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공적(公敵) (6)
‘해골왕의 홀!’
연우는 어째서 갑자기 거인족의 망령들이 돌변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40층대를 돌파하면서 부에게 파우스트로서의 각성 재료로 주기 위해 만들었던 해골왕의 홀. 그것이 반응하면서 생각지 못한 변이(變異)가 발생한 것 같았다.
해골왕에 대한 전승은 자세한 것이 없었다. 동생도 이래저래 조사를 해 보면서 마지막 거인왕의 사체로 만들어진 언데드라느니, 타계의 신과 관련된 첨병이라느니, 하는 추측성 가득한 정보만 얻었을 뿐.
그 이상은 캐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연우도 더 이상 알아보지 않고 부에게 던져 줬던 것인데.
‘하지만 왜 지금 반응을 하는 거지? 정우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해골왕의 홀을 만들기는 동생이 더 먼저 만들었었다. 그리고 60층을 돌파한 적도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상황은 연우로서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동생과는 다른 어떤 조건이 추가된 걸까?
『내놓아라……!』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사장의 사념체는 이제 어느새 거대한 언데드로 변모해 있었다. 단단한 뼈의 형상을 따라, 근육이나 피부 따위가 넝쿨처럼 복잡하게 얽힌 상태. 스켈레톤 킹이나 자이언트 구울의 특징이 반반씩 뒤섞인 괴기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녀석은 연우를 정확하게 직시를 하면서.
쿠쿠쿠!
거대 검묘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천천히 위로 뽑기 시작했다.
그러자 격진이 지반을 뒤흔들고, 여태 검묘를 지탱하고 있던 언덕이 그대로 붕괴되었다.
그러다 거대 검이 완전히 뽑히며 끄트머리가 하늘에 다다랐을 때, 녀석을 중심으로 막대한 마력장이 동심원처럼 연신 퍼져 나갔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마력이 스며든 마력장이 ‘위대한 옛 전사들의 군단’에 퍼져 나갑니다.]
[‘위대한 옛 전사’들이 ‘감염’ 상태로 변합니다.]
[‘옛 전사1’이 변이합니다.]
[‘옛 전사2’가 변이합니다.]
……
[‘감염된 거마 군단’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념체들 전부가 전사장과 똑같은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형태의 언데드로 변모했다. 사념체가 아닌 새로운 육체를 가졌기 때문일까, 그들의 투기는 이전보다 훨씬 대단해져 있었다.
콰콰콰!
대기가 들끓고, 천지가 격동했다.
전의(戰意)와 투기(鬪氣)가 마구잡이로 뒤섞이면서 연우의 살갗을 따갑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신이나 악마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막강한 격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것은.
지금은 잊혔으나, 한때는 전 우주와 차원을 호령하고 병탄하면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애썼던 위대한 옛 전사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비마질다라가 회상에 잠기며 가만히 미소를 짓습니다.]
[케르눈노스가 피식 실웃음을 흘립니다.]
[모든 죽음의 신들이 ‘죽음’을 거역하고 다시 일어서려 하는 이들에게 강한 경멸감을 보입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옛 적수들의 등장에 눈살을 좁힙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대다수의 신들이 기겁합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대다수의 악마들이 턱을 쓰다듬으며 옛 적수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지 궁금해 합니다.]
98층에서도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려의 뜻을 표했다.
특히 신의 사회들이 가장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용종이 악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듯, 거인족은 신과 항상 대립하던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히든 퀘스트(위대한 옛 전사들의 군단)가 새롭게 주어진 환경 변화에 따라 갱신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왕의 증명)이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연우는 처음 본 단어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히든 퀘스트나 서든 퀘스트는 여태 본 적이 많았지만, 시나리오 퀘스트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시차 괴리를 이용해 동생의 일기장을 빠르게 뒤져 봐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지?
연우가 의문을 던지는 사이, 새로운 퀘스트 창이 열렸다.
[시나리오 퀘스트 / 왕의 증명 I]
설명: 머나먼 고대, 지금은 사라진 ‘거인’들이 있어 용맹과 의기만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결국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에 대한 전승과 신비도 모두 사라지게 되어 그들을 추모하거나 기억하는 이들조차 전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거인족의 마지막 왕이자 전사장이었던 ‘발데비히’는 그런 세월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머나먼 타계의 존재와 계약을 맺으며 ‘해골왕’이라는 존재가 되기도 했으나, 그조차도 결국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데비히’가 간절히 품었던 염원은 죽어서도 남아, 다른 누군가가 계승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데비히’와 휘하의 거인들은 60층에 수많은 검묘를 남겼고, 자신들의 사념체를 남기며 오랜 세월 동안 구도자들을 시험하며 관찰해 왔습니다.
거인들이 품었던 염원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전 우주와 차원, 그 위에 우뚝 서는 것!
그들과 오랫동안 대적해 왔던 신, 악마, 용종은 물론, 동족들을 포함하여 태초신과 개념신도 밟고 올라서서, 그리고 나아가 머나먼 존재들조차도 딛고서 가장 위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하였으니, 그들의 힘과 명맥을 이은 다른 누군가가 그 염원을 이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왕(王)’의 탄생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발데비히’가 지녔던 홀을 품어 왔고, 거인들의 사념체를 모두 깨우면서 스스로 시련의 대상이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오랫동안 잠에 시달린 나머지 미몽 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을 모두 ‘기어 다니는 혼돈’이 만들어 낸 미몽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이 내건 시험을 통과하여 ‘대전사’의 호칭을 획득하세요.
그리한다면 ‘발데비히’로부터 첫 번째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한 조건: ‘해골왕의 홀’ 소유자. 히든 퀘스트 ‘위대한 옛 전사자들의 군단’ 소지자. 일정 이상의 상격(上格).
제한 시간: -
보상:
1. 칭호 ‘대전사(大戰士)’
2. 히든 스테이지 ‘무너진 거인의 땅’의 입장권
3. 해골왕의 검
4. 첫 번째 왕의 증표
5. 연계 퀘스트 ‘왕의 증명 II’의 참여
‘거인족의 힘을…… 계승할 수 있다고?’
연우는 시나리오 퀘스트에 나타난 내용을 살피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퀘스트 창에 적힌 내용은 거인족의 비밀을 쫓는 이들이 본다면 전부 뒤집어질 정도로 큰 사실을 담고 있었다. 그들이 사멸하게 된 이유를 적시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연우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거인족의 힘을, 그것도 그들의 정점이었던 ‘왕’의 힘을 계승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절대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사실 한낱 평범한 인간이 용체 각성을 이룬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보다 마신룡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세 종족의 인자까지 품을 수 있었던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했던 건, 동생과 연우에게 힘을 건네준 용종이 마지막 용왕이었던 칼라투스라는 점이 컸다.
그는 용종이 남긴 모든 지식 체계를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용종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으니. 그런 성질을 물려받았으니 그 모든 이적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왕’이 가진 자질과 재능은 한 종족 내에서도 단연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인족의 마지막 왕, 해골왕의 본체였던 존재의 자질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거인족의 인자를 필요로 했던 연우로서는 절대 놓칠 수가 없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정말이지 끼어들지 않는 구석이 없는 것 같다고.
‘혼돈의 거마’라는 명칭을 봤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무래도 녀석의 손길은 그가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깊숙하게 닿아 있는 듯했다.
* * *
[6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콰드드득-
연우는 자신의 힘을 전부 개방했다. 격도 해방되면서 사왕좌의 힘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여태껏 연우를 집어삼킬 듯이 굴던 녀석들의 적의가 한순간 떠밀려 났다.
쿵-
쿵!
연우는 ‘거마(巨魔)’들이 밀려나 뒷걸음질 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녀석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분노로 변했다. 거인족이나 되어 한낱 인간 따위에게 밀렸다는 사실에 강한 분노를 느낀 것이다.
『쿠어어어!』
『크아아!』
녀석들은 하나같이 포효를 내지르면서 손에 들고 있던 거대 검을 잇달아 연우에게로 휘둘렀다. 작게는 수 미터, 크게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연우는 마장대검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드래곤 하트와 현자의 돌이 강하게 공명하면서 마장대검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크게 떨렸다.
쩌어엉-
맑은 검명과 함께.
파직, 파지지직!
칼날 위로 검고 붉은 불꽃이 스파크처럼 튀어 오르더니, 끝내 강하게 응축된 뇌기가 되면서 하늘까지 높게 다다랐다.
검뢰.
유성검결을 극한으로 압축시키고, 시원의 불로 재탄생시킨 힘을 횡대로 휘두르자.
콰아아아앙-
근처에 있던 거마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부서진 검 조각이 허공으로 튀고, 잘린 팔다리가 피를 뿌리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하지만 검뢰는 끝까지 저 너머에 있는 지평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 뒤에 있던 상급 전사에 해당하는 거마들이 일제히 거대 검을 아래로 내리면서 검뢰를 튕겨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신에 흩어진 검뢰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구릉이며 언덕을 모조리 밀어 버렸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우선 저들의 전력을 살피기 위해 가볍게 시험 삼아 검뢰를 뿌려 봤다지만, 너무 쉽게 튕겨 낸 것이다.
아무래도 녀석들 개개인이 신격쯤 되는 영격(靈格)을 지녔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들의 너머에 있는 전사장-혼돈의 거마는.
‘마해의 왕과 비슷한 급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올포원이 당장 저 하늘에서부터 문을 열고 제재를 하러 내려와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라는 것이다.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히든 스테이지로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녀석들이 동시에 거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공간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마력이 압축된 검풍이 하늘로 비산했다가, 소낙비처럼 연우의 머리 위로 잔뜩 쏟아졌다.
연우는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에 마력을 최대 출력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마장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우르르, 콰콰콰광!
그 순간, 여태껏 선보였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검뢰가 지상으로 작렬했다. 방금 전에 연우가 보였던 것과는 절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힘이 담긴 일격.
검뢰가 작렬한 자리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크레이터가 파이고, 어마어마한 빛과 열을 동반한 먼지구름이 사방으로 몇 번씩이나 퍼져 나갔다.
이번에는 거기서 무사한 거마가 아무도 없었다. 영혼마저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죽음’을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든 버텨 낸다고 해도.
파바바박!
콰릉! 콰릉! 콰르르르-
연우가 마장대검을 연거푸 휘둘러 대면서 검뢰를 계속 쏟아 낸 까닭에 어떻게 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거대한 검붉은 채찍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대지를 후려치는 터라,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스테이지는 더 이상 쓸 수 없어질 정도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대학살.
연우가 보이는 광경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가 거마들을 휩쓸어 가는 내내,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의 신위에 경악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실력에 비명을 지릅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동맹 제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
[대다수의 신들이 침묵합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침묵합니다.]
신과 악마들이 그를 보면서 경악을 하다, 끝내 침묵했다.
연우도 굳이 천계의 시선을 가리지는 않았다. 마성과 싸울 때와 다르게 지금은 굳이 노출될 전력이란 게 없었으니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싸움이 어떻게 그런 게 될까.
그리고.
[‘감염된 옛 전사32’가 소울 컬렉션에 귀속되었습니다!]
[‘감염된 옛 전사2,017’이 소울 컬렉션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녀석들의 망령이 속속 소울 컬렉션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확하게는 거인족의 영혼이 아닌 사념체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한때, 신들과도 대적했을 정도로 대단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거인족의 영혼이라면. 필멸자의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전부 권속들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 생전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한 디스 플루토도 반색할 터였다.
혹은.
‘새로운 군단을 형성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연우의 두 눈이 기이한 빛을 토해 내고.
[‘감염된 옛 전사 1,994’가 소울 컬렉션에 귀속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버티던 거마의 상반신이 그대로 찢겨 나가면서, 결국 마지막으로 전사장의 사념체만 남았을 때.
콰직!
『아, 안 돼……!』
전사장의 오른팔이 거대 검을 든 채로 통째로 잘려 허공으로 튀었다. 녀석의 눈가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 녀석을 향해.
[하데스의 식령검]
연우는 왼손을 활짝 펼치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모든 것까지 흡수하고자 하였다.
거인족의 인자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