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03화 (503/862)

3화. 시나리오 퀘스트 (3)

어째서 이곳에 타계의 신이?

연우의 두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탑 내에서 타계의 신이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어 다니는 혼돈이 칼라투스를 이용해서 의념을 투사했던 적은 있었다. 타계 신의 사체가 마해라는 미개척지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계의 신이 직접 히든 스테이지에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

애당초 플레이어의 자격도 얻지 못한 녀석들이, 시스템의 지배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무리 녀석들이 칠흑왕의 유산을 찾아 탑 내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그들의 지고한 자존심상 ‘지배’를 받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아니, 그보다 아무리 올포원이 간섭을 크게 하지 않는 히든 스테이지라고 해도, 녀석이 그동안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의문은 잠시.

콰르르릉!

연우는 마장대검에 맺혀 있던 검뢰를 곧바로 녀석에게로 휘둘렀다.

타계의 신은 필멸자를 벌레처럼 생각하는 녀석들. 아직 탈각을 시도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녀석에게 함부로 영역을 침범한 ‘잡것’으로 느껴질 터였다.

실제로 그가 누군지 묻는 의념 속에서도 귀찮음과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귀찮은 것이 들어왔으니 그냥 치워 버리겠다는 의지에 가까웠다. 인간이 팔뚝 위에 모기가 내려앉으면 그냥 눌러 죽이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기에 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검뢰를 뿌렸다. 어차피 대답을 해도, 녀석은 벌레가 앵앵거린다고 여기며 더 짜증만 부릴 게 분명했으니.

대지에서부터 검뢰가 검붉은 채찍처럼 치솟으면서 타계 신의 몸뚱이에 작렬했다.

그저 단순히 필멸자가 용을 쓴다고 생각했던 타계의 신은 설마 하니 이런 강렬한 공격이 날아올지 생각도 못 했는지 흠칫거리며 뒤늦게 몸을 물렸지만.

콰콰콰콰-

화 속성을 넘어 이미 광 속성에 가까운 검뢰는 광속(光速)으로 움직이는바.

녀석이 미처 피하기도 전에 검뢰는 몸뚱이의 정중앙을 꿰뚫은 지 오래였다.

휑하게 뚫린 바람구멍을 따라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녀석의 몸뚱이 전체를 휘감고, 검뢰는 저 높은 하늘에까지 다다랐다가 다시 지상으로 다른 벼락들을 고루 뿌려 댔다.

크어어어-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 댈 때마다 스테이지가 요란하게 격동했다. 신력을 움직여 불길을 꺼뜨리려는 건지,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법칙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자체 회복도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콰르르-

한번 불붙은 검뢰는 도무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옵션들 때문이었다.

[불의 파도 - 지글거리는 불씨]

[72선술 - 열(裂), 파(破)]

검뢰를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 불의 파도 속에 담긴 ‘지글거리는 불씨’는 상대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까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을 자랑한다.

더구나 다른 곳으로 불똥이 튀면 그것이 다시 연쇄 폭발을 일으키니, 쓸데없이 덩치가 비대한 타계의 신으로서는 대미지가 누적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기다 72선술까지 가미되니, 녀석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이제 연우가 부리는 72선술은 말만 같을 뿐, 이전의 선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선술(仙術)은 원래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그 틀을 넘어선 신선들을 위한 마법 체계. 당연히 격이 높을수록 거기에 대한 이해도나 숙련도도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연우는 창공 도서관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천마의 움직임을 숱하게 보기도 했었다.

천마는 72선술을 주로 사용했던 미후왕을 수많은 ‘얼굴’ 중 하나로 뒀던바.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아 그의 움직임에도 72선술이 잔뜩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손짓 하나하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선술의 극치가 가미되어 있었고, 심지어 창공 도서관을 움직이는 법칙도 선술이 바로 그 바탕이었다.

그러니 용신안과 화안금정을 지니고 있는 연우로서는 그것에 완 전히 홀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닿고자 하는 무(武)의 궁극적인 형태가 바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건 수많은 외뿔부족의 왕들도 닿지 못했던 미답의 경지였으니. 스승인 무왕도 보고 있을까 싶었던 위치였다. 그것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있을까.

덕분에 연우는 자신이 구축했던 아트만 시스템을 다시 한 번 더 상위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고.

의념 속에 72선술을 섞는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의념이 담기고, 그리고 그 뒤에 선술이 저절로 따라오면서 모든 스킬과 권능을 인도하는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연우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은 또 한 걸음 〈음검(陰劍)〉에 가까워졌노라고.

자신의 의념과 집념을 모두 불어넣어 검, 그 자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심상을 외부로 발현시켜 끝내 세상을 바꾸는 것.

그것이 음검을 여는 단초였다.

그러니 검뢰는 창공 도서관에 오르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타계의 신은 단 한 번의 충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통한다.’

연우는 완전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검뢰가 마해의 왕이나 다른 타계의 신들에게도 충분히 통할 거란 자신감은 은연중에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충돌해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녀석이 기어 다니는 혼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개체라는 점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꾸우웅-

너. 는.

무. 엇. 이. 냐.

녀석이 길게 울음을 토하면서 연우에게 강렬한 적의를 토해 냈다. 신력이 움직이면서 녀석을 따라 수많은 빛살이 형성되어 연우의 머리로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전부 웬만한 하이 랭커들도 쓸어 낼 수 있을 만한 강렬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연우는 지지 않고 마장대검을 잇달아 허공에다 뿌렸다.

[팔극검 - 단천]

[무결참]

언젠가 무왕이 그를 데리고 11층의 도시, 쿠람을 반파시킬 때에 보여 줬던 것과 똑같은 무공을 전개했다. 그가 언젠가 깨달았던 검초(劍招)를 동반하면서.

쿠르르릉!

덕분에 하늘과 대지를 잇는 검뢰가 수도 없이 작렬하면서 타계의 신을 거의 절반 이상 파훼하다시피 했고.

녀석은 끝내 연우를 당해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피투성이가 된 몸을 크게 휘청이면서 자리를 어떻게든 떠나고자 했다.

“어딜.”

하지만 그걸 그냥 보내 줄 연우가 아니었다.

철컥, 좌르르륵-

칠흑왕의 형틀에다 마력을 불어 넣는 순간, 단단히 잠겨 있던 쇠사슬 끝이 풀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주변으로 자그마한 공허가 수도 없이 열리고, 그 사이로 검은 쇠사슬이 빠르게 관통하며 움직였다.

철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은 어느새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며 수백 미터는 족히 넘을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를 단번에 결박시켰다.

놓. 아. 라.

꾸어어어-

놓. 아. 라!

녀석이 괴로움에 몸부림을 칠 때마다 쇠사슬은 더더욱 강하게 옥죄어 갔다. 어떻게 형체를 포기하고 무형(無形)이 되어 빠져나가겠다는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연우가 부리는 쇠사슬은 위대한 칠흑왕조차도 공허에 처박아 뒀던 금속. 당연히 녀석 같은 하위 존재가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쇠사슬에는 여의봉의 조각도 가득 담겨 있어 연우의 의지대로 너무 잘 움직였다.

지속적으로 검뢰를 계속 떨어뜨리며 녀석의 체력을 착실하게 깎아 나가는 전략도 유효했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저항을 거의 포기한 것인지 움직임이 가라앉았다.

너. 는.

너. 는.

칠. 흑. 후. 예.

어. 떻. 게.

그저 뒤늦게 연우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는지, 불신이 가득한 의념을 가득 내뱉었다. 정확한 뜻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떻게 그가 여기까지 왔는지 의문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에게 대답해 줄 의무 따윈 없었다.

일단은 생포를 했으니 녀석을 잡아다 여기에 대해서 심문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연우는 손에 잡힌 쇠사슬을 바짝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바로 그때.

이. 대. 로.

포. 기. 못. 한. 다.

녀석이 갑자기 대가리를 위로 치켜들더니 구슬프게 울었다. 여태껏 분노를 토하던 울음소리와는 전혀 다른 의념파.

연우는 녀석이 혹시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검뢰를 다시 뿌릴 준비를 하려다가, 이상 행동을 보이자 인상을 팍 굳히고 말았다. 대체 뭘 한 거지?

그러다 뒤늦게 녀석의 노림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쿠어어!

크롸롸-

녀석에게 호응하듯이, 갑자기 스테이지 곳곳에서 여러 타계 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

‘뭐? 이 녀석 말고도 더 있다고?’

탑 내에 기거하고 있는 타계 신의 무리라니.

이 녀석이 있는 것도 이상해서 조사해 볼 생각으로 생포하려던 거였는데.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 더 있는 것이라면, 그건 더 큰 문제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이 스테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무리 이곳이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사로잡혔던 거인족들의 무덤이고, 그로 인해 녀석의 신력으로 가득 차 마해와 비슷한 환경으로 변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녀석들이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고 올포원이나 중앙 관리국, 그리고 천계까지 이 지경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부름에 따라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건, 분명히 타계의 신들이었다.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신력은 녀석들 말고는 없을 테니.

난. 여. 기. 죽. 어. 괜. 찮.

하. 지. 만. 너. 는.

같. 이. 죽. 을.

더구나 녀석은 자신의 시체를 미끼로 던져 다른 타계의 신을 부른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이야 이대로 죽을 운명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연우도 같이 휩쓸리게 할 생각이었겠지.

‘이건…….’

연우는 어쩐지 녀석의 모습이나 주변 환경에서 기시감을 느껴야만 했다.

어쩌면 무질서와 혼돈이 법칙이 된 녀석들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생태계가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게도 만드는군.”

연우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쇠사슬을 다시 잡아당겼다. 그러자 쇠사슬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그림자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녀석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마성을 비그리드째로 가둔 것처럼, 우선 녀석도 가둬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사장의 신물을 먹이면서 그림자도 강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총용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차라리 잘되었어.’

촤르르륵-

연우는 더 많은 쇠사슬을 한껏 풀어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들 전부가 지금 잡은 놈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상위 개체인 것이 분명한 것들.

가뜩이나 타계의 신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이때, 이것들을 전부 생포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볼 수 있다면 녀석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 히든 스테이지가 왜 이리 엉망이 되었는지, 왜 여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뒀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브라함이나 부가 아주 좋아하겠어.’

물론, 전부 사냥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표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우선 잡을 수 있는 데까지 잡아 볼 생각이었다.

도망치기에 급급하고, 살아남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마해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촤촤촤촤!

검은 쇠사슬이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뱀처럼 몸집을 크게 일으켰다.

밀림은 검뢰의 계속된 작렬로 새카맣게 타 버린 폐허가 되어 있어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연우의 두 눈은 광기마저 띠고 있었다.

그리고.

쿠쿠쿠쿠!

수십 마리에 달하는 타계의 신이 활짝 열린 밀림의 하늘을 가득 덮으며 다가왔다.

녀석들은 별다른 의념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영역을 유린하려는 연우를 죽일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놈이 당한 것을 확인했으니, 처음부터 공격은 아주 강렬했다. 수많은 빛살이나 촉수 같은 것들이 잇달아 쏟아졌다.

연우도 똑같이 움직이려던 그 순간.

“미쳤다! 너!”

갑자기 타 버린 수풀 사이로 커다란 뭔가가 불쑥 나타나더니 연우의 허리를 낚아챘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3미터쯤 되는 거구. 전신이 흉터로 가득한 자였다.

연우는 불청객의 난입에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얼굴을 본 순간 몸이 흠칫 굳고 말았다.

그사이. 불청객은 우람한 왼쪽 팔뚝으로 연우를 감싸 안으며 탈출을 시도했다. 오른팔로는 제 키보다도 훨씬 큰 검을 높이 들면서 허공에다 강하게 휘저었다.

콰콰쾅!

그러자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거대한 마력장이 형성되어 타계 신들의 공격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타계의 신들은 재차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신력을 끌어모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연우와 불청객은 자취를 완전히 감춘 뒤였다. 그들의 인지 영역에도 두 사람의 기척이 전혀 감지되질 않았다.

꾸어어어!

바로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타계의 신들이 거친 분노를 드러내는 동안.

“무슨 짓! 저들 상대 힘들……!”

『저들을, 그것도 한두 놈도 아니고 수십 놈이나 앞에 두고서 이런 짓거리라니! 제정신인가!』

연우는 자신을 구해 준 자와 함께 큰 바위 뒤쪽에 마련된 결계에 숨어 있었다.

불청객은 연우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이 어눌해 답답했던지 재빨리 어기전성으로 바꾸어 소리쳤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얼굴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며 쉽사리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

“발데비히, 역시 여기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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