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시나리오 퀘스트 (7)
누에고치처럼 몸을 칭칭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실타래 풀리듯이 풀렸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것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샤논…… 맞나?’
연우는 자신이 소환을 하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선 존재를 보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샤논의 생김새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우선 크기부터 차이가 컸다.
이전에도 웬만한 플레이어들을 거뜬히 뛰어넘는 체구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2미터를 훌쩍 넘는 거구였다. 발데비히와도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일 것 같았다.
거기다 칠흑색으로 반짝이는 무구나 품에 안고 있는 소드 브레이커들도 한층 크고 두꺼워진 상태.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풍기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샤논을 칭칭 감아 도는 검은 기운들은 연우의 그림자를 많이 닮아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깊이도 지니고 있었으니.
연우는 바뀐 샤논을 보면서 그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의 냄새.
산 자들을 모두 그대로 빨아들일 것만 같은 죽음의 향기가 너무 강렬하게 풍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향기는 살벌한 기세를 내포하고 있어, 금방이라도 들끓을 것처럼 굴었으니.
그것은 투쟁의 냄새이기도 했다.
약자를 굴종시키고, 강자에게는 투기를 드러내는 힘.
‘내 신성이 깃든 건가?’
아무래도 자신의 신위에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변태(變態)를 이룬 모양이었다.
그래서 녀석을 가리키는 명칭도 달라져 있었다.
[데스 로드]
위치: 권속
설명: 죽음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자신의 주인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지옥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신의 첫 번째 권속이자 충실한 기사, 그리고 위대한 장군으로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퍼뜨리고자 노력할 것이다.
특이 사항: 현재 품고 있는 ‘용력(勇力)’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완성을 이루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데스 로드라.’
그 전에 지니고 있던 명칭은 데스 노블. 한 단계 이상 격상하게 된 것이다. 확실히 녀석은 이제 ‘로드’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으니.
특히 특이 사항란에 나온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식탐황제로부터 빼앗아 샤논에게 부여했던 ‘력’이 새로운 단계로 진화 중이라는 부분.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벌써 궁금했던 것이다.
‘이미 지금만 해도 아홉 왕과 비견해도 될 정도인 것 같은데. 어쩌면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일지도…….’
전력이 강해진다는 건 언제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연우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제천류를 가장 깊게 탐구했던 것은 연우가 아닌 샤논과 한령이었다.
무공 외에도 마법이나 연금술, 칠흑의 권능 등 신경 써야 할 분야가 많았던 연우와 다르게, 그들은 철저하게 무인의 입장에서 제천류를 깊게 탐구했으니.
특히 샤논이 가장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화염륜과 신목령에 대한 깨달음은 연우도 이따금 녀석에게 강론을 들을 정도이기도 했다.
그러다 천마를 만나고, 계시록의 원전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야를 갖게 되었으며.
여기에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아니, 의식 세계에서는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참오만 거듭한 셈이니, 발전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인 것이다.
『이게…… 뭐지?』
그때, 발데비히가 살짝 눈썹에 경련을 일으키며 샤논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피부를 따라 오한이 잔뜩 돋아 있었다. 그의 눈빛도 한껏 살벌했다. 광기마저 감돌았다. 숙적을 만났을 때에나 보이는 모습.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타계의 신들과도 충돌할 정도인 검야차도 긴장하게 할 만한 정도란 말이지?
연우는 속으로 샤논이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더불어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건 바로 그가 아닐까. 때로는 깐족대는 면이 밉기도 하지만, 사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동행자인 셈이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 권속.”
『뭐? 이런 존재가……?』
발데비히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연우를 봤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 그렇겠거니 하고 여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계의 신도 공허에다 아무렇지 않게 가두는 놈인데, 이런 권속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다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런 권속이 한두 명이라도 더 있다면……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겠다던 약속도 불가능하지만은 않겠다고.
그러던 그때.
번쩍!
검은 투구로 가려져 있던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인페르노 사이트. 죽은 자들이 물질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 는?」
마치 가뭄으로 메마른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지옥, 저 밑바닥에서 음산하게 퍼지는 울음소리만 같아, 발데비히는 다시 한 번 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을 느껴야만 했다.
연우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일어나, 샤논. 그만큼 잤으면 충분할 텐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츠츠츠츠-
샤논이 검은 기운을 안개처럼 한껏 뿌려 대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그럭, 철그럭!
끼리릭-
마치 오랫동안 멈춰 있던 기계가 재작동하는 것처럼 삐거덕대는 움직임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관절 부근에서 더 많은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움직임이 보다 활발해졌다.
그리고 소드 브레이커를 지팡이 삼아 완전히 몸을 일으켰을 때, 다시 한 번 더 사방으로 막강한 기운이 회오리쳤다. 그림자가 바닥을 따라 잔뜩 뻗쳐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기만 하던 반거인의 모옥들이 강풍에 휩쓸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발데비히가 재빨리 마력파를 퍼뜨리면서 강풍을 비껴가게 하는 동안, 샤논이 천천히 연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불러도 빨리도 부르는군.」
샤논의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했다. 영 탐탁지 않다는 투가 가득했지만, 그 어조가 연우에게는 너무 친숙하게 다가왔다.
“알다시피 해야 할 일이 좀 많았던 까닭에.”
「덕분에 주인만 보고 사는 우리로서는 지루한 시간을 어찌하기가 아주 힘들었단 말이지.」
연우야 계시록의 원전에 흠뻑 빠져 있어 시간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지만, 권속인 그들은 아니었다.
연우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되, 의식은 분리된 별개 인격체들이니. 당연히 그 긴 시간이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참오를 거듭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들을 여태 잊고 있었던 게 조금 얄미웠던 것이다.
「더구나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앞에 두고 있던 차였는데…… 그걸 그새 못 참고 깨우나?」
‘력’의 진화. 그것은 어찌 보면 샤논에게 새로운 ‘업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연우가 죽음과 투쟁이라는 신성을 가졌듯, 그도 ‘력’을 발전시킨 새로운 신화를 쓸 수 있었단 뜻이었다. 그리고 그 완성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던 차였는데 깨우고 말았으니.
이래저래 샤논으로서는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너무 재촉하지 마라. 시간이 좀 더 길어진다 뿐이지, ‘력’의 완성은 언제든 이룰 수 있는 거잖나? 천 년을 참오했는데, 고작 몇 개월이 더해진다고 해서 투덜거릴 필요는 없을 텐데.”
「쳇. 그래도 너무 아까…….」
“싫으면 딴 놈에게 주고.”
「젠장! 그놈의 인성질은 어째서 아직도 그대로인 거냐! 하여간……!」
샤논은 투덜거릴 틈도 주지 않으려는 연우를 보면서 연신 구시렁거렸다.
사실 연우도 샤논 등이 직접 의식을 차리기 전에는 깨울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를 깨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발데비히는 그런 샤논을 다시 멍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끝판 대장처럼 위압감 넘치던 모습에서 갑자기 경망스러운 모습으로 바뀌니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뭘 보냐? 죽은 놈 처음 봐?」
샤논은 그런 발데비히의 시선을 느끼고, 괜히 화풀이를 그쪽에다 해 댔다.
발데비히는 이게 뭔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
「처음 보나 보네. 그럼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거야. 우리 인성왕 옆에 있으면 원래 줄줄이 죽어 나가거든.」
『…….』
발데비히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왠지 모르게 샤논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샤논이 다시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외로 비딱하게 꼬면서 물었다.
「그래서 부른 이유가 뭔데?」
“너, 레드 드래곤에 있을 시절에 훈육 교관도 해 봤다고 했었지?”
「그런데?」
연우는 여전히 자신에게 말도 못 붙이고 덜덜 떨기만 하던 반거인들을 떠올리면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맡아 줄 사람들이 있다.”
* * *
「이봐, 주인님.」
‘왜?’
「……이것들 전부 그냥 주인이 전부 흡수하는 게 어때?」
‘안 돼.’
「에이, 그러지 말고 다시 고민해 봐. 그럼 주인이 찾던 거인의 인자도 해결해, 디스 플루토에 편입시켜서 훈련시키기도 편해, 그럼 내 골칫거리도 치워. 일석삼조라고, 응?」
‘통신 끊는다.’
「야이씨! 대체 이런 놈들을 데리고 뭘 하란……!」
연우는 샤논의 반항을 단번에 묵살시키면서 채널링을 잠깐 차단했다.
지금쯤 길길이 날뛰고 있을 샤논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마음 편했다.
그때, 연우는 발데비히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러지?”
『아니, 정말 그렇게 놔둬도 되나 싶어서. 봤다시피 강요하면 할수록 주눅이 들 사람들이라, 걱정이 계속 되어서…….』
연우와 발데비히는 반거인들을 샤논에게 맡기고 마을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발데비히로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거인들은 이미 뼛속 깊이 사육화가 진행되어 있는 상태. 그도 오랫동안 그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미 타성에 단단히 젖어 있어 억지로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더 움츠러드는 경향이 짙었다.
그런데 그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샤논만 붙여 놓았으니. 자신도 샤논의 위압감에 위험을 느낄 정도였는데, 반거인들이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거기다 연우에게 개기는 걸로 봐서는 샤논의 성격도 만만치 않은 듯했으니.
“돼.”
하지만 연우는 그런 발데비히의 우려를 너무 쉽게 묵살했다.
『하지만.』
“하면 된다.”
『그래도…….』
“그냥 하면 돼.”
『…….』
발데비히는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연우는 길을 여는 데만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뭘 걱정하는지 잘 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듯, 그들도 갑자기 바뀌라고 재촉하면 힘들겠지. 사람마다 성향이란 것이 있고, 환경 차라는 것이 있는데 강제적인 일반화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원래대로라면 차차 시간을 들여서 바꿔 나가야 하는 게 맞아.”
『…….』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어. 이곳은 점점 반거인들이 살기에 좋지 않은 환경으로 변하고 있고, 위쪽 층계는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일변하고 있다.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해.”
연우는 현시점의 탑이 어쩌면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크게 격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여기고 있었다.
천계와 올포원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타계 신들의 진입이 계속 가속화되고 있는 이때. 그리고 마해도 미쳐서 요동치며, 하계에도 큰 바람이 불어닥치는 지금. 머지않아 크나큰 환란이 닥칠 게 분명했다.
거기서 반거인이 ‘거인족’으로서 살아남으려면. 도태되지 않고, 종족으로서 생존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 채로 빠른 변화를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봤을 때, 지금 소극적인 반거인들에게 필요한 건 설득이나 동기 부여가 아니었다. 독선이라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강제로 끌고 나서야만 했다.
지탄을 받는 건 바로 그 뒤에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왕이란 존재는 때로 그런 결단력도 필요로 했다.
『…….』
발데비히도 연우의 그런 속내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동족들이 잘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보다.”
연우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화제를 돌렸다.
“길은 여기가 정말 맞나?”
『맞아. 네가 찾는 ‘유적지’라는 것이 이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족들의 말로는 이곳이 옛 선조들이 머물던 터전이라고 하더군.』
연우는 시나리오 퀘스트의 내용을 재점검했다.
거인족의 신과 왕으로서 증명해야 할 첫 번째 임무, 유적지 탐방 및 조사.
퀘스트는 분명히 여기에 거인족이 남긴 어떤 비밀이 있다고 했다.
‘무슨 안배라도 남겨 놓은 건가?’
연우는 그렇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거인족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단순히 기어 다니는 혼돈의 사냥개로만 부림을 받지는 않았을 터. 반격을 위해 비밀리에 어떤 패를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다만, 그걸 시도해 보기도 전에 사멸했을 뿐.
그렇다면 거기에 연관된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곳이다.』
탁!
연우는 발데비히와 함께 걸음을 멈췄다.
저 아래,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유적지가 보였다.
신전이나 마을 등, 터만 남아 있는 황량한 곳. 만약 발데비히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히든 스테이지의 흔한 황무지라고만 여기고 지나갔을 법한 곳이었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펼치며 유적지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규모는 족히 몇십만 평은 되는 듯,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엉망이군.”
『아무래도 잊힌 지 수천 년이 넘은 존재이니. 거기다 타계의 신들이 활보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렇게나마 남아 있는 것으로도 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발데비히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연우도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보이는 이곳에서 대체 뭘 찾으라는 건가 싶어 갑갑하기만 했다.
어디 유적 발굴단처럼 이곳을 전부 파헤치기라도 하라는 것인지. 문제는 터가 너무 넓어서 대체 어느 세월에 뒤지냐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감각의 영역을 넓게 퍼뜨려, 저 깊숙한 지하까지 면밀하게 훑었지만.
‘눈에 띌 만한 것은 없는데.’
지면 아래에 거인족이 쓰다 버린 유물들은 다량으로 묻혀 있었다. 브라함이나 부가 알면 아주 환장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연우에게는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망령들을 끄집어내어 더 샅샅이 뒤질까 싶던 순간.
‘석비?’
연우는 유독 터의 경계면 각각에 석비가 많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순간.
「주군.」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였다.
샤논 외에는 아무도 깨우지 않았는데, 어째서 깨어난 걸까.
「석비를. 조합. 하십시오.」
하지만 부는 별다른 설명 없이 자신의 할 말만 뇌까렸다.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연우는 그 아래에 깔린 기대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는 부가 이런 모습이라?
연우는 부가 뭔가를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고, 드래곤 하트를 회전시켰다.
“발데비히.”
『왜 그러나?』
“물러서.”
연우는 발데비히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발데비히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선 동안, 마력장은 유적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우우웅-
마력파의 영향을 받은 수십 개의 석비들이 일제히 공명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잘게 부서지거나, 글자가 거의 지워지는 등 훼손된 정도가 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들은 연우의 의지에 따라 시린 빛을 발하며 전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 저들끼리 이리저리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조각들이 다양한 형태로 조합되며 끝내는 아주 큰 석비가 되었다.
그러다 연우 앞에 툭 하고 떨어졌을 때.
새것처럼 깨끗해진 석비의 겉면에는 이상한 모양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연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글자였다.
『이것은……?』
발데비히는 여태껏 수백수천 번도 더 왔지만, 여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던 유적지의 비밀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메랄드 타블렛. 계시록이라는 것이지.”
『뭐?』
발데비히가 놀라며 연우를 홱 하고 돌아봤다.
연우는 계시록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면서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그도 창공 도서관에서 보지 못했던 뒤쪽의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발데비히, 너희 조상들은 초월자로서의 격도 한참 뛰어넘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을 아예 잡아먹으려 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