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카샤의 기록 (12)
촤륵-
촤르륵!
연우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불구덩이 속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 시뻘겋게 달아올라 빳빳하게 일어난 비늘 위로, 수증기가 쉴 새 없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드래곤 하트와 죄악석을 있는 힘껏 끌어 올려 내뱉은 브레스였다. 당연히 모든 마력이며 체력이 몽땅 거기에 쏠려 심한 탈진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반대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간 자체를 밀어 버릴 줄이야.’
자신이 만들어 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참상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마성이 물었던 자리는 공간이 뜯겨 나갔다지만,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간이 모조리 지워졌다.
그 속에는 물리적 법칙도, 개념도 필요 없었다. 공간조차도 지워졌으니.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힘.
그래서 공허를 불러내는 힘.
검뢰를 한껏 응축시켜 무결참에 박아 넣는 브레스는. 그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연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 용종이었던 여름여왕이 다시 돌아와 브레스를 내뿜는다고 하여도, 절대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레드 드래곤이 검무신과 부딪칠 적에 이미 보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브레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별반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마신룡체…… 초월적인 인자를 세 개나 가졌기 때문인가?’
아직 용종으로 폴리모프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만한 위력이라면. 진짜 용종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해졌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 남은 거인족의 인자까지 함유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월등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
연우는 하루라도 빨리 그만한 성장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탈각부터 해야겠지.’
방해꾼을 지워야만 했다.
화아아아!
브레스가 밀어냈던 건, 마성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올포원도 있었다.
브레스가 퍼져 나가는 자리 가운데로, 갑자기 새하얀 빛의 기둥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불사〉
그리고.
콰드드득-
브레스가 강제로 비틀리면서 빛의 기둥을 따라 소용돌이를 그렸다. 창공 도서관에 거대한 용오름이 생성되었다.
올포원은 바로 그 아래에 서 있었다.
그 역시 브레스에 온전하지는 못했던지, 형체를 이루던 광채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지만. 광도(光度, 빛의 세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마력을 크게 뿌리고 있단 뜻이었다.
『칼라투스와 다른 여러 고룡들이 내뿜던 브레스를 다시 보는 기분이로군. 과연. 이래서 칠흑의 후예인가. 탈각이며 초월까지 이룬다면…… 어쩌면 내가 있는 곳, 그 위까지 노려 볼 법도 하겠어.』
올포원은 크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단순히 연우가 칠흑의 후예이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이룬 성취가 가히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정우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빠른 성취를 이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쌓고 걸어온 길을 부정할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존경심까지 들었다.
올포원 역시 한때 구도를 좇으며 층계를 오르던 플레이어. 수도자로서, 어느 누구도 걷지 못했던 길을 개척한 연우에 대해 존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럴수록 그대를 더더욱 위로 보낼 수가 없음이니. 이런 나의 결정을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 죄업, 마지막에 내가 이고 가마.』
올포원은 더더욱 연우를 막아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과 비탄만이 있을 저 위쪽으로 이런 이를 보내는 만행을 도무지 저지를 수가 없었다.
과거, 수많은 용종들이 그를 넘어 78층으로 가려 했지만 좌절해야 했던 것처럼!
그래서 올포원은 취하고 있던 합장을 풀었다. 그리고 한쪽 손바닥을 활짝 펼쳐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하늘 위로 치솟던 소용돌이가 한데 응축되면서, 그와 똑같은 손바닥 모양이 되었다.
용살대전 이후, 무왕과 겨룰 때 이외에는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던 비기가 드러났다.
그를 상징하는 특성, ‘칠성(七星)’의 네 번째 스킬.
〈대수인(大手印)〉
콰르르릉!
거대한 손바닥 모양을 한 빛무리가 오로라를 잔뜩 뿌려 대면서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래. 그만큼 익었으면 날 이렇게 밀어붙일 정도는 되어야겠지. 날 이딴 꼴로 만들고도 괜찮을 줄 알았던가?』
연우의 발아래에는 어둠이 잔뜩 번져 나면서 공허가 활짝 열렸다. 톱니 이빨이 자글자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포식 공허〉
영체를 손실한 마성이 땅속에서 크기를 키워 다시 아가리를 벌린 것이다.
새하얀 빛이 벼락처럼 떨어지고, 새카만 어둠이 늪처럼 차올랐다.
웬만한 신격들조차도 모조리 갈려 나갈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연우는 절대 침착을 잃지 않고 검뢰를 잔뜩 끌어 올렸다. 파직,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따라 검붉은 뇌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그리고 의념 통천을 세웠다. 하늘과 대지를 잇는 기둥을 높이 세워 이 두 거대 존재들의 접근부터 막아 세울 생각이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검뢰가 다시 환하게 치솟으려던 그때.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질이야?”
별안간 이대로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속에 담긴 마력도 도저히 어떻게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 몸이 빳빳하게 굳을 정도였다.
살벌한 기세를 흘리던 세 사람이 전부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어떻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갑자기 빛살이 하나 내리꽂히면서 천마가 나타났다. 그 여파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연우가 세운 의념 통천이며 올포원의 대수인, 마성의 포식 공허까지 전부 날아갈 정도였다.
창공 도서관을 몇 번씩이나 뒤집어 놓았던 살벌한 기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쓱 사라졌다.
“……!”
『……!』
『……!』
연우를 비롯한 셋은 전부 경악하고 말았다.
* * *
천마는 온통 엉망이 된 도서관의 내부를 보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이딴 짓이나 저지르고……! 너네들 죄다 줘 터져 볼래? 앙?”
연우는 천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때마다 몸속도 같이 울리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아까 전부터 어떻게든 의지대로 움직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법칙을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힘이라니.
연우는 천마가 품은 힘이 훨씬 더 대단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마성과 올포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칠흑왕의 잔재인 마성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탑 내에서 최강자로 거론되는 올포원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은 실로 말이 나오지 않을 수준이었다.
『당신은 결국 이렇게 끝까지……!』
올포원은 그렇게 자신의 손발을 강제로 묶은 천마를 잔뜩 노려보았다.
빛으로 가려져 있어 도저히 생김새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연우는 왠지 모르게 올포원이 잔뜩 화를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신선처럼 초월적인 인상을 물씬 풍기던 올포원이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렇다고 해서 원수를 대하거나 하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던 나와 정우 같은…….’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아이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올포원에게 그런 표현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딱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올포원을 보는 천마의 눈가에도 씁쓸한 기색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천마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크게 꾸짖었다.
“너 지금 천계 놈들 때문에 할 일도 많잖아? 이만 돌아가.”
그걸로 끝이었다.
파아아!
탑 내라면 어디든 축지를 사용해 돌아다닐 수 있다던 올포원이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아예 도서관으로의 접속마저 차단된 듯, 여태 연우의 탈각을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압박도 같이 사라졌다.
『키키킥!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군. 그래도 아주 재미있어, 아주.』
어느새 저 멀리서 제 모습으로 되돌아왔던 마성은 연우와 천마를 번갈아 보더니 가볍게 웃으면서 비그리드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 시커멓게 물든 성검만이 남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꽂혔다.
웅, 우우웅-
치이이익!
비그리드를 새카맣게 물들이던 마기가 빠져나가면서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왔다.
연우는 그쪽으로 손을 뻗어 마력을 움직여 비그리드를 회수한 뒤, 재빨리 내부를 살폈다. 정말 흡혈군주가 마성에게 잡아먹혔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흡혈군주의 영체는 비그리드의 가장 끄트머리에 숨겨진 구석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영체의 대부분이 뜯어 먹혀 격을 상당수 손실한 상태였다. 기식도 엄엄해 의식을 도저히 못 차리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 있다간 격을 완전히 상실하거나, 영체가 흐트러질 위험이 너무 컸다.
‘안 돼!’
흡혈군주는 이렇게 허망하게 잃어서는 안 될 전력이었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팀, 올포원을 사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력이었기에. 어떻게든 되살려야만 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라나에게 다시 슬픔을 안겨다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손실된 영체를 되살릴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끽해야 권속으로 거둬서 칠흑의 권능을 더해 주는 것밖엔 없었다.
그러나 브라함이 아직 신격을 되찾지 못했듯, 흡혈군주도 당장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 멈칫거리는데.
천마가 불쑥 나서더니 비그리드에다 손을 얹었다.
화아악!
순간, 그의 손을 따라 황금색 빛무리가 터진다 싶더니, 흡혈군주의 영체가 원래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깊은 수면에 빠져 있지만, 흡혈군주의 기식도 많이 편해졌다.
연우는 놀란 눈으로 천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망가진 신격을 이리 쉽게 고칠 수 있었던 거였나? 연우는 그게 아니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티폰과 기가스가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타르타로스에서 발버둥 치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천마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신기들을 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놀랍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빛이라더니, 어쩌면 그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태초 때부터 존재하던 빛이라면서, 그는 대체 어떻게 ‘손지호’라는 본명을 가진 인간일 수 있는 걸까?
보통 태초신들은 자아가 없거나, 있어도 의지밖에 내비칠 수 없는 존재들일 텐데. 천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단순한 화신체도 아니었다. 애당초 지금의 형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본체 같아 보였다.
비록 열 페이지에 불과하다지만, 계시록의 원전을 읽었던 연우였기에 그런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 아니, 우주의 섭리대로라면 그는 도저히 존재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모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반한 얼굴로 쳐다봐도,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단다. 얘야.”
“…….”
어쩌면 모순을 극복하면서 존재할 수 있는 건,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자애(自愛)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요란하게도 싸워 댔구만. 정말이지 잠깐 자리를 비웠던 건데. 어휴!”
천마는 엉망이 된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손바닥을 두들겼다.
짜악!
그러자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 한 것처럼, 무너진 책장이나 책들이 빠른 속도로 수복되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천마는 다시 연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도 그동안 골방에 틀어박혀서 냅다 책만 판 것 치고는 제법 발전이 있었던 모양이네?”
“예. 덕분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연우는 6차 각성을 끝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그에게 주어졌어야 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창공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었단 것을.
그렇게 도와준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순간, 천마의 말허리가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연우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만큼 발전하고도, 도저히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그런데 왠지 모르게 연우는 천마가 웃는 모습이 스승인 무왕과 많이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좀 맞자.”
도서관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으면 혼나야지, 안 그래?
퍽-
연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무왕보다도 더한 인성 파탄자가 여기에 있었단 사실을.
* * *
까드득.
“확실히 제법 쓸 만해졌네. 반격도 제법 할 줄 알고.”
천마는 가볍게 손을 풀며 피식 웃었다.
스승님보다 더한 사람 같으니라고.
연우는 천마가 어디서 조달했는지도 모를 달걀로 눈덩이를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양쪽 눈이 팬더처럼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스승님보다 더한 사람. 관리국에서는 이보다 더 심한 욕도 없다고 했으니 아주 딱이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별이 아니라 우주를 볼 것 같았으니까.
“너, 지금 내 욕했지?”
그때, 천마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다가 연우를 홱 하고 노려봤다.
참 쓸데없이 예리하단 말이지. 연우는 내심 뜨끔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새끼, 생긴 거랑 다르게 뺀질뺀질한 거 봐라. 좋아. 한 번은 봐준다.”
“…….”
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꽤 많은 시간을 창공 도서관에서 보낸 건 확실한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다만,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언제부턴가 권속들과의 연결이 많이 약해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혹시 1, 2년 정도 지났나 싶었는데.
“말 돌리려고 참 애쓴다. 속 보여, 새꺄.”
“…….”
“걸리기만 해 봐, 아주.”
천마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하는 연우를 노려보다가, 손가락을 꼽아 보고는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꽤 많이 흘렀네. 생각보다.”
“……얼마나 흐른 겁니까?”
“글쎄. 한…….”
천마의 입꼬리가 익살맞게 올라갔다.
“백 년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