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캬사의 기록 (4)
장웨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었다.
누구를 암살해?
무왕을?
“파하하!”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들으면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법.
장웨이가 딱 그랬다. 무왕을 죽이겠다는 말은 그만큼 그에게 황당함을 넘어선 말이었다.
무왕.
그는 말이 좋아 ‘왕’이라 불릴 뿐이지, 애당초 다른 왕 급의 인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젊은 시절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실력으로 천 년을 넘게 탑을 지배하다시피 하던 여름여왕과 대척점을 이루더니, 끝내는 그녀를 꺾어 제왕에 올라섰던 이가 아닌가.
탈각과 초월을 이루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지닌 바 실력만 따진다면 드높은 초월자과도 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은 평가를 받는 존재였다.
만약 이 시대에 올포원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유일하게 그만이 가능할 거란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특히 장웨이는 외뿔부족원을 한 명 건드렸다가, 무왕에게 집요한 추적까지 당해 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무왕이 가진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아홉 왕들이 힘을 합친다 한들, 과연 그의 발치에 다다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거기까지 어떻게 닿느냐도 문제였다.
최강의 일족으로 꼽히는 외뿔부족은 어떻게 뚫을 것이며, 가진바 실력만 따진다면 무왕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대장로, 핏빛 현자는 어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그 뒤에는 이제 최강의 클랜으로 불린다는 아르티야와 영왕까지 있었다.
그 외에 무왕이 곳곳에 뿌려둔 씨앗들만 하더라도 각지에서 무럭무럭 자라 그를 둘러싸는 덤불과 숲이 되었을 테니.
모르긴 몰라도, 무왕에게 도전하려면 탑 전체와 싸워 이긴 후에나 가능할 터였다.
그러니 장웨이가 봤을 때, 무왕을 상대하겠다는 말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무왕은 당신의 스승이지 않았던가? 허튼소리를 잘도 내뱉는군.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내가 했을 테지.”
장웨이의 힐난에도, 페이스리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눈꼬리를 얇게 휘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하려는 건 암살이라고.”
장웨이는 그제야 페이스리스가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굳혔다. 검무신이나 되는 작자가 작심한 일이라면, 계획이 웬만큼 진행된 것이 아니고서야 절대 입 밖으로 꺼낸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은 그 안에서 필요한 말이 되어 움직이겠지.
하지만.
‘가능하다면…….’
장웨이는 그게 만약 이뤄진다면 연우에게 큰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이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철면피가, 과연 제 스승이 죽고 난 뒤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역시나 울지 않을까? 아니면……?
‘게다가 무왕을 정말 암살할 수 있다면, 외뿔부족이 있는 마을을 뚫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렇다면 그 안에 숨겨 둔 뭔가도 찾을 수 있을 테지.’
이미 장웨이는 연우의 뒤를 밟으면서 외뿔부족에 그가 소중히 여기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아 뒀던 상태.
그게 사람인지, 아니면 물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헤븐윙과 관련된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걸 망가뜨리기만 해도 연우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그가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어떻게?”
페이스리스는 장웨이가 자신의 말에 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가에 미소를 떴다.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은 것이다. 만약 계획만 그럴듯하다면, 장웨이는 제 안위 따윈 돌보지 않는 충실한 말이 되어 움직여 주리라. 그가 지난 원한을 접으면서까지 장웨이를 구출한 이유였다.
“일단 우리와 뜻을 함께한 동지들부터 보여 주도록 하지.”
페이스리스는 한 발 뒤로 슬쩍 물러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실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의 얼굴을 본 순간, 장웨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흑태자……?”
아홉 왕 중 가장 베일에 가려져 있고, 폭력적이라는 다우드 형제단의 수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 * *
『허튼소리 마라!』
흡혈군주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그녀를 따라 기세가 휘몰아치면서 검은 아지랑이가 뭉쳤다. 흡령마가 나타나 여차하면 연우를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거렸다.
쿠쿠쿠!
그럴수록, 튜토리얼 스테이지도 거칠게 요동쳤다. 무시무시하고 흉포한 것들이 날뛰는 마해와 다르게, 이곳은 노비스들을 위한 곳. 단지 격을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스테이지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E구획에 넓게 퍼져 있던 몬스터들이 흡혈군주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죄다 게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감지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다시 당신을 예의주시합니다.]
「어, 어머니!」
라나는 다시 이곳으로 다가오는 올포원의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흡혈군주를 뜯어말렸다. 자칫 녀석이 이곳으로 찾아올 빌미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흡혈군주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불타는 눈동자가 연우를 직시했다. 그녀의 노여움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이유야 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연우는 태연했다. 오히려 이유는 내가 아닌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투. 설마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하는 힐난도 담겨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태 송곳처럼 뾰족하던 흡혈군주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설마……?』
“예. 맞습니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을 구하려다 그리되신 겁니다.”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카인? 제대로 설명을 해 줘!」
라나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리는 흡혈군주를 받는 한편, 다급한 목소리로 연우를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 흡혈군주께서 탈각을 이루기 전에 올포원에게 도전하였다가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으셨지요.”
「아.」
라나는 연우가 하려는 말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흡혈귀들의 왕, 흡혈군주가 죽었다고 알려졌던 대사건.
당시 탑을 통틀어 여름여왕 외에 그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에게 남아 있는 곳은 이제 77층밖에 없었다. 그곳을 통과하여 플레이어 중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탈각과 초월을 이루리라. 그녀는 그렇게 다짐하고, 자신만만하게 올포원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
흡혈군주는 올포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당초 어둠을 갖고 있던 그녀는 태양신의 이름을 가진 올포원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녀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타 클랜들이 소식을 듣고 바로 추적을 시작했단 점이었다.
갑작스러운 급습에 흡혈귀는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고, 흡혈군주는 튜토리얼 스테이지까지 내쫓겨야만 했다.
“실제와 다르게 당시 흡혈군주께서는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눈을 감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추격자들이 그만한 부상을 입은 군주가 생존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여긴 탓이었죠. 그렇다면 군주와 각별한 관계였던 분들은 어떻게 나와야 했을까요?”
『그…… 만.』
흡혈군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연우의 말허리를 자르고자 했지만, 연우는 여전히 라나의 눈을 보고 있었다.
“군주님을 구하러 가거나, 혹은 쫓는 이들의 뒤를 치려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었던 페렌츠 백작은 아예 사태의 원흉이었던 올포원을 잡아 눈길을 돌리려 했었지요.”
『그만하라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구금(均禁)으로 끝났습니다.”
『그만두래도!』
쾅!
흡혈군주가 비명을 질렀다. 흡령마가 사납게 날뛰면서 연우를 강하게 때렸다. 하지만 망자의 벽이 일어나 흡령마를 튕겨 냈고, 대신에 주변 일대의 대지가 그대로 쓸려나갔다.
쩌거걱. 바닥을 따라 엄청난 균열이 저 멀리 있는 숲 지대까지 퍼져 나갔다.
연우는 자신을 죽일 듯이 살벌한 기세로 노려보는 흡혈군주를 보면서, 라나에게 하던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올포원도 흡혈군주를 잡지 못하였기에, 언젠가 군주가 재도전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인질을 잡아 둔 것입니다.”
『네놈, 기어코……!』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라나, 원래 당신을 위해 정우가 겨우 알아낸 것입니다.”
「……!」
라나 사부에게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까? 분명 듣고 나면 상심이 크실 텐데. 겉보기에는 항상 호탕해 보이셔도, 속은 여렸던 분이셨으니.
그리고. 올포원의 이런 결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족과 연인들이 서로 이별을 해야만 했었을까?
피해자는 라나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올포원이 수천 년 동안 탑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에게 도전했던 인물이 어디 한두 명이었을까? 흡혈군주, 파우스트, 드 로이, 여름여왕, 무왕…… 연우가 알고 있는 인원만 해도 꽤 많았다.
그들 중 대다수가 올포원의 손에 제거되었다지만, 그렇지 않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이들은 강제로 올포원이 던진 낚싯대를 물어야만 했다.
라나는 침묵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연우는 그런 라나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연인, 제자, 부모까지. 탑에서 많은 걸 이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상실해야만 했던 그녀의 상처는. 그로서도 짐작하기 힘들었으니.
흡혈군주는 그런 연우를 잔뜩 노려봤다.
『너는 참으로 간악한 놈이로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짐을 끌어들여, 네놈의 계획을 위한 말로 쓸 참이었더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이……!』
흡혈군주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흡령마를 확 키워서 연우를 잡아먹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올포원의 시선은 더 노골적으로 변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연우는 흡혈군주가 완전히 자신에게로 넘어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겨우 찾아낸 흡혈군주를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어. 어떻게든 전력을 갖춰 놔야 하는 상황에서, 흡혈군주는 반드시 코를 꿰어 놔야만 한다.’
흡혈군주를 권속으로 둘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힘든 일. 그렇다고 군주까지 된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자신이 휘둘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코를 꿰어 자신의 손에 넣어 둬야만 했다.
흡혈군주는 그런 연우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77층에 도전하기도 전에 당하기 십상.
하지만 연우와 함께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녀가 보기에도, 현재 올포원에게 도전할 만한 가장 가까운 인물은 연우였으니.
무왕이 있다지만, 그녀는 그가 꺼려졌다. 애당초 외뿔부족과 흡혈귀는 그리 상성이 잘 맞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연우는 칠흑의 후예이니 그녀와도 합이 잘 맞았다.
결국 흡혈군주는 자신이 사슬이 채워진 맹수 꼴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겨우 분노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 말, 맹세할 수 있느냐?』
페렌츠 백작의 소재지가 거짓이 아니냐는 말.
“원하신다면 마나의 맹세라도 해 드리지요.”
『……그럼 충분하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겠다.』
흡혈군주는 아주 쪼그마하지만, 사위를 짓누르는 위엄을 감추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짐을 종마처럼 부려 먹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중요할 터. 칠흑의 후예라 하지만, 짐은 그대를 잘 모른다. 그대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연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탑을 부수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연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흉흉한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올포원을 사냥해야겠죠.”
『……!』
“대답은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흡혈군주는 가만히 연우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백작님을 구할 때까지, 그대의 개가 되어 주마. 단, 빈틈을 보이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짐의 이빨은 언제든지 그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음이니.』
[플레이어 ‘에르체페트 바토리’와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동맹 관계가 파괴될 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 *
연우는 흡혈군주와 정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오크들의 부락이 있는 숲 지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아카샤의 뱀을 신처럼 추앙했지. 애당초 부활 방법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는 건, 그만큼 아카샤의 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뜻. 다른 뭔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태껏 연우가 느낀 것이 있다면, 탑 내의 정보들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여도 알게 모르게 다 씨줄과 날줄처럼 다 촘촘하게 엮여 있다는 점이었다.
아카샤의 뱀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 연우는 아마도 그들에게 전승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샤 뱀의 재생 의식을 관장했던 오크 샤먼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쐐애액-
기척을 숨겨서 그런지, 몬스터들은 전혀 아무도 연우가 움직이는 걸 감지하지 못했다. 다행히 노비스들도 아직 E구획에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상태. 방해를 받을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오크 부락에 도착했을 때.
‘오크 샤먼을 일일이 골라내는 것도 일이니.’
연우는 여태껏 감춰 뒀던 격을 개방했다. 오크 샤먼뿐만 아니라, 모든 오크들의 영혼을 쥐어짜 정보를 취합해 볼 생각이었다.
[죽음이 오크들과 함께합니다.]
음습한 그림자가 단번에 숲 지대 전체로 퍼져 나가고, 사신의 손길처럼 은밀하게 그들의 목숨을 송두리째 앗아 갔다.
수만 마리 오크들의 우렁찬 목소리로 가득했던 오크 부락은 금세 적막이 내려앉았다.
* * *
[제1천의 영]
츠츠츠-
칠흑왕의 권능에 따라, 오크 샤먼을 비롯한 수만 마리에 달하는 여러 오크들의 영혼을 비튼 결과. 연우는 뜻하지 않게 가장 눈에 띄는 전승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태초에 어둠만이 있어 ‘꿈’의 굴레가 무한하게 굴렀다.
전승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꿈?’
연우는 그 단어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동생이 받았던 특전, ‘꿈을 그리는’.
그게 갑자기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