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시나리오 퀘스트 (8)
『그게 무슨……?』
발데비히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에메랄드 타블렛? 그로서도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과거 파우스트가 열렬히 탐구하고자 했다던 무명의 석판. 그것의 이름이 에메랄드 타블렛이라고 했다.
하지만 ‘계시록’이라는 단어는 들어 본 적이 없기에 눈살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며 물으려는데.
갑자기 하늘 곳곳에서부터 빗발치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끼고 인상을 잔뜩 굳혀야만 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들을 예의 주시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당신들을 노려봅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들을 관찰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동맹 서약의 갱신을 위한 검토를 시도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이를 악다뭅니다!]
……
발데비히는 천계에서 이렇게나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 저들은 항상 하계를 주시하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유희극을 보는 것처럼 저들끼리 떠들어 대기만 할 뿐,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위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발데비히는 거인족의 후예로 분류되어 몇몇 신과 악마들에게 관심을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보통 플레이어들은 평생 한 개체의 눈을 끄는 것도 힘든 게 사실이었다.
50층을 돌파한 랭커들 중에서 사도의 숫자가 가장 적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상위 신격으로 갈수록, 특히 최상위나 대신격을 이룰수록 하계에는 더욱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튜토리얼 때부터 발데비히가 줄곧 함께했던 비에라 듄이 예외적인 경우일 뿐. 막강한 돌풍을 일으켰던 차정우도 몇몇 신과 악마들이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숫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하물며 단체로, ‘사회’가 이렇게 직접 나서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어찌 예상을 그리 빗나가지 않느냐며 비웃음을 던지기까지 했다.
“역시 안달이 나 미쳐 하는군.”
『어떻게…… 된 거냐?』
“말했잖나. 계시록이라고. 이런 것이 남아 있는 걸 봐서는 너희 선조들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자세히 말해!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 못 하고 있지 않나! 계시록은 또 무엇이고, 저것들은 또 왜 저 모양인 건지!』
발데비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과 악마들의 지대한 관심이 그로서는 불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동족들을 구원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그토록 애원할 때는 듣는 적도 않던 것들이, 갑자기 유적지에서 나온 물건 때문에 발정 난 개처럼 흥분하는 꼴이라니!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계시록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의 모든 역사와 비밀을 담은 서책. 저자가 누군지는 도저히 알 수 없으나, 그 지식 중 일부만 가지게 되더라도 법칙을 초월하는 힘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설명하는 내내, 연우는 이곳을 보고 있을 신과 악마들을 놀리는 듯한 뉘앙스를 보였다.
아마도 그토록 바라던 계시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과율에 가로막혀 손을 대지 못하는 갑갑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테지.
연우는 일부러 놈들을 약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강해지게 된 것도 바로 그 계시록이란 것 때문이라고?』
“그래.”
『저 위의 것들이 계속 안달복달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천계에 갇힌 저들로서는 계시록에서 인과율에서 해방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
발데비히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초월자이니 불멸자니 하면서 고고한 척 굴어도, 결국 저들도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발데비히는 혀를 차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선조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갖게 된 거지?』
“그야 알 수 없지만.”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데비히는 천계의 시선이 격노를 꾹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확실한 건 저들보다도 훨씬 용감하다는 거지.”
[신의 사회, ‘천교’가 당신들에게 소심하게 항의합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계시록의 일부를 갖고 있어. 아마 거인족은 녀석의 사냥개로 부림을 당하면서 몰래 그걸 빼돌리고 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우연히 계시록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겠지. 비밀리에 계시록을 곳곳에다가 모으기도 했을 테고. 이건 그중 일부야.”
이것이 거인족이 찾은 계시록의 일부라는 사실은 방금 전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유적지의 첫 번째 비밀을 푸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직 풀지 못한 비밀이 더 있습니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세요.]
“하지만 생각만큼 때를 잡기 힘들었을 테지. 기어 다니는 혼돈이 그렇게 빈틈을 보일 정도로 만만한 놈이 아닌 데다가, 인질들도 걱정되었을 테니. 결국 후세대를 기약하면서 계시록을 이런 안배의 형태로 남긴 듯하고.”
『안배라…… 단순한 사냥개는 아니었다는 건가.』
발데비히는 작게 중얼거리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정신을 보고 나니 조상들답다 싶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들이었지만…… 어쩐지 발데비히는 유적지 곳곳에 남아 있는 그들의 강한 염원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하튼. 이런 것이 있다면 앞으로 일은 훨씬 더 손쉬워지겠는데.”
『어떻게?』
발데비히는 계시록이 주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직 와닿지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 계시록은 어디까지나 비장의 한 수가 생긴 것일 뿐, 아직 뭔가를 도모하기엔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다 찾지도 못했고, 찾는다고 해도 동족들을 훈련시키는 시간도 그만큼 들 텐데 어떻게 손쉬워진다는 걸까?
그 순간.
씨익!
연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발데비히는 왠지 모르게 연우의 웃음이 사악해 보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저도 모르게 움찔 떨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연우는 천계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어떻게긴. 이제는 우리가 저들에게 갑질로 후려칠 수 있단 뜻이지.”
[신의 사회, ‘말라흐’가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딜문’이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말없이 당신들을 노려봅니다.]
……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쓰게 바라봅니다.]
……
『아.』
발데비히는 그제야 연우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시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곳들이 저렇게나 많다면, 사용하기에 따라서 저들을 부려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어 다니는 혼돈이 거인족을 부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거인족이 신과 악마들을 부리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족들을 구원해 달라며 천계에 계속 치성을 드리던 발데비히로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런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드러내며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저것들을 봐. 우습지 않나? 더 웃긴 건, 저것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적의를 보였단 거야. 단순히 계시록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지.”
비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이 더 크게 비틀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는 꼴이라니. 저딴 것들을 신과 악마라고 여태 칭송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우스운지.”
연우는 석비를 손으로 들어 흔들면서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지? 한 톨이라도 더 얻으려면 이리 와서 꼬리라도 흔들어야 할 텐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르릉!
하늘이 잘게 떨리더니, 갑자기 수십 개의 벼락이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얼마나 강렬하던지 발데비히가 살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연우는 비웃음을 짓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사절, ‘토르’가 강림을 시도합니다!]
[‘천교’의 사절, 이랑진군이 강림을 시도합니다!]
[‘딜문’의 사절, ‘나부’가 강림을 시도합니다!]
……
[‘니플헤임’의 사절, ‘펜리르’가 강림을 시도합니다!]
[‘절교’의 사절, ‘왕천군’이 강림을 시도합니다!]
……
벼락이 내려앉은 자리를 따라 막강한 기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발데비히는 두 눈을 부릅떴다.
보통 하계에서는 발생하기 힘든 이벤트가 발생하고 있었으니.
초월자의 강림!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과율의 반발을 감당할 만큼 막대한 제물이 있어야 하고, 올포원의 감시망을 피해야만 한다. 더구나 어찌해서 강림한다고 해도, 하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일일 텐데.
더구나 이곳은 기어 다니는 혼돈을 비롯한 타계 신들의 신력이 가득한 세계. 그것을 뚫고 화신체를 강림시킨다는 것은 웬만한 대가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각 사회들은 그런 대가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너도나도 앞다퉈서 ‘사절’을 보내고자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각자 사회에서 고위 서열을 자랑하는 이들.
토르는 아스가르드가 자랑하는 최고 전사였으며, 이랑진군은 천교를 상징하는 삼신장(三神將)의 한 명이었고, 나부는 딜문의 수장인 마르두크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그 외에도 서로 간에 적대 관계를 이루는 이들도 있었다.
늑대의 형상을 가진 펜리르는 토르를 보면서 으르렁거렸고, 왕천군은 이랑진군을 확인하고 얼굴을 잔뜩 굳혔다.
하지만 그들은 적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서로 간에 눈치를 보며 절대 허투루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싸우면 싸울수록 얼마 안 되는 인과율마저 전부 소진해 버릴 테니.
더구나 사절로 온 이상, 그만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것은 천계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철칙이며 불문율이었다.
즉.
‘이들 전부가…… ###을 자신들과 같은 동격(同格)으로 인정한단 뜻인가?’
발데비히는 다시 한 번 더 충격으로 몸을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언제나 필멸자를 한낱 벌레 따위로 취급하던 초월자들이 이런 모습이라니.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저들로서도 자존심이 많이 상할 테지만, 아무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연우가 가진 석비도 석비지만, 그가 가진 힘도 그만큼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아니, 우리는 그만큼 대단한 신을 모시게 된 것이로구나.’
발데비히는 다시 한 번 더 연우가 밟은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층 더 강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정말 이 지긋지긋한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노라고!
그런 발데비히의 열망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강신을 시도한 토르가 입을 열었다. 천둥의 신답게 그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차 천지가 위아래로 크게 격동할 정도였다. 샛노란 뇌기도 쉴 새 없이 튀어 올랐다.
『하하하! 역시 칠흑의 후예로다. 보면 볼수록 그대는 참 대단하구나. 내 익히 그대가 언젠가 이런 위대한 업적을, 아니, 신화를 써낼 줄 익히 짐작하고, 그러기만을 고대하고만 있었지. 그대는 우리의 우방으로서, 나란히 걸으며 세상을 제패할 자격이 있도다.』
쿠르르-
엄청난 소리만큼이나, 녀석이 발산하는 격도 어마어마했다. 주변에 있던 사절들 모두가 부서질 뻔한 화신체를 다시 수습해야만 했으니.
물론, 그들 중 누구도 토르보다 격이 낮은 존재는 없었기에 아무런 타격도 없었지만. 그래도 언짢은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왜 그러는가, 필멸자여? 어떤 제안이라도 할 것이 있는가?』
“시끄러우니까, 볼륨 낮춰.”
『…….』
순간, 토르의 얼굴이 멍해졌다.
수만 년이 넘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위대한 전사로서 살아왔던 그가 이딴 막말을 들어 본 적이나 있을까.
연우는 그런 토르를 보면서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필멸자니 뭐니 하면서 우위를 잡으려는 것 같은데.”
콰르르릉!
별안간 하늘에서부터 다시 검붉은 벼락이 토르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작렬했다면 제아무리 토르라고 해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공격. 검뢰였다.
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둥의 신인 자신에게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도 모욕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지만, 문제는 그도 천계에서 검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봤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무력시위였다.
까불지 말라는.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틀리면 협상이고 뭐고 간에 다 걷어차 버릴 테니까.”
『……!』
『……!』
『……!』
연우의 협박에 신과 악마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젖었다. 토르체럼 그들도 이런 수모를 겪을 줄 생각이나 했을까. 하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권능을 빌려 주고 사도로 부려먹을 생각만 하던 필멸자에게.
『……그래도 우리 간에는 전사로서의 우정이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토르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어떻게든 인정을 호소하려 했지만.
“혓바닥이 길군. 아스가르드는 빼도록 하지.”
『무……!』
토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촤촤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사절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칼바람이 불어닥치고, 불벼락이 내리꽂혔다.
토르의 화신체는 어떻게 저항해 보기도 전에 소멸하고 말았다. 공격을 가한 이들에게 신과 악마의 구분 따윈 없었다. 한 명의 경쟁자라도 더 물리치는 것밖에는 안중에 없었다.
연우는 토르를 해치우고 자신을 보는 사절들의 시선이,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애완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어. 지금처럼만 해.”
그런 놈들을 보면서 한껏 입술 끝을 비틀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개니까. 짖으라면 짖고, 물라고 하면 무는, 그런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