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86화 (486/862)

11화. 아카샤의 기록 (5)

동생은 어느 날 ‘미래의 초대장’이라는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받고, 탑에 입장하였다.

본래 탑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은 각 행성과 세계에서 뛰어난 경지를 이룬 이들에 한한 것이지만, 간혹 재능이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자들에게도 종종 초대장이 보내지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그런 이들은 대개 재능만 갖추고 있을 뿐, 실력이 미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형평성을 위해 따로 특전이 주어지는 편이었다.

당시 동생이 처음에 받았던 특전은 ‘꿈을 꿈꾸는’.

원할 때마다 하루에 2번씩 탑과 지구를 오고 갈 수 있는 특전이었다. 지구에서의 생활과 탑에서의 활동을 나눠야만 했던 그의 사정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탑에만 집중해도 튜토리얼을 겨우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상황에서, 동생은 결국 특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에 새롭게 얻은 특전이 바로 ‘꿈을 그리는’이었다.

[특전: 꿈을 그리는]

플레이어가 원하는 세상을 꿈에서 그릴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으며, 그곳에서 얻은 해답은 현실에서도 얻을 수 있다.

당시 동생은 이 특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날개가 전부 꺾이고, 동료들이 모두 등졌을 무렵이었다. 갖고 있던 영혼석에다 자신의 사념을 새겨 넣음으로써 특전을 제대로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네메시스가 부활하기 전에 머물던 곳도 공허, 꿈속 세계였다고 했었고.’

네메시스가 가진 기예들은 대개 그가 머물던 곳, 공허의 성질을 끌어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위적으로 공허를 퍼뜨려 적을 환몽의 세계로 빠뜨리는 것이다.

녀석이 원래 동생의 환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애당초 정우는 ‘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거야. 어쩌면 그 전부터 훨씬…….’

고룡 칼라투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동생의 영혼은 원래 있어야 할 곳, 칠흑으로 되돌아갔노라고. 만약 ‘죽음’이 칠흑에서 빚어졌듯이, ‘꿈’도 칠흑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연우는 하늘을 응시하였고.

[헬이 묘한 미소를 띱니다.]

[태산부군이 대답하기를 거부합니다.]

[크시티가르바가 당신의 예상에 혀를 찹니다.]

[아이쉬마-다르바가 자신들은 그것에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

[모든 죽음의 신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당신의 의문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역시나.’

연우는 미적지근한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반응을 보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칠흑의 갈래일 뿐인 죽음을 쫓는 저들에게, 다른 갈래를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일 테지. 또 다른 갈래였던 타계의 신들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표했던 저들이 아니었던가.

만약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얼추 조각은 맞춰지는 셈이었다.

‘혼돈, 무질서, 죽음, 어둠, 꿈…… 이 모든 게 칠흑에서 파생되었다.’

쌍둥이는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육체를 지니고, 영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꿈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동생의 영혼이 칠흑에게로 귀의했듯, 자신이 칠흑의 후예가 된 것도 결국 필연적인 운명이었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칠흑왕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이지?’

연우의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그 뒤에 이어지는 전승을 계속 살폈다.

전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크 샤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예언시(豫言詩)의 일종이었다.

태초 어둠만 있어 ‘꿈’이 무한 굴레로 굴렀다……

……그러다 어느 날 말도 없이 빛이 피어나고, 꿈이 드디어 깨어났다. 어둠은 놓쳐 버린 꿈을 되찾기 위해 빛과 다투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갖가지 것들이 흘러나왔다. 온갖 죽음과 병마와 우울과 지옥과 온갖 혼란한 것들이 나와 도처에 굴러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어둠에서 잉태된 것들이 생각했다. 자신들의 아버지는 두렵고도 너무 두려운 존재라, 언제 아버지에게 다시 잡아먹힐지 모른다. 그렇다면 먹히기 전에 아버지를 가둬야 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위대하고도 위대하지만, 반대로 아둔하고도 아둔한 존재이신지라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모르신다. 그렇다면 이 아래로 내려 평생토록 잠만 자게 만들어 드리자. 그 속에서 원하시던 꿈을 좇게 해 드리자. 그리하여 끝내 끄집어 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잠은 영원이 이어질 수 없는 법이라, 그 잠 속에 꿈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때 다시 눈을 뜨게 되시리라. 그리하여 다시 어둠이 세상에 내려앉을 때, 껍질은 깨어지고 세상은 다시 태초로 되돌아가리라……

‘꿈, 어둠, 빛, 잠…….’

연우는 여기서 말하는 어둠이 칠흑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식들에게 끄집어 내려진다는 것, 그의 백성들에게 배신당하여 공허에 유폐된다는 내용이 칠흑왕의 유산에 나와 있는 설명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빛은 무엇일까?

‘칠흑왕을 다치게 한 존재…… 혹은 거꾸러뜨릴 수 있게 한 존재.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대지모신처럼 태초신일 게 분명한 칠흑왕과 맞설 수 있는 존재. 그만한 존재라면 역시나 격이 엄청나게 높은 태초신 혹은 창조신 반열일 게 분명하다.

당연히 엄청나게 유명한 신화를 지녔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칠흑왕이 누군지 여태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대적했단 존재도 왜 이리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물론, 빛을 신위로 둔 존재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가까이는 올림포스의 아폴론이나 프로메테우스가 있었고, 아스가르드에는 발드르, 데바에는 인드라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칠흑왕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기엔 많은 점이 부족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방향으로 얼핏 떠오르는 존재도 있었다.

‘천마(天魔)?’

마군이 신봉하는 천마는 스스로 마(魔)가 되길 자청하며 모든 어둠과 무지와 몽매를 내쫓고, 세상에 빛을 가져다준 존재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들 교단 내에서 달리 불리는 명칭은 명왕(明王). 해와 달(日月)을 불러와 합쳤다(日+月=明)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천마는 탑 내에서 유일하게 신도 악마도 아닌, 전혀 다르게 분류되는 초월적인 존재. 그렇다면 여기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연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었다. 만약 그렇게 뛰어난 존재였다면 어째서 탑에 갇힌 것이며, 왜 여태 깊은 잠에 빠져 깨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천마라는 존재는 단순히 마군에서만 신봉하는 존재.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비에 가까운 존재일 가능성이 컸다. 애당초 빛과 관련된 존재라면 어째서 스스로 ‘마’라고 자칭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은 대답은 하나.

‘탑?’

탑의 정확한 이름은 오벨리스크. 태양신의 사탑이란 뜻이었다. 태양은 달리 빛을 의미하기도 하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도 가능했다.

‘탑이란 것이 만약 칠흑왕을 가두기 위해, 혹은, 누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타계의 신들이 칠흑왕의 흔적을 탑 내에서 찾는 것이나,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칠흑왕의 유지를 떠받들려 하는 것들, 그러면서도 탑의 이름이 저러한 것도 얼추 맞아떨어졌다.

‘어렵군.’

하지만 이런 것도 어디까지나 그가 던지는 추측일 뿐. 정답은 아니었다. 탑의 탄생 비밀과 칠흑왕의 정체에 대한 단서는 여전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나온 것이 없으니.

어쩌면 탑의 사도라 불리는 올포원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지막 문구도 조금 걸리기도 하고.’

어둠이 세상에 내려앉을 때, 껍질은 깨어지고 세상은 다시 태초로 되돌아갈 것이란 말.

이를테면, 그것은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다. 칠흑왕이 공허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올 것이란.

‘그럼 아카샤의 뱀이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제 주인이 내려앉을 껍질을 찾고 있는 건가?’

연우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칠흑왕의 형틀을 보았다. 절망, 비탄, 격노. 이 중 절망은 처음 아카샤의 뱀을 죽이고 나서 얻었던 보상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제 주인이 깨어날 육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마성, 이놈도 툭하면 나더러 무르익으라고 번번이 말해 댔었고.’

연우는 여전히 죄악석에서 소리 죽여 웃고 있을 마성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의문과 의심만 잔뜩 진 채,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린 것 없는 상황인 셈.

‘그래도 이만하면 아주 좋은 성과야.’

모든 오크들의 무의식까지 싹 뒤진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쉭-

연우는 아카샤의 뱀이 있을 장소로 이동했다.

모든 것이 죽어 사라진 오크 부락은 조용하기만 했다.

* * *

카아아!

“마, 막아!”

아카샤의 뱀이 있는 둥지에는 이미 선객들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수십 미터는 될 몸집을 크게 세운 채, 걸리적거리는 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흉성을 자랑하는 녀석을 상대로 선객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으아악!”

“헤겔!”

“은율, 뒤를 조심해! 젠장!”

“후하! 가지 마! 자리를 지…… 아아악!”

대략 십여 명쯤 되는 노비스들은 아카샤의 뱀이 휘두르는 꼬리에 죄다 피떡이 되어 날아가거나, 통째로 잡아먹혔다. 원래는 오십 명쯤 되는 대인원이었던 것 같지만, 아카샤의 뱀에 대한 전력을 잘못 판단한 대가였다.

‘원래대로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전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위치를 잘못 잡았어.’

연우는 근처 절벽에 앉아 노비스들을 지켜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먹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덩치를 키우는 아카샤의 뱀을 리자드맨 부락이 있는 늪지대로 끌어와 상대할 생각을 할 줄이야.

저들 딴에는 머리를 쓴답시고, 리자드맨들과 겨루게 해 힘을 최대한 빼놓은 다음 아카샤의 뱀을 사냥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지만.

도리어 리자드맨을 배불리 먹고 잔뜩 덩치를 키운 아카샤의 뱀은 이미 노비스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사냥할 몬스터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대가리부터 밀어 넣는다…… 죽어도 할 말이 없군.’

연우는 그런 노비스들을 보면서 딱히 구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기초적인 전략도 세우지 못하는 정신머리로 탑에 들어가 봤자, 1층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으니.

더구나 연우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카샤 뱀의 덩치를 언제 불리나 싶었는데. 저 녀석들이 대신해 준 셈이니.’

애당초 연우는 아카샤의 뱀을 최대로 키울 생각이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망가뜨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아카샤의 뱀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던 차에 손 쓸 일이 줄어든 셈이었으니 기뻤던 것이다.

“악티, 마루! 조금만 더 버텨 줘! 이대로 뒤만 돌아가면……!”

그때, 탱커 역할을 하던 두 노비스가 타워 실드를 곧추세우며 이를 악물었다. 바로 뒤에서 버퍼가 젖 먹던 힘을 다해 힘을 실어 주는 게 보였다. 그러다 쾅 하고 아카샤의 뱀과 부딪쳤다. 두 탱커가 처음으로 아카샤의 뱀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파티를 지휘하던 리더가 빠르게 아카샤 뱀의 머리 뒤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한 손에는 제법 찬란한 빛을 토해 내는 검이 들려 있었다.

노비스치고는 빠른 판단력과 결단력. 아카샤 뱀의 약점이 뒷덜미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위험했다.

더구나 아카샤의 뱀도 계속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 자칫 잘못하면 사냥될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공간에 넣어 뒀던 오크 로드의 사체를 아카샤의 뱀 머리 위로 던져 주었다.

그러자 아카샤의 뱀이 본능적으로 오크 로드의 사체를 꿀꺽 삼키는 것과 동시에, 비늘을 따라 검은 광채가 터졌고.

까아앙!

역린을 노리던 검은 단단해진 경도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리더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아, 안 돼……!”

“삼하아아!”

두 탱커가 리더에게 위험하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아카샤의 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리더를 집어삼킨 뒤였다.

와그작!

“아아……!”

“말도 안 돼……!”

“엘퀴까지……!”

아카샤의 뱀은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나머지 노비스들을 죄다 뭉개 버렸다. 그리고 대가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승리를 자축했다.

카아아악!

연우는 그런 녀석의 머리 위에다 아공간을 활짝 열었다. 수만 마리에 달하는 오크 사체들이 눈다발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우걱-

우걱!

아카샤의 뱀은 어디서 이렇게 많은 먹이들이 떨어졌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곧 신경 쓰지 않고 포식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라.’

계속 자라고 자라게 하여 끝내 임계점에 다다르고, 마지막에는 허물을 벗게 하는 것. 그리하여 영성(靈性)을 깨우치고, 격과 자아를 되찾게 하는 것. 그것이 연우의 목표였다.

그러기만 한다면 자신의 잊힌 과거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다면 칠흑왕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겠지.

우걱우걱.

걸신들린 아귀처럼 먹어 대는 아카샤의 뱀을 보면서.

연우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거의 마왕들도 폐업해야 하는 수준 아니냐? 어휴!」

샤논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리고.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자기들보다 더 독하다며 혀를 찹니다.]

……

[대다수의 악마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자신들의 일자리가 빼앗길까 경계합니다.]

『과연. 칠흑의 후예가 될 만한 심성이로군.』

흡혈군주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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