리안〉을 사용해 이곳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새 뭔가를 느꼈던 걸까?

흡혈군주도 그것을 느꼈는지 짜증으로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올포원이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꿈쩍도 않았다.

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한참 동안 흐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그 시선은 겨우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

거칠게 숨을 내뱉는 흡혈군주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단단히 섞였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놈이야. 하여간 마해를 나온 이상, 잠시간 여기에 머무르고 있어야겠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그리드는 수많은 영웅들의 사념이 담겨 있는 성검. 사실상 따지고 보면 영체(靈體)로 환원한 존재가 머물기에 이보다 안락한 곳이 있을 수 없었다.

비록 악역을 구축했다는 전승 있어 과연 흡혈군주에게 괜찮을까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더 편해 보였다.

‘나로서는 차라리 잘되었어. 당분간 비그리드의 전력(戰力)도 상승할 테니. 흡혈군주가 오랫동안 머물수록 더 좋고.’

그녀의 사념이 깊게 배일수록 비그리드의 봉인된 전승도 더 많이 깨울 수 있을 테니.

다만, 흡혈군주가 함께하는 동안에는 올포원이 언제 다시 이쪽으로 관심을 둘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긴 했다.

그래도 다행히 튜토리얼 스테이지도 히든 스테이지라면 히든 스테이인지라, 올포원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더라도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흡혈군주도 거기까지 계산을 하고 한 행동인듯싶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네가 원하던 대로 튜토리얼에 도착하였다. 짐은 약속대로 최선을 다해 신의를 지켰음이니.』

흡혈군주가 팔짱을 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약속대로 정산을 할 차례. 연우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너무 어린 시절에 헤어져야만 했기에, 어머니보다도 더 일찍 곁을 떠났기에,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의 소재지. 그분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그러니 묻겠다. 백작은 어디에 계신가?』

연우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77층입니다.”

『뭐?』

흡혈군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라나도 무슨 소리냐며 연우를 돌아봤다.

“부군께서는 지금 77층, 올포원에 묶여 계십니다.”

『……!』

「……!」

* * *

챙그랑-

헉. 헉. 뜨거운 단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지던 차가운 탄피 소리.

그리고 그보다 훨씬 싸늘하던 눈빛과 목소리.

-계산은 여기까지다, 장웨이.

“……!”

장웨이는 눈을 번쩍 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꿈. 하지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았던 꿈이 그를 강제로 세상 밖으로 끄집어 올리고 말았다.

“꺄하하! 일어났다! 일어났어!”

그러다 장웨이는 자신을 보면서 박수를 치며 낄낄 웃어 대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붕대로 온몸을 똘똘 두르고 있어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놈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목소리마저 여러 개가 겹쳐져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장웨이의 머릿속으로 녀석과 비슷한 용모파기를 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페이스리스(Faceless).

얼굴을 가지지 않은 슈퍼 루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간에서 종적을 감췄던 자.

자신과는 분명 접점이 없던 놈이다. 그런데 녀석이 왜 자신의 옆에 있는 거지?

장웨이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물리려 했다. 탑에 들어와 궁사가 된 이후로 몸에 밴 습관이었다. 상대와 일정한 간격을 벌리지 않으면 승기를 잡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목소리에 장웨이는 몸이 바짝 굳었다. 어느 틈엔가 붕대가 그의 사지를 묶고, 빳빳하게 일어난 끄트머리가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꿰뚫을 태세였다.

방금 전까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마치 한순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그 순간, 장웨이는 붕대 사이로 비치는 녀석의 눈동자 너머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종류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본래 궁사란 먼 거리에서 전장을 굽어보는 까닭에 뛰어난 눈썰미를 지녀야만 한다. 장웨이는 궁사 중에서도 최고였던 이예의 사도이기에 상대가 가진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페이스리스는 수많은 존재들을 강제로 욱여넣은 괴물이었다. 수백 수천 개도 넘는 영혼들이 난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을 직시한 순간, 장웨이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야만 했다.

“오랜만일세. 그렇지 않은가?”

착 가라앉은 중후한 목소리. 페이스리스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장웨이는 분명 처음 듣는 육성이었지만, 한때 어기전성으로 숱하게 듣던 것이기도 했다. 청화도의 주인, 검무신.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검무신은 분명 여름여왕과의 싸움에서 그에게 뒤통수를 맞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에게 내쫓겨, 장웨이는 그동안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이야. 이미 그때의 힘도 되찾은 듯 보였다. 거기다 선천적으로 말 못하는 벙어리였던 그는 자신의 장애마저 극복한 듯 보였다. 어쩌면 과거,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어쩌다 보니. 아주 운이 좋았지. 그리고 또 운이 좋아서 그대를 이리 구할 수 있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검무신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호탕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단단한 기백이 물씬 풍겼다.

“……설마, 플랑이냐?”

“당연.”

“말도 안 되는……!”

플랑. 검무신과 함께 청화도를 일궜던 창무신. 무왕의 동생이기도 했던 자도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 그로서는 도무지 이런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페이스리스는 다시 검무신으로 되돌아와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온갖 해괴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탑일진대,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한들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

장웨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자신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원래대로라면 싸늘한 창고에서 다 죽어 가던 운명이었던 것을, 우연찮게 되살아나서 이런 마법 같은 힘까지 지니게 되었으니까.

더구나 누이의 원수였던 대장까지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일을 도모하기도 전에 이상한 놈에게 걸려 이런 꼬락서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날 어쩔 생각이지?”

장웨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눈을 떴을 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지 오래였다. 청화도 몰락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었으니까. 이들에게 있어 자신은 가장 큰 원수였다. 이렇게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다만, 원통한 것이 있다면 연우를 발견하고도,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 과연 저쪽으로 가게 되면 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그게 의문이었다.

“하하.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보군.”

그런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눈을 뜨니, 페이스리스가 차갑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만하면서도 독선적인 눈빛. 청화도를 이끌 당시, 검무신이 항상 하던 눈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난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난, 아니, ‘우리’는 너희처럼 살생을 저지르거나 그러지 않는다.”

순간, 그 눈이 스산한 빛을 토해냈다.

입술 끝이 살짝 비틀렸다.

“‘함께’가 될 뿐이지.”

“……!”

“그리고 그대는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고.”

“…….”

장웨이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페이스리스가 말하는 ‘우리(We)’. 하지만 어째서 그의 귀에는 ‘우리(Cage)’라고 들리는 것일까? 수많은 짐승들을 가둬 사육하는 우리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그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뭐지?”

“보아하니 그대는 영왕에게 원한이 있는 것 같던데. 맞는가?”

“어떻게 그…….”

장웨이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곧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공허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구출할 정도였다면, 이미 페이스리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연우의 뒤를 밟았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연우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어떤 사연이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겠지.

“한데, 때마침 우리도 영왕에게 깊은 유감이 있는지라. 해서 같이 손을 잡았으면 한다. 비록 도중에 뜻이 갈렸었다고는 하나,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그대는 충분히 실력이 뛰어났었으니. 아주 큰 도움이 될 테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자를 바로 칠 생각은 없다. 이미 아르티야라는 철옹성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그의 소재지도 수수께끼이니 섣불리 접근하기가 힘들지.”

“그래서?”

“해서 우리는 그자의 주변부부터 차근차근히 제거해 나갈 생각이다. 그자가 그러했듯,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변부를 조금씩 헐어 가다가 단숨에 목을 치는 것이지. 그래야 그자도 소중한 것을 잃는 아픔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나? 해서 우리는 먼저.”

순간, 페이스리스의 두 눈이 시푸른 광망을 터뜨렸다.

“무왕을 암살할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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