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92화 (492/862)

17화. 아카샤의 기록 (11)

“마성?”

연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올포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죄악석에서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녀석이 어떻게 외부로 현신할 수 있는 거지?

녀석은 자신의 육체를 빌려야만 외부로 의지를 내비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와중, 곧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을 따라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상서로우면서도 이질적인 예기. 그런데도 연우에게는 너무 익숙한 기운.

재빨리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연우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그리드를 가져간 건가?”

『이제는 제법 예리해진 면도 있구나, 애송아. 정말이지 생각보다 아주 잘 여물었어. 아주 잘.』

계시록을 통한 격의 성장은 연우만 변화시킨 게 아니었다. 죄악석이 단단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마성도 크게 변화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막강한 정신적 에너지 때문에 잠만 자야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바깥 활동도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그릇’인 연우가 달라지면서 녀석도 그만큼 힘을 많이 되찾은 것이겠지.

칠흑왕의 형틀에 남아 있던 사념이, 아가레스의 마력과 죄악석의 힘을 빌리면서 개화한 돌연변이.

따지자면 칠흑왕의 잔재이면서도, 녀석은 연우의 또 다른 인격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성은 호시탐탐 연우를 차지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탈각을 눈앞에 둔 지금, 드디어 포악한 이를 드러낸 것이다.

영글기만을 기다리던 열매를 직접 수확하기 위해서.

문제는 녀석이 강신의 재료로 선택한 것이 연우가 아닌, 비그리드라는 점이었다.

수많은 영령과 요마의 사념이 뒤섞인 마검이라면. 신력과 용혈로 저주를 완전히 씻은 성검이라면 녀석이 잠시간 영체(靈體)를 의탁하기엔 분명 제격이겠지만.

비그리드에는 녀석보다 먼저 선객이 있었다.

“흡혈군주는 어떻게 된 거지?”

『꼴에 칠흑의 뒤를 쫓았다더니 예전의 너보다는 훨씬 낫더군. 키킥! 하지만 그뿐이지. 그깟 반편이 따위야 한 입 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오히려 허기만 더 졌을 뿐이다.』

“……!”

연우의 낯이 잔뜩 굳어졌다. 뭐? 흡혈군주가 어떻게 되었다고?

『하지만 걱정 말라고. 지금의 네가 그년보단 훨씬……!』

마성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팟!

별안간 녀석의 눈앞으로, 연우가 공간을 열며 나타났다. 살의를 풀풀 휘날리면서.

퍼어엉-

연우는 녀석의 면상에다 주먹을 꽂았다. 순간, 드래곤 하트에서 마구 치솟은 마력이 그대로 폭발하면서 마성이 그대로 뒤로 튕겨 났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마성과 부딪친 벽이 그대로 박살 나면서 방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성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그렇게 튕겨 나고도 한참이나 더 날아가 밖에 있던 창공 도서관의 책장들을 도미노처럼 우수수 쓰러뜨렸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책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지고, 종이들이 눈송이처럼 나풀나풀 날렸다. 마성은 부서진 책장 아래에 몇 겹이나 깔려 버렸다.

하지만 연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 번 더 녀석이 있는 머리 위로 블링크를 발동하며 그대로 내려앉았다.

양쪽 다리에 마력을 잔뜩 응집시킨 채로.

천근추!

콰앙!

연우가 빛살이 되어 수직 하강을 하려는 순간, 부서진 책장들 사이로 검은 광채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콰르릉-

마성은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 이 순간이 오기만을 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냐는 듯!

『그래! 이거지! 이 정도쯤은 저항을 해 줘야 잡아먹는 맛이 있지 않은가!』

연우를 따라 붉은빛이 폭사했다. 파지지직, 유성검결의 검뢰가 거미줄 모양을 사방팔방으로 그려 나가 주변에 있던 모든 책장들을 모조리 ‘갈아’ 버렸다.

한 줄기 한 줄기가 네시의 목을 뚫었던 것과 똑같은 위력을 가진 것들. 그것을 수십 수백 개나 단번에 방출할 수 있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마성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칠흑을 토해 냈다. 검은 어둠이 안개처럼 퍼져 나가며 꿀렁거리다가, 끝내 포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흡혈군주가 부리던 흡령마와 상당히 흡사한 기술이었다.

콰아아-

찢어 버리려는 검뢰와 씹어 삼키려는 칠흑이 각각 위아래에서 부딪치려는 순간.

『이곳에서 막아서야 할 것이, 두 개나 있군. 선재로다, 선재.』

올포원이 개입했다.

콰르르르릉!

검뢰와 칠흑은 어떻게 서로 닿기도 전에 그들 사이로 파고든 새하얀 기운에 의해 그대로 찢겨 나갔다.

연우는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녀석들과의 거리를 한껏 벌리며 저만치 떨어져 있던 책장의 끄트머리에 올라섰다.

마성도 문제지만, 올포원은 더 큰 골칫거리였다.

홀로 서서 수천 년간 군림하며 천계와 하계를 틀어막았던 존재. 그래서 이름도 올포원(All for One).

이미 한 번 충돌해 본 적이 있던 연우였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왕도 끝내지 못했던 벽이 아닌가. 사실 여기서 마성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올포원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끽해야 승산은 4할쯤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우는 포기할 생각을 않았다.

한 번으로 안 된다고 해서 두 번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도리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몰랐다.

올포원은 아직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황. 방심을 유도한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올포원의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탈각을 시도할 만한 틈.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으로서 일어날 수 있게, 껍질을 깨고 나갈 수 있는 시간만 벌 수 있으면 되었다.

‘마성도 있고. 이곳이 창공 도서관이니 변수도 얼마든지 있어.’

아군이 존재하지 않는 이런 난전 속에서 기회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을 터였다.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화아악-

연우는 하늘 날개를 다시 한 번 더 한껏 크게 펼쳤다.

동시에 마성은 다시 한 번 더 칠흑을 크게 키우고, 올포원도 새하얀 빛을 산란시켰다. 연우가 얼마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처럼, 그들도 서로에게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쿠쿠쿠쿠!

세 존재가 내뿜는 영압으로 창공 도서관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크게 흔들리고.

다시 한 번 더 충돌했다.

* * *

‘……강하다!’

녀석들과 부딪친 순간, 연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올포원과 마성. 둘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이 크게 저릴 정도였으니까. 웬만한 갑옷보다 훨씬 단단할 비늘이 으깨지면서 안에 있던 근육과 뼈가 뭉개졌다.

재생 스킬이 금세 발동하면서 회복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연우가 계시록의 원전을 보며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감안해 본다면,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이 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도 강해.’

자신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듯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몸뚱이가 피떡이 되었을 공격을, 지금은 오른손이 가볍게 뭉개진 정도로 끝날 수 있었으니.

‘그러니.’

어쩌면.

‘해 볼 만할지도!’

팟!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단숨에 마성의 뒤를 밟았다.

이미 좀 전의 충돌로 연우가 단번에 빈사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마성과 올포원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파지지직!

[유성검결 - 검뢰]

연우가 내지른 손날을 따라 유성검결이 극한으로 압축된 검뢰가 튀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눈 멀 것 같은 검붉은 광채를 내뿜으면서 마성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까앙-

연우는 쇠와 쇠가 부딪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마성이 자리잡은 곳이 비그리드였으니, 이미 육체가 검,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바. 그러니 쇳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날을 오러로 몇 겹이나 두른 상태였다.

덕분에 쇳소리가 나는 것과 다르게, 마성의 상반신에는 상처가 길쭉하게 남았다.

‘얕았나.’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분명히 약점을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녀석이 움직임을 포착하고 상반신을 뒤로 내뺀 모양이었다. 손끝만 걸리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마성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흔적이 남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피 대신에 칠흑이 분수처럼 튀었다가 그쳤다.

갈라진 자리는 다시 어둠으로 메워졌지만, 마성이 다친 자존심 까지 메워진 건 아니었다.

『감히!』

처음에 공격을 허락했던 건, 어디까지나 연우의 재롱을 확인하기 위했던 것.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올포원을 상대하던 중에 뒤를 잡힌 것이니, 조금만 깊었다면 얼마든지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영체인 그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한낱 필멸자 따위에게 뒤를 잡힌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천천히 음미를 해 주려 했지만, 그렇게 빨리 먹히고 싶다면. 오냐. 그렇게 도와주마!』

마성은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나라 크게 쫙 벌리면서 연우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쩌억-

콰직!

연우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하늘 날개로 홰를 치면서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가 사라진 자리로 모든 게 통째로 뜯겨 나간 것이 보였다. 책장이며 서고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날아가 있었다.

마치 상어가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것처럼, 톱니 이빨 자국이 남은 자리로 시커먼 공허가 얼룩덜룩하게 남았다.

만약 저곳에 휩쓸리게 되면 영혼도 남지 않게 되리라. 연우는 바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성의 아가리 너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무저갱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 아마도 저것이 마성의 본질인 것 같았다.

콰앙-

마성은 방금 전 공격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연우를 쫓아 지면을 거세게 박찼다.

쾅!

쾅!

콰아앙-

녀석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연우는 마성이 접근할 때마다 이리저리 피했지만, 그럴수록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연우가 있던 자리를 게걸스럽게 물어뜯었다. 그리고 먹어 치웠다.

간간이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검뢰를 잔뜩 끌어모아 마성의 머리 위로 잔뜩 쏟아냈지만.

『키키킥! 그딴 것이 어디 통할 줄 아느냐!』

도리어 마성은 코웃음을 치면서 맛있게 검뢰를 삼켰다. 이따금 기둥처럼 내리꽂히는 검뢰에 팔다리가 잘려 나갔지만, 그 역시도 어둠이 자라나면서 금세 수복되었다.

‘그렇다면.’

연우는 자신만만해져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녀석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원 없이 먹여 주면 되지 않겠나.

[시차 괴리]

[용신안]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이 세로 동공으로 길게 쭉 찢어지며 녀석의 약점을 좇았다.

마성은 완전무결에 가까웠다. 결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영체는 몰라도, 그릇인 비그리드는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연우가 맨 처음에 검뢰로 가르고 지나갔던 뒷덜미 쪽에 상처가 보였고.

[브레스]

그곳을 향해, 드래곤 하트와 함께 용종을 상징한다는 최고 권능을 한껏 방출시켰다.

검뢰를 최고로 압축시킨 용의 숨결이었다.

후우-

콰르르르르릉!

단순히 날숨을 내뱉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대를 모조리 날려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높이의 해일이 치솟았다.

『이놈이!』

마성은 브레스를 막고자 칠흑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마치 잉크를 무작위로 뿌린 것처럼 공간을 따라 검은 물결이 퍼져 나갔지만.

화아아-

압도적인 마력을 품은 브레스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도리어 브레스는 검은 물결을 모조리 먹어 치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성까지 그대로 휩쓸었다. 마성이 무엇이라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브레스가 일으키는 굉음이 너무 큰 나머지 금세 묻혀 사라졌다.

콰콰콰콰-

그리고 브레스는 쭉쭉 앞으로 밀고 나가, 닿는 모든 것을 깡그리 지웠다.

도서관 내에 있던 모든 서고며 책들이 그대로 존재도 남기지 못하고 찢기고, 태워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우르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아 놓는다는 집합소가, 크게 격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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