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카샤의 기록 (7)
아카식 레코드.
전 차원과 우주,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기록한 초차원 개념의 정보 집합체. 달리 허공록(虛空錄)이라고도 불린다.
듣기로는 우주 창생의 비밀뿐만 아니라, 아주 먼 미래에 있을 종말 때의 사건들도 생생하게 기록된다는데. 당연히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추구하는 신과 악마들로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도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기도 한 장소.
혹자는 그곳이 도서관의 형태로 되어 있어, 아주 특별한 인물들만이 열람할 자격을 얻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곳이 누군가가 꾸며 낸 상상 속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모든 사건이 기록되고, 모든 운명이 거기에 다 수록된다면.
이 우주는 애당초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어머니가 병에 걸리신 것도, 거기에 대한 결과도 이미 내정되어 있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이 몸부림은 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
허구의 장소.
동생은 일기장을 통해 딱 그렇게 정의했다.
지식을 추구하는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장소일 테지만, 동생은 있더라도 반드시 없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모든 결과가 다 내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면, 인간의 삶이 아주 무용한 것이 될 테니. 모든 것이 우주의 뜻대로 움직이니, 자유 의지는 필요 없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우도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생이 아카식 레코드를 경멸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있더라도 도저히 닿을 수 없을 장소로 봤기 때문이었다.
전지가 담긴 장소라면, 거기에 다다를 자격은 최소한 개념신이나 창조신과 같은 최고위까지 올라야 겨우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할 테니까.
‘아니. 그들조차도 자격이 없을 가능성이 커. 있더라도 어느 정도 제약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대지모신과 싸울 이유도 하등 없을 테고, 각 사회들이 반목할 일도 없겠지.’
아니, 애당초 올포원에 발이 묶여 전전긍긍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보다 탑에 갇힐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결국 아카식 레코드는 허상이라고만 여태 여겼었는데.
설마 탑의 보상으로 열람 자격이 주어질 줄이야.
단 3회로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이건 연우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아주 큰 보상인 게 분명했다.
[케르눈노스가 경악합니다.]
[비마질다라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이랑진군이 당신이 받은 보상에 대해 강한 의심을 표합니다.]
[토르가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당신을 주시합니다. 자신의 권한으로 ‘아스가르드’에 안건을 제시합니다.]
……
[신의 사회, ‘딜문’이 의사회를 열어 당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에게 전할 서신을 재가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당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호의에 찬 반응을 보입니다. 동맹으로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합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당신에게 거래를 제시합니다.]
……
[아가레스의 권한으로 임시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이런 빌어먹을! 대체 너와 차정우는 무엇이기에 이런 일들을 몰고 다니는 것이냐! 가뜩이나 너에게 관심을 보이는 신과 악마들이 많아 귀찮거늘, 이제는 넘쳐 흐르겠어! 젠장!]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명심하고, 들어라. 이 일로 인해 지금 98층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제는 너에 대한 위기론도 고개를 들고 있어! 그러니 명심해라. 저들 대부분이 너에게 거래를 제시할 것이고, 그것을 너는 받……!]
[채널링으로 연결된 신과 악마들의 만장일치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임시 차단되었습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가 어딘가를 보며 거센 항의를 보냅니다.]
……
[다수의 신이 강한 열의를 보입니다. 다급하게 당신에게 제시할 거래 목록을 작성합니다.]
[소수의 신이 당신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다수의 악마가 당신과 손을 잡기를 갈망합니다.]
[소수의 악마가 이번 보상으로 인해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 궁금해합니다. 현재 집중하고 있을 일 때문에 관람하기가 어렵다며 개탄합니다.]
[우르드를 비롯한 앉은뱅이 세 여신이 말없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메시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폭주를 하다못해 채널링이 시끄럽게 요동칠 정도였다.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가 천계에 던져 준 충격이 크다는 뜻일 테지.
신과 악마들도 다다르길 바라는 이상향. 탑이라는 감옥을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찾고 싶어 했지만 닿지 못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간절해지는 곳.
그런 곳으로 가는 길이 바로 눈앞에서 열렸다. 당연히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대다수의 신과 악마들은 사회적인 규모에서 연우와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신의 사회, ‘천교’가 비밀 거래를 제안합니다.]
[신의 사회, ‘베다’가 비밀 거래를 제안합니다.]
……
아마도 연우가 가진 열람 자격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캐내고 싶은 것일 터. 그리고 그 대가는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당장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클 게 분명했다.
특히 그중 하나는 연우가 봐도 미쳤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당신에게 통천교주 직(職)을 제안합니다!]
[다수의 신들이 절교를 보며 거세게 항의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절교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뭐?’
연우는 절교의 제안에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절교에 있어 통천교주 직은 천교의 옥황상제와 동등한 자리. 즉, 최고 수장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런 곳을 일개 필멸자에게 제안할 줄이야!
제아무리 절교의 수장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다고 해도, 절대 쉽게 결정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추후 연우가 탈각과 초월을 이룰 수 있도록, 절교가 나서서 인과율을 직접 감당하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모든 신과 악마들이 그 결정에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경우는 전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가 가진 가치가 아주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아가레스가 다급하게 경고를 던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만약 여기서 거래가 조금이라도 틀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큰 적들을 여럿 만드는 셈이었으니. 한 곳과 거래를 한다고 해도, 경쟁 관계에 놓인 다른 곳들과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한 마디로.
‘계륵이라면 계륵인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대단한 패를 쥐었으나,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파멸까지도 부를 수 있는 패.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의 결정을 궁금해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의 결정을 궁금해합니다.]
그 때문인지,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연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거래를 맺자고 의견을 내비치거나, 아니면 다른 곳과 거래를 하지 말라는 등 로비를 벌이는 이가 없었다.
「이거 완전 인기 스타인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하려고, 주인?」
샤논이 질문을 던졌다.
옆에 있던 흡혈군주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에 불을 잔뜩 켜고 있었다. 그녀 역시 연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페렌츠 백작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 달라는 것이겠지.
연우가 그들을 보며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화아아!
갑자기 품에서 뭔가가 잘게 떨리더니, 붉은 광채를 뿌리면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영귀가 조만간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며 주었던 정체불명의 보상.
‘려의 조각?’
그것을 보며 연우의 눈이 커진 순간.
[아카식 레코드의 등장에 ‘려의 조각’이 반응합니다.]
[‘려의 조각’의 잠겨 있던 권한이 일부 해제되어 아카식 레코드를 다른 형태로 불러들입니다.]
[‘려의 조각’이 소멸하였습니다.]
[아카식 레코드의 접근 권한을 1회 소모합니다.]
[창공 도서관이 출현합니다.]
역시나 영귀가 언급하기도 했던 장소, 창공 도서관이 언급된 순간.
파앗!
연우는 전혀 위치를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리석 바닥을 따라 줄지어 선 어마어마한 높이와 크기의 책장들. 그 속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크고 작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비마질다라가 압도적인 광경에 넋을 잃습니다.]
[케르눈노스가 끝없는 지식의 향연에 강하게 흥분합니다.]
……
[당신과 채널링으로 연결된 모든 신들이 충격에 빠집니다.]
[당신과 채널링으로 연결된 모든 악마들이 기함을 토합니다.]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탁 하고 떠오르는 장소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도서관과는 전혀 달랐다.
둥근 돔으로 된 천장은 세상을 전부 덮을 듯했고, 수백 미터에 달하는 책장 곳곳에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더구나 층수도 대체 몇 개나 되는 건지, 각 층마다 연결된 나선형 계단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빙글빙글 돌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너머였다.
연우의 인지 영역이 겨우 다다르는 저쪽 끝, 어둠이 깔린 곳에서는 책장이 새롭게 조립되고, 빈 선반 안쪽으로 역시나 실시간으로 새롭게 글이 쓰이는 책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있었다. 계속해서 책자가 쌓이고 있는 것이다.
연우는 어째서 이곳이 창공도 서관이라 불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규모의 책자를 보유하고 있다면 ‘하늘’이라고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테니.
그리고.
이곳이라면 전 우주와 차원의 모든 정보가 기록된다고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창공 도서관이 아카식 레코드를 가리키는 이명이었구나.’
정확하게는 려의 조각이 단순한 기록 집합체인 아카식 레코드를, 연우가 편하게 열람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지만.
[지식을 좇는 신들이 강한 환희에 젖습니다.]
[탐구를 즐기는 악마들이 더 많은 지식의 세계에 탐욕을 드러냅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새로운 거래 내용을 제시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어서 당신이 자신들과 거래를 수락할 것을 종용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동맹 자격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그렇게 여러 사회들의 독촉도 심해질 무렵.
“뭐야, 이거? 어디 간만에 손님이라도 오셨나? 누가 온다는 말은 못 봤었는데?”
갑자기 위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연우는 고개를 들었다. 연우의 머리 위로 놓인 나선 계단에 서서, 난간 아래로 아래쪽을 보는 이가 있었다.
천장에서부터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 생김새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우는 그 사이로 보이는 익살맞은 웃음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어?
연우도 놀란 나머지 눈이 커졌다.
그때, 목소리의 주인이 난간을 가볍게 훌쩍 뛰어넘어 연우 앞으로 착지했다. 상당히 높은 높이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가벼워 보이는 몸놀림. 능력이 뛰어나다기보다, 이 도서관 자체가 그를 보호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순간.
[비마질다라가 신음을 토합니다.]
[케르눈노스가 믿을 수 없다며 소리를 지릅니다.]
[나타태자가 의문의 존재가 어째서 여기 있을 수 있냐며 크게 소리칩니다.]
[아몬이 분노를 터뜨립니다.]
……
[다수의 신들이 의문의 존재를 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소수의 신들이 믿을 수 없다며 줄행랑을 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의문의 존재를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혼란스러운 얼굴이 됩니다.]
[모든 죽음의 신이 조용히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뜻하지 않은 원수와의 조우에 주먹을 꽉 쥡니다.]
“이런. 소란스러운 손님들도 같이 끌고 왔네? 하여간 너네들은 어디 시장 바닥도 아니고,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한데 모여서 그렇게 잡담이나 떨고 있냐? 어휴, 그러니 발전이 없지.”
연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읽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었지만, 단풍색으로 빛나는 두 눈은 자신과 연결된 모든 신과 악마들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마치 그들을 한데 모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신과 악마들이 의문의 존재를 향해 거센 항의를……!]
“시끄러워 죽겠네. 도서관에서는 절대 정숙 모르냐? 하여간 개념 없는 것들. 잡상인은 안 받으니까 돌아가!”
“……!”
장난스럽게 딱 한마디만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연우와 연결된 모든 채널링이 그대로 두절되고 말았다.
연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재빨리 몸을 살폈지만.
“어어. 몸에는 아무 탈 없으니까 걱정 마. 그냥 단말 기능만 일시로 정지시킨 것뿐이니까. 엿보기 좋아하는 관음증 환자들까지 둘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남자는 연우를 보며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검은 후드티에 푸른 청바지, 그리고 스니커즈. 지구에서, 특히 한국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주얼한 옷차림과 말투였다. 특히 그가 쓰는 언어는 분명히 ‘한국어’였다.
그렇다는 건, 지구의 한국 사람이라는 건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창공 도서관에 아무렇지 않게 있고, 신과 악마들조차도 깔보며 비웃을 수 있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
남자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를 안 했네. 너 한국인 맞지? 간만에 고향 사람 만나니까 너무 반가워서 깜빡했어. 난 손지호라고 한다.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지?”
순간, 그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그럼 천마(天魔)라고 하면 알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