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카샤의 기록 (13)
백…… 년?
연우는 순간 자신이 잘못 이해했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천마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더 크게 말아 올렸다.
“왜 농담 같냐?”
“……그럼?”
“쫄지 마, 짜샤. 당연히 농담이지. 뭘 했다고 백 년이 지나.”
역시.
연우는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는 냉정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어쩐지 천마와 엮이니 계속 휘둘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더 많이 지났지. 정확하게 193년쯤 흘렀네. 새끼, 집중력 하나는 대단하네. 나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야.”
“……!”
하지만 곧 천마가 한 말에 연우는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이번에는 절대 농담이었다.
“뭘 그리 놀라.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거지. 계시록을 그렇게 봤는데, 설마 그 정도도 안 흐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이거 웃긴 놈이네.”
“…….”
물론,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지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천마와 같은 초월자들에게 200년이라는 시간은 짧을지 몰라도, 필멸자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길어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고, 세력 하나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연우의 머릿속에는 한 단어밖에 없었다.
아르티야.
동료들은 어떻게 된 걸까?
판트, 에도라, 칸, 도일…… 이룬 경지가 있으니 어떨지 몰라도, 그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자신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르티야의 억압에 짓눌렸던 세력들의 항전에도 부딪쳐야 했을 테고.
화이트 드래곤이 움직이거나, 사라졌던 마군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숨어 있던 다우드 형제단이 나섰을지도 모르고.
모든 계획이 전부 어그러진 것이다.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아마 네가 가진 스킬로 번 시간까지 생각해 보면 천 년은 족히 넘었을걸?”
“…….”
거기다 천마가 추가로 던진 몇 마디는 연우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시차 괴리까지 포함한 시간을 말하는 것일 테지.
그렇게 보낸 시간이 무려 천 년.
연우로서는 정말 자신이 보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200년도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는데, 천 년이라는 시간은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천마의 말마따나 그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이룬 성취를 생각해 본다면.
비록 올포원의 방해 때문에 탈각은 바로 직전에서 멈춰야만 했지만, 그래도 사왕좌의 신위는 완벽하게 소화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것만 해도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올포원, 마성과도 겨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은 스승님과도 충분히 칼을 겨룰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다.
‘이러니 샤논이나 한령과의 링크가 약해진 것도 당연할 수밖에.’
권속들은 연우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바. 천 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면, 그사이 기나긴 잠에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림자 속으로 인지 영역을 넓혀 보니 그들은 전부 깊은 동면에 잠겨 있었다. 그들 역시 연우 못지않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채로.
생각이 그렇게까지 미치자, 연우는 한결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처음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래도 자신의 발전과 더불어 권속들도 무사한 것이 확인되었으니, 어떻게든 다시 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동료들을 찾아가 사과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일을 시작해야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전부 수습하고 새로운 계획에 들어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탑 내의 잔존 세력을 전부 정리하고, 기어 다니는 혼돈을 찾아간다. 지금은 거기에 집중하자.’
연우는 여전히 탑 내로 들어오기 위해 어슬렁대고 있을 기어 다니는 혼돈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포함한 타계 신의 무리를.
초반부에 불과해도 계시록의 원전을 읽는 내내, 그는 확신이 들었다.
‘칠흑으로 가는 길은 타계의 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언젠가 말했던 종말, 그들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눈을 떴을 때가 칠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듯싶었다.
어쩌면 칠흑은 종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고 유추하는 중이었다.
물론, 타계의 신들과 곧바로 접촉한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바. 아직 탈각과 초월도 이루지 못한 상태로 움직인다는 건 위험했으니.
그러니 곧바로 접촉하는 건 피해야 했다.
그래서 우회 경로를 통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발데비히. 녀석을 찾아야 해.’
발데비히는 칠흑과 타계의 신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화신체로 녀석의 모습을 두고, 동생을 지구로 보낸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참에 부의 잃어버린 기억도 전부 되찾아야 하고. 격을 복구시켜야 해.’
그리고 그 모든 퍼즐들을 완성시키고 나면, 연우는 기존의 계획대로 정예 병단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부에게 파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되찾아 주고, 흡혈군주를 크게 키우며, 여름여왕까지 설득해 끌어와서.
‘올포원을 사냥한다.’
그래야만 칠흑에 닿을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 탈각과 초월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위 층계로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공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을 해소하고, 여태껏 중구난방으로 어질러졌던 계획들을 명확하게 잡을 수 있기도 했다.
이제는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쭉.
거치적대는 것은 전부 부수면서 앞으로 달리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은 건지, 천마가 빤히 그를 살피다 말고 피식 웃었다.
“계속 정신을 못 차릴 줄 알았는데, 그래도 금세 평정심을 찾네? 아타락시아(Ataraxia)는 어느 정도 깨웠네. 그냥 단순히 강해지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정신적으로도 발전하고. 그래도 배려해 준 보람은 있구만.”
천마는 시스템의 간섭마저 강제로 배제하면서 연우를 계속 창공 도서관에 있게 한 보람이 있다는 사실에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런 뜻에서 선물을 하나 더 주지. 서비스 대출혈이다.”
“……?”
연우는 천마가 또 뭘 하려는 건가 싶어 흠칫거렸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걱정부터 들었다.
그런데.
딱!
가볍게 박수를 치더니.
우우웅-
창공 도서관이 갑자기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천마는 보고만 있으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 순간, 연우는 자신의 영혼이 크게 뒤틀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급가속으로 달리던 스포츠카가 사고가 나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뒹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격에 가까워졌기에, 계시록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일부 엿보았기에 감지할 수 있었다.
세상 만물이 찢기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영혼이며 시공간, 물리적 법칙, 심지어 그 너머에 있는 절대적 진리라는 이데아까지도.
그리고 다시 재조립되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전변(轉變).
태초신들도, 최고신들이며 타계의 신들도 절대 해내지 못할 거대한 역사의 줄기를 강제로 뒤집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전변의 중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우는 자신의 격이 다시 한 번 더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천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고.
쿠쿵!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곧 진동이 감쪽같이 멈췄다.
“하…….”
연우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등골이 여전히 쭈뼛 서 있었다. 올포원이며 마성과 싸울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이 그의 본능을 지배했다.
“대체……?”
그래서 연우는 가까스로 긴장감을 추스른 후에야 천마에게 대체 뭘 한 건지를 물어볼 수 있었다.
천마의 미소는 여전히 익살맞았다.
“시간을 되돌렸어.”
“무슨……?”
“너에게는 좋은 거 아냐? ‘굴레’를 돌리는 건 나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
굴레.
시간선. 혹은 세계선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시간의 축(軸)을 되감았단 뜻이었다.
연우는 이제는 말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다룬다는 건, 원래 간섭이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제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 하여도,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그들도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시간을 절대 초월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속도를 늦추거나 하는 게 전부일까. 뒤집는 건 별개의 영역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연우가 시간 예지라는 스킬을 갖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의 지식을 기반으로 여러 가능성을 추론해 내는 가상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것. 절대 미래에 간섭하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시간의 영역에 가장 가깝게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올포원이었다. 그의 시그니처 스킬 중 하나가 ‘예지’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전지와 전능을 이뤘을 텐데, 어째서 창공 도서관에서 탈각을 눈앞에 둘 연우를 미연에 차단하지 못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마는 그런 기적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딱 이 도서관에 들어온 지 딱 열흘쯤 되었을 무렵으로 되돌렸으니까, 아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대체 천마란 존재는 얼마나 대단한 걸까.
어쩌면 그는 시간마저도 훨씬 초월한, 모든 것을 넘어 절대적인 진리를 관장하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천마를 보면서.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게 가능하다면.
어쩌면……!
“안 돼.”
하지만 연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천마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이 되어 딱 잘랐다.
순간, 연우는 가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10년만. 이왕에 200년이란 시간을 돌린 것, 10년, 아니, 5년만 더 돌리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어째섭니까!”
“그야 넌 특이점이니까.”
“그게 무슨……!”
“네가 탑에 들어온 순간, 그 순간부터 너는 이미 특이점이 되었다. 그러니 안 돼.”
“……!”
“그리고 여기까지 해 줬으면 됐지, 내가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도 없잖아?”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특이점이 되었다는 것. 그 역시 우주의 역사에 크게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단 뜻이었다. 이 이상은 천마도 부담스럽단 뜻이겠지. 그 역시 상당한 인과율의 손실을 감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맞기도 했다. 천마가 여기까지 되돌려준 것도 나름의 크나큰 배려였다. 이 이상 연우를 도와줄 의무나 이유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딱 몇 년만 더 되돌릴 수 있다면.
되감을 수만 있다면……!
[주어진 열람 시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 연우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망막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공 역전을 엿본 건 너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 앞으로 잘해 봐.”
화아아-
연우의 발아래로 붉은 포탈이 열렸다. 이만 도서관을 나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연우는 남아 있던 미련을 꿀꺽 삼켰다. 천마의 말이 맞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그는 큰 도움을 준 것이고, 이후는 다시 스스로가 개척해야 할 일었다.
이유 없는 호의.
헤노바에 이은 두 번째였다.
그렇기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천마도 사나워졌던 눈매를 풀고, 다시 피식 웃었다.
“뭘. 나도 간만에 고향 후배랑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기분 좋았는데. 다음에 기회 되거든 또 놀러와.”
천마는 낯간지럽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휘휘 저었다.
“그럼 잘 가라.”
천마의 짤막한 인사와 함께.
팟!
빛무리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참. 나중에 아들 녀석 다시 만나거든, 미안하다는 말 좀 대신 전해 주라.”
천마의 목소리는 그렇게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졌다.
[52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