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카샤의 기록 (9)
“……!”
「……!」
「……!」
『……!』
연우를 비롯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샤논과 한령, 그리고 흡혈군주가 전부 충격에 젖은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천마는 그게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어깨만 으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이 연우를 더 강한 충격으로 몰았다.
여태 연우가 파악했던 칠흑왕은 모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경외하고, 타계의 신들이 구슬피 울며 찾아 대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대지모신과 같은 태초신으로 추정되지만, 그보다 더 지고한 것 같아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존재를, 공허에다 처박은 게 천마였다고?
연우는 순간 오크들 사이로 내려오던 전승을 다시 떠올렸다.
태초에 어둠만 있어 ‘꿈’이 무한 굴레로 굴렀다……
……그러다 어느 날 말도 없이 빛이 피어나고, 꿈이 드디어 깨어났다. 어둠은 놓쳐 버린 꿈을 되찾기 위해 빛과 다투기 시작했으니……
어둠만 있던 세상에 갑자기 피어났다는 빛. 그것이 어쩌면 천마가 아닐까 싶었던 가정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뭘 그렇게 놀란 얼굴로 쳐다봐? 아이돌 처음 보냐?”
천마는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말투며 행동, 하나같이 미후왕이 떠오르는 동작들이었다.
“뭐, 정확하게는 그 양반을 힘 빠지게 한 건 나고, 공허에다 처박은 건 밑에 있던 놈들이었지만. 그래도 다를 건 없겠지?”
“…….”
“덕분에 나도 힘이 죄다 빠져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강제 휴식기에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정신체가 창공 도서관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영지(靈知)를 좀 더 쌓을 필요가 있겠더라고.”
영지인지 뭔지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우는 머릿속에 여태껏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던 잔상이 구체적으로 확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 탑이라는 곳은……!”
“쉿.”
천마는 검지로 입을 가리며 연우의 말허리를 끊으면서 씩 웃었다.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여기까지. 이거 안 보이냐?”
천마는 자신의 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희뿌옇게나마 투명한 뭔가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디론가 이어진 새하얀 쇠사슬이었다. 색깔만 다를 뿐이지, 연우가 팔에 감고 있는 것과 똑같은 쇠사슬이었다.
“그건 무엇입니까?”
“신진철. 혹은 인과율. 이 탑에서 살아가는 모든 초월적 존재이며 필멸자들에게까지, 예외 없이 가해지는 구속구지. 단순히 시스템이라고 하면 편하려나?”
연우는 오늘 여러 차례 충격을 받았다.
신진철
인과율.
시스템.
이 세 가지가 사실은 동일어였다고?
특히 98층의 존재들을 묶는 용도로만 쓰이는 줄 알았던 인과율이 사실은 플레이어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층계를 오르고자 하는 도전자들에게 강해질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시스템. 하지만 그 시스템이 사라졌을 때, 부여되었던 힘도 전부 정지되는 것은 어찌 보면 구속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스템은 그 플레이어를 더 강하게 옭아매어 가는 셈이니.
‘약자에게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지만 그만큼 단단히 구속한다…… 그러다 초월적인 존재가 되면 완전히 묶일 수 있도록.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이들을 제어하기 위한 개 목걸이 같은 걸까?’
칠흑왕과 맞설 정도로 강했던 천마마저 구속시키는 곳이라니.
어쩌면 탑은 처음 설명하던 것과 다르게 ‘강한 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감옥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도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알아주던 강자들이었으니.
신이 될 수 있다, 강해질 수 있다는 미끼로 차원과 우주를 위협하거나, 그럴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을 한데 가둬 두기 위한 덫.
그렇다면 이런 덫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걸까?
칠흑왕과 천마를 가둬 둘 만한, 그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연우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묻고 싶었지만.
‘안 되겠지.’
연우는 말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이 역시 천마를 더 단단하게 구속할 근거가 될 테니. 천마는 그런 연우의 속을 알고 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모든 걸 알고 싶겠지만,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높이 서는 만큼 많은 것들이 보이는 법이야. 너의 위치에서 네가 볼 수 있는 것들도 적잖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것들이 너에게 보일 테니.”
천마는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칠흑왕에 대해서 찾는다는 것은…… 흠. 그렇군. 당대 칠흑의 후예는 너구나?”
연우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칠흑왕과 대적해 그를 공허에다 가둔 존재. 당연히 자신과도 적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뭘 그렇게 쫄아? 설마 내가 너 같은 애송이한테 해코지라도 할 까 봐?”
“…….”
“아서라. 그런 취미는 없으니까. 어린애를 괴롭혀도 유분수지, 그런 일을 왜 해?”
“……하지만 저로 인해 칠흑왕이 깨어난다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그 양반과 다투기는 했어도 원수이거나 한 건 아니야.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고 비실대기에 몇 대 때려 줬을 뿐이고. 깨어나려 한다면 그 역시 우주의 순리이고, 과정일 테니 나로서는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뭐, 우주 멸망이니 하는 위험도 있겠지만.”
천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난 내가 여태 이뤄 둔 세계가 그렇게 약할 거라 생각지는 않거든. 모든 것은 흐르는 순리대로.”
연우는 여전히 천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스스로 걸어온 길에 대해 깊은 자긍심을 갖고 있단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룬 것들에 무한한 자신감과 누구도 흩뜨릴 수 없을 거란 굳건한 믿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울렁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저 미소는 자기 확신에 찬 이들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연우는 언뜻 천마의 저런 모습을 닮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실종된 이후로, 마지못해서 살고, 뭔가에 쫓기듯이 급급하게 살아왔던 그가 보기에, 자신은 저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정우…… 그래. 천마는 정우와도 무척이나 닮았어.’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여전히 그런 빛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 봐. 네가 찾고 있는 것들이 있을 테니.”
연우는 천마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마가 가리킨 서고는 창공 도서관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장소였다.
만약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천마를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장소.
도서관 안에 벽으로 분리된 또 다른 방이었다.
[이곳은 1급 기밀 구역입니다.]
[이곳을 열람할 자격이 부족합니다.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
[특급 사서의 권한으로 일시 열람이 가능해졌습니다.]
[보상으로 주어진 이용권이 1회 소진됩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직 탈각과 초월을 이루지 못한 너에게는 열람 제한이 되어야 할 장소이지만.”
연우는 퀴퀴한 어둠을 내뿜거나, 황홀한 빛을 내는 등 다양한 색을 내는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영험한 신기가 느껴지는 것들.
“그래도 미래에 내 대적자(對敵者)가 될 수도 있는 녀석이 본다니까, 특별히 인심 좀 써 줬다.”
천마는 열람권이 소진될 때까지 맘껏 둘러보라며 연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방을 나섰다.
스르르-
그러자 비그리드에서 흡혈군주가 새어 나와, 서고를 빠르게 훑고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태초와 시원의 기록이 상세하게 적힌 기록원인가……? 이런 곳은 원래 창조신이나, 각 사회의 최고신 급들에게도 열람이 극히 제한되는 곳일 텐데.』
그런 곳을 이리 쉽게 열어 줘? 그것도 단순한 권한만으로? 흡혈군주는 침중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인. 천마는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인 게 틀림없다. 대지모신이나 기어 다니는 혼돈 같은 이들도 발아래로 보는…… 그런 존재가. 그러니 절대 적으로 돌리지 마라.』
샤논과 한령, 레베카도 어느새 밖으로 나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적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에게도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저 배포. 누가 오더라도 자신을 거꾸러뜨릴 수 없을 거란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들은 천마가 두려웠다.
만약 연우가 칠흑왕의 유산을 전부 수습했을 때, 어쩌면 부딪치게 될지도 모를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싶어서.
『반대로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네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모든 비밀이 바로 여기에 전부 들어 있을 테니. 그러니 지금은 다른 생각 말고, 비밀을 푸는 데만 집중하자.』
“예. 그러죠.”
연우는 권속들을 모두 부려 서고를 빠르게 훑게 했다. 이용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최대한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였다. 칠흑으로 가는 길은 분명히 그 안에 있을 터였다.
「으으. 젠장, 생전에도 보지 않던 책을 지금 와서 보게 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샤논은 책자를 하나 빼어 들면서 골치가 아프다는 듯 끙끙 앓았다. 다행히 열람권이 사용되면서 해석이 가능했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는 까만 건 먹이요 하얀 건 종이였다. 머리만 아플 뿐,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한령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책을 깊게 탐독 중이었다. 옆에는 벌써 여섯 권이나 되는 책자가 탑을 이루고 있었다.
「뭐야? 너 이런 캐릭터였어?」
「…….」
「단순히 투귀인 줄만 알았더니. 젠장. 이러면 내가 너무 비교되잖아.」
샤논이 아무리 투덜거려도, 한령은 꿈쩍도 않았다. 평상시 혼자서 사색을 많이 즐기더니, 사실은 책을 아주 좋아하는 편인 모양이었다.
샤논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쪽을 쭉 보았다.
원래 사도의 길을 걸었던 레베카는 독서에 완전히 빠진 상태였고, 흡혈군주도 진중한 얼굴로 한 장 한 장을 탐독하는 중이었다. 부는 잊힌 기록들을 볼 수 있단 사실에 아예 광기마저 드러내고 있었고, 다른 권속들이며 영괴들까지도 연우가 시키는 대로 이해도 못 하면서 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독서 삼매경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
“……뭘 보나.”
「아니. 우리 주인님이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보여서.」
첫 페이지만 읽다 말고, 눈두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다 음흉하게 웃는 샤논의 시선을 느끼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지만 샤논은 유들유들하게 웃을 뿐이었다.
연우는 쥐고 있던 책을 다시 들었다. 미간 사이로 골이 깊게 팼다.
책을 좋아하던 동생과 다르게.
애당초 그는 책과 거리가 너무 먼 사람이었다.
* * *
[시차 괴리]
연우가 막연하게 독서를 어려워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대신에 각 권속들이 무작위로 얻어 낸 정보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용의 지식 구조와 라퓨타와의 링크 덕분에 정보 처리 능력이 월등해진 연우는 빠르게 몇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먼저 칠흑왕의 정체.
대지모신이 무수히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듯, 칠흑왕도 아주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수식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거대한 틈.
혼돈의 알.
끝없는 소용돌이.
들끓는 심연 속의 그분 등, 칠흑왕을 정확하게 칭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우주와 차원이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우주와 세계를 훨씬 넘나드는 초차원적인 존재.
그래서 그는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보아 눈이 멀었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하여 아둔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신과 악마들조차도, 진리를 추구한다는 용종조차도 그를 예측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 존재하던 허무, 그 자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반면에 천마는 달랐다.
태초의 빛.
스스로 존재하는 자.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
대일여래 등등.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도 많았지만, 그만큼 정확한 명칭도 많았다.
어느 신화나 전승을 엿보아도 그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천교와 절교를 다루는 신화에서는 수인씨가 처음으로 불을 다루어 인간들에게 지식을 가져다주고, 올림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지상에 내림으로써 인간의 시대가 열린다.
대부분의 신화가 불을 밝히며 어둠을 물리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주도 아주 미약한 빛의 폭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이때 어둠은 무지와 몽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대변하고, 불은 공포를 물리치는 문명을 뜻하니.
천마는 바로 이 불꽃, 바로 빛을 뜻했다.
불이 환하게 커지면 커질수록 어둠은 사라진다. 지식과 지혜가 무지와 몽매를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여 불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니. 이때 미지의 공포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중이었다.
즉, 창세 신화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칠흑왕과 천마의 대립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정작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각각 공허와 창공 도서관에 처박혀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도 칠흑왕의 부활은 계속 시도되고 있었어.’
크로노스의 파멸과 루시엘의 타천.
한때, 천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이 사실은 전부 칠흑왕을 공허에서 깨우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하계도 마찬가지. 파우스트나 흡혈군주처럼 칠흑왕을 추종했던 존재들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칠흑왕의 힘을 좇는 비밀 집단이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그들이 있는 한, 칠흑왕의 힘은 사라지질 않겠지.
그리고.
연우도 바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칠 노릇이군.’
연우는 우주 창생의 한쪽 단면을 엿본 것 같아 간담이 서늘했다.
‘우리 형제들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휩쓸리고 있는 거지?’
연우는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쌍둥이 형제에 불과한 그들은 왜 두 우주적 존재들의 싸움터에 휘말려 이리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칠흑왕이니 천마니 하는 이들의 다툼에 개입할 의사도, 그럴 생각도 없는 것을.
동생은 그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드리고 싶었을 뿐이고, 자신은 동생의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제길.’
언뜻 머릿속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스쳐 지나갔지만.
연우는 재빨리 머리를 털었다. 이 역시 동생의 영혼을 찾으면 알 수 있을 비밀. 지금은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 외에도 궁금한 것들은 많았다.
우주 창생 이후, 신과 악마들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타계의 신과의 구분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탑은 왜 세워졌고, 초월적인 존재들이 왜 그곳에 갇혔는지. 칠흑왕을 공허로 끌어내린 존재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열람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용권을 1회 사용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당장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연우는 열람 시간이 끝나자마자, 주저치 않고 두 번째 이용권을 사용했다.
‘오늘 여기서 주어진 이용권을 전부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칠흑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알아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칠흑왕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물론, 칠흑왕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전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연우는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계시록.’
에메랄드 타블렛의 원전.
기어 다니는 혼돈조차도 절대 내어 줄 수 없다고 했던 것.
모든 우주와 차원, 태초와 종말, 역사와 시공의 기록을 전부 담은 그것만 있다면.
칠흑왕을 자세히 이해하고, 나아가 칠흑으로의 길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칠흑왕의 형틀을 다루는 법은 물론, 죄악석의 사용법도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이용권을 사용하였습니다.]
[‘계시록의 원전’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도출합니다.]
연우를 둘러싼 서고의 모습이 확 변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서고가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가장 낡아 보여, 손만 닿으면 바스라질 것처럼 보이는 파피루스 형태의 책자.
그것을 짚었다.
그 순간.
지이이잉-
심장에 박힌 죄악석이 크게 떨렸다. 마치 어서 그것을 보라는 듯.
손에 잡힌 책자도 같이 떨렸다. 먼지가 바스스 아래로 쏟아졌다.
이거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 그대로 뽑았다.
* * *
[잊힌 태초의 비밀 중 한쪽 단면을 엿보았습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
[마지막 이용권을 사용하였습니다.]
[잊힌 태초의 비밀 중 상당수를 깨달았습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
연우는 미친 듯이 오로지 계시록의 탐독에만 몰두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어버린 채.
덕분에 그의 영혼은 마치 영양제를 맞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럭무럭 성장해 나갔고, 죄악석도 거기에 맞춰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용, 마, 신의 세 인자들도 활발하게 움직이며 변화에 호응했다.
그러다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콰드득, 콰득-
콰드드득!
연우의 피부를 따라 용의 비늘이 잔뜩 성이 난 채로 빳빳하게 일어나더니, 비늘 사이사이로 노폐물이 새어 나왔다. 하나둘씩, 아주 천천히 허물도 벗겨지기 시작했다.
탈피(脫皮)의 시작이었다.
[6차 각성을 시도합니다.]
[용, 신, 마의 세 인자가 합일점을 이루어 새로운 형질로 변환됩니다.]
[환골(換骨)이 시작됩니다.]
[탈태(奪胎)가 이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