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96화 (496/862)

21화. 공적(公敵) (2)

[채널링으로 연결된 모든 신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메시지: 그러니 대답하라.]

[채널링으로 연결된 모든 악마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메시지: 그대의 대답은 무엇인가?]

연우는 망막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황당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보다 가장 먼저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창공 도서관의 열람권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타 내었던 보상. 원래대로라면 저들이 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탑 내에서 보상이라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구도자(求道者)로서 정진(精進)에 충실히 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서 거래를 제시할 수는 있어도, 강제적으로 요구할 수는 없었다.

거래에 응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연우의 마음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것일 텐데…….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들이 신과 악마들인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여태 열람권을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가 천마를 만났고, 시공의 굴레까지 역전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강압적으로 나섰다.

‘이것들은…… 결국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놈들이야.’

신과 악마들이 플레이어를 절대 동등한 입장에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써먹었다가 마음껏 버릴 수 있는 소모품. 언제든지 짓밟아도 전혀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벌레. 그들이 수고스럽게 계도(啓導)해야만 하는 어리석은 피조물.

그 정도로 취급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놈들이 막상 이렇게 맨 얼굴을 드러내니 이가 바득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이렇게 된 동안에 나선다, 이거고?’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동맹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

르 인페르날조차도 결국 그를 이용할 만한 수단으로만 여길 뿐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저들의 거래는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주어진 열람권은 3개에 불과했고, 저 많은 사회들에 고루 나눠 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천계의 각 사회들은 여러 은원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만약 임의로 한 곳을 선택하면 다른 곳들과 대적하게 될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냐, 악마냐를 두고 봤을 때 한쪽의 진영만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이참에 여태껏 연우가 고수하던 애매한 중립을 벗어던지고 줄을 서라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올포원의 발목이 묶이며 천계가 격동하는 이때.

하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인 연우의 향방은 차후의 질서에 어떤 변수가 될지도 모르니.

미리 교통 정리를 위해, 강요를 하는 것이다.

연우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고.

그러다.

피식-

연우는 화를 내다 말고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한쪽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아니, 굳이 짜증을 낼 필요는 없나.’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여태 실컷 이용해 먹었던 것은 똑같지 않은가.

사도가 되어 줄 듯 말 듯, 저들의 애간장을 계속 태우면서 수천 개에 달하는 권능들을 모조리 빌려 왔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것들을 한데 묶어서 하늘 날개로 체현하기까지 했었으니.

그동안 아무 대가도 없이 저들이 까마득한 세월 동안 쌓아 만든 기적을 휘둘렀던 셈이니, 사실 따지고 보면 저들도 그동안 단단히 뿔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던 건, 다른 연우가 다른 초월자들과 가까워질지 모른다는 욕심 때문이었고.

그러다 이번 기회에 합의를 통해 중간 정산까지 하려고 나선 모양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연우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손절해야겠지.’

어차피 연우라고 해서 저들과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저들이 요구하는 바가 명확한 이상, 갈라져야 할 시기는 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앞당겨졌을 뿐. 최소한 올포원과 정면으로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체재를 안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왕좌의 격도 전부 소화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강해진 이때. 탈각도 눈앞에 두고 있어, 스스로 대신격과도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 이때. 굳이 저들의 손을 계속 잡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 길을 가면 된다.’

연우는 웃는 낯 그대로 하늘을 응시했다.

“내 대답, 듣고 싶나?”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의 대답에 집중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당신의 대답에 집중합니다.]

[신의 사회, ‘딜문’이 당신의 대답에 집중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이를 드러냅니다.]

……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이봐! 잠깐! 잘 들어라. 여기는 네놈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놈들로 들끓어. 알고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올림포스 놈들이 아주 단단하게 서 있고.]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그러니 나와 손을 잡…….]

[사용자의 권한으로 메시지가 임시 차단되었습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가 강하게 항의를 합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에게 소속 사회가 불호령을 내립니다.]

[바알이 당신을 살핍니다.]

수천 개에 달하는 시선이 빗발치는 그 중심에서.

언젠가 무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연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중지를 활짝 펼쳐 보였다.

“이거나 잡수셔.”

[신의 사회, ‘데바’가 불같이 분노를 표합니다. 당신을 공적으로 선포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오만한 당신의 결정에 이를 갑니다. 당신에게 천벌을 내릴 것을 공표합니다!]

[신의 사회, ‘딜문’이 당신의 선택에 인상을 찡그립니다. 적대 관계 투표에 만장일치를 표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침묵합니다. 당신에게 불쾌함을 드러냅니다. 동맹 조약의 파기를 검토합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당신에 대한 표결에 들어갑니다. 의논 끝에 수장 ‘로키’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

[케르눈노스가 당신이 내리려는 결정을 눈치채고, 마음에 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이 내리려는 결정에 만족해합니다. 무릎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소리칩니다.]

[메시지가 임시 차단된 누군가가 발을 동동 구릅니다.]

[메시지가 차단된 누군가가 자신의 권속과 신하들을 집결시킵니다.]

[메시지가 차단된 누군가가 바알에게 급하게 방문을 요청합니다.]

각 사회뿐만 아니라, 신과 악마들의 반응도 쉴 새 없이 올라와 눈이 어지러웠다.

[토르가 우려를 표시합니다. 당신에게 내렸던 권능, ‘천둥신의 망치’를 회수하고자 합니다.]

[나타태자가 이를 드러냅니다. 당신에게 내렸던 권능, ‘만병의 왕’을 회수하고자 합니다.]

……

여태껏 연우에게 호의를 보였던 토르나 이랑진군 같은 존재들조차 유감이나 우려를 표시했고, 그를 미심쩍게나마 지켜보던 존재들은 하나같이 이를 드러내며 등을 돌렸다.

연우에게 심어졌던 단말이 하나 둘씩 꺼지고 있었다. 채널링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쪽에서 강제로 채널링을 종료시키고, 단말까지 파기했다.

저들이 도중에 다른 핑계를 대며 그에게 간섭할 수 있는 길목 자체를 단절시킨 것이다.

[오른쪽 날개(키워드: 투쟁)과 연결된 모든 채널링이 종료되었습니다.]

[단말이 소거되었습니다. 복구가 불가능해집니다. 권능의 효과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덕분에 연우는 한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무력감이 찾아왔다.

여태껏 알게 모르게 그를 받쳐 주던 모든 버프 효과가 종료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테이터스 창에서도 30퍼센트가 넘는 수치가 확 줄어든 게 보였다.

플레이어로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연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사실 그동안 이렇게 많은 채널링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던 건,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었다.

강한 스킬을 많이 확보할 수 있으니 성장하는 측면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그만큼 간섭도 심해지기 마련이라 혼자서 뭔가를 비밀리에 시도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권능이라는 것은 전부 각 신과 악마들이 쌓은 업을 토대로 한 것. 새로운 길을 걷고자 하는 연우에게는 언제부턴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로부터 모두 해방되었으니.

더구나 그렇게 권능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아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빈자리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만이 아닌가.

[오른쪽 날개(키워드: 투쟁)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모든 신과 악마들로부터 적대 선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업(業)이 갱신되었습니다.]

[창공 도서관을 이용하여 세상의 진리를 엿보는 데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업이 갱신되었습니다.]

……

[영격(靈格)에 따라 ‘업’이 ‘신화’로 승격하였습니다.]

[신화를 수치화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키워드 아래, 정렬 작업이 시작됩니다.]

어차피 오른쪽 날개야 그의 신화를 토대로 했던 것. 다른 권능들이 빠져나간다고 한들, 그것을 강화된 신화로 채우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그는 탈각을 눈앞에 두면서 신화도 보강한 데다가, 방금 전 천계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은 선물을 주기까지 한 상태였다.

천계와 대적한다는 것!

필멸자가 되어 초월자들과 대적하였고, 과거에 신살을 이뤄 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천계와도 대적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세상 어느 누구도 쌓을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으니. ‘투쟁’이라는 키워드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다 연우는 창공 도서관에서 천계의 신과 악마들이 모르는 새로운 장기도 만들어 둔 상태였다.

‘딱히 여기서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비틀린 연우의 입술 끝이 더 세게 짙어졌다.

저 위에서 손가락을 빨며 자신을 지켜보고만 있을, 위대하지만 멍청한 작자들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이왕에 보여 줄 것, 제대로 신고식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죄악석이 맥동합니다!]

[새로운 사용법을 터득하였습니다.]

화아악!

오른쪽 날개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붉은빛을 내는 깃털 하나하나가 루비처럼 반짝였다.

연우를 삼키던 마성의 칠흑이 거기에 모조리 찢기거나 태워졌다. 스테이지를 뒤덮고 있던 눈보라와 얼음이 모조리 녹아내렸다.

철썩, 철썩!

콰콰콰-

마치 새로운 태양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모습.

여태껏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한 불길이었다.

죄악석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것.

과거 천계를 진동케 했던 루시엘이 피웠다는 불길, ‘시원(始元)의 불꽃’이었다.

[오른쪽 날개(키워드: 투쟁)이 재조립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용법에 따라 죄악석과의 연동이 수월해졌습니다. 죄악석에 있던 불길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시원의 불길은 한때 천계를 위협하던 태초의 불입니다. 사용 여부에 따라서 소유자에게도 해를 입힐 수 있으니, 사용에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대다수의 신이 당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경악합니다.]

[대다수의 악마가 당신의 불길에 천 년 전을 생각하며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떱니다.]

연우는 계시록의 원전을 다량으로 읽으면서 탑 내에도 없을 무궁한 지식을 얻었고, 그 와중에 죄악석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한 상태였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죄악석의 원본은 시원의 불꽃, 혹은 태초의 불이라고 불리는 힘이다. 공허에서 우주 창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일어났다는 불길을 다루는 것이니만큼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중 일부를 다룰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라 할 수 있었으니.

등대지기였던 루시엘이 ‘루시퍼’라는 이름으로 천계와 대적할 수 있게 했던 신화는.

이제 연우의 오른쪽 날개에서 재현(再現)되려 하고 있었다.

화아아아-

그리고.

[모든 죽음의 신이 여전히 당신과 뜻을 함께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여전히 당신과 뜻을 함께합니다.]

[사왕좌가 ‘왼쪽 날개(키워드: 죽음)’과 완전하게 결합되었습니다.]

[모든 권능이 발현됩니다.]

오른쪽에는 ‘투쟁’이 자리 잡은 붉은 불길을 두르고.

왼쪽에는 ‘죽음’을 임한 검은 어둠을 풍기면서.

연우는 양손을 거세게 마주쳤다.

콰아아아앙-!

여태껏 보였던 검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검뢰가, 하늘과 대지를 가르며 그대로 스테이지에 기둥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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