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99화 (499/862)

24화. 공적(公敵) (5)

60층에 처음 입장했을 때에 메시지 창이 ‘그들 종족’이라고 지칭했던 이들.

그들은 바로 거인족이었다.

용종은 여름여왕이 유일하게 남아 있어 비교적 알려진 바가 있는 것과 다르게.

거인족은 이미 멸종한 지 오래라 세간에 남아 있는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한때 위대한 전사들이었으며, 수많은 세계와 차원이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용맹이 끝내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는 것뿐.

그나마 그들에 대한 힌트가 남아 있는 곳이 60층이었다.

50층이 용종과 깊은 관련이 있어 고룡 칼라투스가 자신의 레어까지 남겨 두었던 것처럼.

60층은 거인족의 흔적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검묘’라고 지칭하던 것은 전부 소싯적에 거인족이 부리던 무기들. 대부분이 수리하기에 따라서 당장 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도 많이 있었다.

얼마나 뛰어난 제련 기술과 강렬한 염원이 담겨 있으면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풍화를 비껴 가며 저런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식과 진리를 탐구하던 용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좀처럼 거인족이 어떤 녀석들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저 거인족의 피를 물려받은 발데비히를 보면서 이런 이들이 아닐까 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게 전부일 뿐.

여하튼 60층의 이런 특성 때문에 발데비히는 이곳에 올랐을 때부터 줄곧 여기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60층은 발데비히에게 있어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클랜 하우스도 있지만, 그는 60층에서 이따금 더 안정을 느낀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수에 젖은 얼굴로 어린 시절을 그리곤 했다.

어쩌면 그건 이따금 지구에서의 생활을 그리는 내 모습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리타이어를 선언하면 언제든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데 반해, 이 친구는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60층은 거인족의 최후를 보여 주는 장소를 모방한 것에 가까울 뿐, 그들이 진짜 머물던 터전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니.

진짜 유적지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발데비히가 자신에게 주어졌던 특권을 포기하고, 동생을 지구로 보냈을 때 이후로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베이럭이 말했던 거인족의 유적지로 향하는 문도 바로 이곳에 있으니까.’

거인족의 유적지는 60층 아래에 위치한 히든 스테이지에 있었다.

어찌 보면 그런 히든 스테이지가 이곳에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동안 수많은 클랜과 랭커들의 탐사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했었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미 ‘60층은 거인족의 모방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뿌리를 내린 지 오래였다.

사실 거인족이 탑에서 거주했다는 이렇다 할 증거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소문은 더욱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발데비히는 거인족의 유적지에서 퀘스트를 깨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거인족이 멸종 직전에 최종적으로 발을 내디뎠던 장소가 바로 탑이라는 사실을.

사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거인족은 오로지 전투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종족. 약자는 경멸받아 마땅하며, 강자는 존경하고 숭상하면서 그 뒤를 따라 강함을 배워야 한다는 게 그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랬던 이들에게 탑의 세계란, 절대 지나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각 층계별로 시련이 주어져 스스로의 가치를 시험할 수 있으며, 보상에 따라 무한한 성장도 가능하고, 스테이지 랭킹에 따라서 서열화도 아주 손쉬우니 절대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각 세계와 차원으로 흩어졌던 거인족들은 모두 발길을 돌려 탑을 오르기를 희망하였고.

지칠 줄 모른 채 계속 오르고 오르다가.

끝내 77층에 있던 올포원에 단단히 가로막혀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은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수천 년 전의 일.’

당시는 탑이 현재의 형체를 갖추기도 훨씬 이전인 초창기라, 천계 내 사회도 제대로 구성되기 전이었고, 용종도 터를 잡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올포원은 이미 77층에 자리를 잡으며 장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용종이 그러하였듯 거인족도 사멸의 수순을 밟아야만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용종은 집단이 통째로 강행 돌파를 시도하면서 떼 몰살을 당했던 것과 다르게.

거인족은 종족이 아닌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올포원을 넘어서서 보고자 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거인족은 누가 올포원에 도전할 ‘대전사’가 될 것이냐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그 장소가 바로 60층이었으니, 검묘는 그때 다퉈 죽은 거인족 전사들의 무기들이었고, 그 아래에는 그런 어리석은 다툼을 벌이기 전에 머물렀던 흔적이 히든 스테이지가 되어 남아 있었다.

베이럭이 발견하고, 발데비히가 방문한 곳이 바로 그런 마지막 전투의 흔적지였던 셈이었다.

원래 연우도 상세히는 모르고 있었지만.

창공 도서관에서 보았던 서책이 계시록의 원전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따금 다른 서책들도 우연찮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연우는 숨겨진 우주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거인족의 멸망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건데.’

타계의 신처럼 격이 높은 존재들에 관한 내용은 보안 등급이 높은 까닭에, 연우가 알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열람권을 사용했다면 모를까, 열람권은 전부 계시록의 원전을 보는 데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추가적인 내용까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심증은 있었다.

거인족의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베이럭에게 말해 준 것은 기어 다니는 혼돈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화신체를 발데비히의 모습으로 하고 있었다. 거인족의 사멸과 녀석 간에 어떤 연관성 있다는 증거였다.

고룡 칼라투스가 올포원을 넘어서기 위해 기어 다니는 혼돈과 손을 잡으려 했던 것처럼, 거인족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녀석에게 손을 뻗었던 걸까?

전혀 알 수 없었다.

발데비히가 뭔가를 아는 듯했지만, 거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편지에 남겨 두질 않았고.

하지만.

‘이제 곧 알 수 있겠지.’

불의 날개로 스테이지를 가로지르기를 한참, 연우는 드디어 스테이지의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어떤 구릉이나 둔덕보다도 훨씬 높아, 마치 산처럼 웅장해 보이는 언덕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킬로미터 단위도 훌쩍 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길고 거대한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끄트머리가 구름을 뚫고 극권에까지 다다라 있을 만큼 컸다.

60층의 시련 내용은 각 검묘에 남아 있는 원주인의 사념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즉, 거인족이 남긴 망령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검의 크기는 곧 전사의 서열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시련의 난이도도 검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 가장 큰 검은.

‘거인족의 왕, 전사장(戰士長)의 것이지.’

연우는 불의 날개를 접으면서 거대 검묘의 끄트머리에 섰다. 그리고 손바닥을 갖다 대며 마력을 불어 넣었다.

‘히든 스테이지로 향하는 입구는 바로 이 아래에 있다.’

지이이잉!

거대 검묘가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태 칼날에 붙어 있던 녹이며 돌가루들이 먼지가 되어 부스스 떨어지고, 그 아래 잠들어 있던 단단하고 날카로운 날이 차갑게 번뜩였다.

츠츠츠-

그리고 거대 검묘 위로 희뿌연 영기가 아지랑이가 풀풀 휘날리면서 어스름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타르타로스에서 마주쳤던 거신, 티탄과도 견줄 만한 크기를 자랑하는 영체.

하지만 저것은 망령이었다.

한때 위대했던 존재가 이 세상에 남긴 흔적에 지나지 않을 뿐. 판단 능력도 사고 능력도 없이, 그저 프로그래밍 된 대로만 움직이는 NPC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거인족의 왕이 남긴 사념이니만큼, 거기서 풍기는 영압은 어마어마했다. 거친 태풍이 휘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둔덕이며 구릉은 모두 깎일 정도였다. 60층에 도전하는 이들쯤 되면 하이 랭커에 가까울 테지만, 그런 이들도 균형을 겨우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수준.

그러나 연우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망령이 형체를 모두 갖추기를 기다렸다.

영기가 뭉치며 해골 형상을 떴다. 녀석은 연우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숙이며 포효했다.

『짐의 영면을 깨우는 자, 자격을 증명하라!』

검묘에서 사념체가 깨어날 때면 언제나 똑같이 내뱉는 소리들.

그러니 연우도 당연히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녀석에게만 증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히든 스테이지를 열기 위해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다른 조건이 추가로 필요했으니까.

‘여기 있는 모든 검묘의 주인들에게서 인정받는 것.’

순간, 연우를 중심으로 막대한 마력장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스테이지 전체로 가득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마력을 머금은 검묘들이 동시에 일제히 몸을 파르르 떨었다.

60층 스테이지에 설치된 검묘의 숫자는 모두 삼천여 개. 그것들이 일제히 공명(共鳴)하는 모습은 소름이 돋다 못해,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 누가 우리의 오랜 잠을 깨우는가!』

『어느 누가 우리의 깊은 잠을 깨우는가!』

『어느 누가……!』

크고 작은 삼천여 개의 사념체가 동시에 일어나며 연우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흉포한 전의가 마구잡이로 뒤섞이면서 전사장의 살의와도 합쳐져 마침내 대기를 부르르 떨리게 했다.

띠링!

[히든 퀘스트(위대한 옛 전사들의 군단)가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위대한 옛 전사들의 군단]

설명: 당신은 방금 전 60층의 스테이지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옛 종족의 안식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겨우 찾은 자신들의 평화를 망가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 동료들의 평화까지 방해한 당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느꼈습니다. 더불어 그런 대상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자존심까지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전사장은 방금 전 그런 당신을 그들 종족의 공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이들 군단으로부터 당신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그들에 못지않은 용맹과 의기를 지닌 전사라는 것을 증명하십시오.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그들을 모두 꺾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시오.

제한 조건: -

제한 시간: -

보상:

1. 칭호 ‘대전사(大戰士)’

2. 히든 스테이지 ‘무너진 거인의 땅’의 입장권

3. 전사장의 검

연우는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이들 사념체는 하나하나가 웬만한 하이 랭커들도 상대하기 힘든 전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시련의 내용도 실력을 ‘증명’하라는 것이었지, 절대 ‘이겨라’가 아니었다. 거인족은 강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만큼, 실력만 충분히 보인다면 시련 통과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연우가 스테이지에 있는 모든 사념체를 깨우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더 이상 ‘증명하라’가 아닌, ‘꺾어라’가 되었으니. 그들 모두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우는 루시퍼의 힘을 깨울 정도로 강해진 상태에서도 피부를 따끔거리게 할 정도가 되는 저들의 전의에 입술이 말라 옴을 느꼈다.

‘발데비히도 여기를 통과하기 위해서 꽤 많은 고생을 했다고 했지?’

히든 퀘스트의 보상인 대전사 칭호는 히든 스테이지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 하지만 발데비히는 초창기에 이들을 전부 쓰러뜨릴 만한 힘이 없었기에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에는 해내고 말았지만.

연우는 천천히 허리띠 뒤쪽에 걸려 있던 마장대검을 꺼냈다. 간만에 만져서 그런지 그립감이 괜찮았다.

빠르게 놈들을 치우기 위해서는 그림자 속에서 권속들을 꺼내는 게 제일 빠르겠지만.

‘굳이 지금 깨울 필요는 없겠지.’

그의 권속들은 단순히 동면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사고 시간으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깊은 사고 수련(思考修練)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샤논, 한령, 레베카, 부. 심지어 비그리드에서 따로 빼내었던 흡혈군주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기로에 섰다는 뜻이었다.

연우는 그것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들이 스스로 깨어나기 전까지는 내버려 둘 참이었다. 그가 허물을 벗고 나타났던 것처럼, 그들도 새롭게 탈바꿈한 모습으로 나타날 테지.

그래서 다시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몸을 날리려는데.

『나의 몸……! 그토록 찾고 싶었던……! 하지만 놈이 훔쳐 갔던……! 나의 육체……! 네놈이 갖고 있구나……! 네가 그 도둑이구나……!』

‘뭐?’

연우는 프로그래밍 된 언어가 아닌 새로운 말을 처음으로 내뱉는 전사장의 사념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두 눈이 더 거칠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여태껏 보였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적의였다.

[봉인되었던 ‘전사장의 영혼’이 해방되었습니다.]

[‘전사장의 영혼’이 당신과 권속이 지닌 홀(笏)을 감지하고, 돌려 달라며 강하게 항의합니다!]

[‘전사장의 영혼’이 강한 적의를 핍니다.]

[머나먼 칠흑과 공허로부터 ‘전사장의 영혼’이 사념체에 강제 강림을 시도합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 감염된 ‘혼돈의 거마(巨魔)’가 강림합니다.]

[휘하에 있는 모든 망령들이 거마로 전생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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