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시나리오 퀘스트 (9)
『…….』
『……말이 너무 심하군, ###. 아니. 사왕(死王).』
『말 조심해 줬으면 좋겠는데.』
개.
그 단어를 들은 사절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당장 연우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신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의 모욕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팔짱을 끼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싫으면 빠지든가.”
『뭐……?』
“바유, 당신이 빠질 텐가? ‘데바’도 같은 뜻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나?”
바유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흠칫 굳고 말았다. 주변의 다른 사절들이 자신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눈가를 따라 살의가 일렁였다. 토르 때처럼 경쟁자를 한 명 더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바득-
바유는 이를 꽉 다물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데바’는 여러 신의 사회 중에서도 올림포스나 아스가르드, 천교 등과 함께 최강의 반열에 꼽히는 곳.
소속된 신만 해도 수만 명에 달하기에 규모 면에서도 단연 압도적이며, 그 정점에 있는 8대 신좌인 로카팔라(Lokapala)는 세상의 법칙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위에 있는 3주신은 우주 창생의 비밀을 엿본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바유, 그는 로카팔라 중 서북쪽을 담당하며 바람을 다스리는 신. 달리 풍천(風天)이라는 이명도 있을 정도로 위대한 자라 칭송을 받아 왔다.
뛰어난 이들이 주로 뭉쳐 있는 이들 사절 중에서도 그와 합석할 만한 자격을 가진 이는 많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이니.
문제는 기회를 엿보는 이들 중에 ‘데바’와 동맹 관계를 맺은 곳도 간간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자칫 여기서 자신을 내쫓았다간 동맹 파기와 함께 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데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저들은 계시록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계시록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진영 내에서 따돌림을 받더라도, 가질 수만 있다면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바유는 초월자로서의 자존심도 바닥에 던지고, 한낱 필멸자의 개가 되기를 자처하는 놈들을 한껏 노려보았다.
이들은 아마 속으로 스스로는 와신상담을 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원하는 계시록만 얻고 난다면 곧장 연우를 칠 것이라고. 지금은 어떤 모욕과 수치를 받더라도 감내하고, 추후에 몇 배로 되갚을 것이라고.
하지만.
바유는 알고 있었다.
한번 개가 되길 자청한 자는 그 뒤로도 평생 비루한 개 신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좋다. 그리 개처럼 부리고 싶다면 개가 되어 주지.』
역시나 개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계시록은 신과 악마들마저도 아득히 넘는 지혜를 담은 책자. 그것을 다른 사회들이 손에 넣는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최우선적으로 데바가 손에 넣어야 하며, 넣을 수 없다면 다른 놈들도 가질 수 없게 해야만 했다.
“‘주지’?”
연우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꼬리를 올렸고.
『개가 되겠습니다.』
바유는 곧장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연우가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은 다른 사절들은 가볍게 혀를 찼다. 가장 골치 아픈 경쟁자를 치울 수 있나 싶었는데, 기회가 물 건너가 버린 것이다.
바유는 눈살을 살짝 좁히면서 그런 놈들을 한껏 노려봤다. 여차하면 너희들부터 찢어 버리겠다는 살의가 물씬 풍겼다. 일대일로는 그와 맞설 자신이 없던 놈들은 재빨리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슬쩍슬쩍 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하면 연우에게서 점수를 딸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 정말 누가 신과 악마라 생각할 수 있을는지.
‘치우는 건 하나면 족해. 이놈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끌고 가 단물을 뽑아야 해.’
연우는 비웃음을 짓는 낯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로 놈들의 면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아스가르드를 치운 건 어디까지나 사회가 주는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일 뿐.
이미 그 메시지는 녀석들에게 잘 전달되었으니, 굳이 데바까지 치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곳이 아니었으니.
발데비히는 방금 전부터 충격이 너무 컸던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왜 아직도 보이질 않는 거지?’
아직 모든 사절들이 도착한 건 아니었다.
인과율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약소 사회는 애당초 여기에 끼어들 만한 시도도 못 했고, 그런 능력이 있어도 하계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곳들도 참여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반면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보이고도 아직 사절을 보내지 않은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도중에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웬만한 곳이라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문제는 두 곳 전부 현재 연우가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가진 곳이라는 점이었다.
절대선(絶對善)과 절대악(絶對惡)을 대변하는 곳들.
선악(善惡)의 구도야말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신화를 써 내려가기에 가장 알맞은 것. 거인족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연우에게는 가장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도 그걸 전혀 모르지는 않을 터.
만약 그것을 두고 거래를 하자고 나설 수도 있었다. 만약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라면.
‘쳐 내야겠지.’
아무리 연우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가장 조급한 곳은 그들 두 곳이었다.
연우로서는 계시록이라는 좋은 카드를 쥐고 있는 만큼 끌려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악의 구도가 있으면 가장 이상적일 테지만, 없다고 해도 비슷하게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잠시간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두 곳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고.
사절들이 왜 연우가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지 영문을 몰라 저들끼리 웅성거릴 때 즈음.
연우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바로 그때.
‘양반은 못 되는군.’
연우가 뭔가를 느끼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면서 검은 벼락이 강렬하게 꽂혔다.
사절들은 거기서 풍기는 어마어마한 마기에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화신체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맹렬한 마기의 폭풍.
그나마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건, 바유와 이랑진군 같은 대신격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마저도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리며 마기에 적의를 띠고 있었으니.
그것은 이 마기 폭풍의 주인이 모든 신의 진영 입장에서 적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절대악을 상징하는 ‘르 인페르 날’의 이인자.
수많은 신을 짓밟고 찢으며, 여러 차원과 우주를 병탄하고 함락시키며 드높은 악명을 날렸던 동마왕군의 수장.
『……아가레스.』
『동부의 대공이 나타났는가! 광기와 파멸이 왔는가!』
휘휘휘!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흩어진 자리로, 수십 쌍에 달하는 검은 날개를 바닥에 늘어뜨린 아가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인지만, 하계의 공기는 참으로 눅눅해. 타계의 것들이 남긴 기운 때문인가? 정도가 더 심하군.』
아가레스는 도저히 성별을 알 수 없는 아리따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다른 사절들의 시선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허락 없이 어딜 보는 것이냐? 천한 것들이 감히!』
고오오-
겨우 가라앉는 듯하던 마기가 다시 해일처럼 높게 치솟았다. 이번에는 바유와 이랑진군 같은 대신격들도 주춤 뒤로 물러서서 저마다 신력을 끌어 올려야만 했다.
마기의 성질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진 까닭이었다.
광기.
그리고 파멸.
그를 상징하는 두 개의 위(位)가 더해지면서 마기는 단순한 위압감을 넘어서, 마치 배고픈 맹수처럼 잔혹한 이빨을 드러냈다.
『더구나 본 대공의 것을 탐내려고 해? 어떻게 해 주랴? 네놈들의 아둔한 머리를 잘라다 본 대공의 석좌(石座) 위에 장식용으로 올려 주랴, 아니면 그 눈깔을 뽑아 목걸이로 만들어 주랴?』
아가레스가 진언(眞言)을 한 마디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을 때마다 천지가 우르르 떨렸다. 마기도 덩달아 거세졌다.
예전부터 점찍어 뒀던 연우를 두고 이제 날이 갈수록 여러 놈들이 관심을 보이니 그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참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리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다. 그래서 내비치는 감정도 단순한 경고가 아닌 살의였다.
이대로 둔다면 정말 신이며 악마들과도 드잡이질을 할 것 같았다.
만약 새로운 개입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런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리라.
『떼쓰는 건 거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가레스.』
파앗!
잿빛으로 물든 허공 한가운데에서부터 새하얀 광채가 마치 개화하는 꽃처럼 피어나더니, 무지갯빛으로 변하면서 한 여인을 드러냈다.
아가레스와 절대적으로 대비되는 순백색의 날개와 새하얀 서기(瑞氣).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되고, 체력과 마력이 저절로 차오르는 기적을 부르는 존재였다.
아가레스가 내뿜던 마기의 폭풍도 거짓말처럼 흐려지고 있었으니.
그녀를 본 아가레스의 인상이 더 크게 일그러졌다.
상대는 그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였으니까.
제1 계급 치품(織品)의 일좌를 맡고 있으며, 수태고지를 관장하고, 지식과 지혜가 담긴 ‘계약의 궤’를 항상 등에 메고 다닌다는 대천사.
『가브리엘.』
가브리엘이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응. 오랜만이야.』
어린 시절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가레스의 굳은 인상은 도무지 펴지질 않았다.
『아즈라엘이 그 꼴이 되고 나서 ‘말라흐’에서는 이제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그새 생각이라도 바뀌었나?』
『어쩌겠어. 서기관의 명령이 그런데.』
『뭐?』
죽음을 관장하던 대천사 아즈라엘이 칠흑의 마성에게 잡아먹힌 후. 말라흐는 연우가 벌이는 일에 대해 감시만 할 뿐, 되도록 개입은 피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칠흑은 그들이 좇는 ‘빛’과 정반대되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를 꺼려 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특히 티탄-기가스와 전쟁을 치르며 그가 르 인페르날과 동맹을 맺고 난 뒤에는 더 거리를 두려고 하기도 했다.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은 진영이 다른 정도를 넘어서, 애당초 태생부터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으니. 이제는 완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아가레스로서는 가브리엘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것이 ‘서기관’, 말라흐의 총지휘관인 메타트론의 지시라고?
『난들 우리 꼰대 아저씨의 생각을 알겠어? 직장에서 안 잘리려면, 까라면 까야지.』
[신의 사회, ‘말라흐’의 메타트론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바라봅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거참 되게 노려보시네.』
[메타트론이 가브리엘의 경박한 말투에 혀를 찹니다.]
[메타트론이 가브리엘에게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합니다.]
『봤지? 우리 꼰대 아저씨가 저래.』
[메타트론이 인상을 찡그립니다.]
[메타트론이 가브리엘이 사용하는 인과율을 측정합니다. 쓸데없이 사용된 인과율은 추후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 쫌생이가!』
가브리엘은 메타트론의 시선을 보며 거세게 항의했다.
아가레스는 그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러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듯, 일그러졌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군.』
아가레스의 눈가로 스산함이 감돌았다.
『‘에녹서’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가브리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정하지는 않을게. 이제 슬슬 우리 사정도 그리 좋은 건 아니라서. 근데 그건 너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래? ‘레메게톤’이 필요한 것 아니야?』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의 바알이 말없이 웃습니다.]
대답은 아가레스의 뒤에 있던 르 인페르날의 최고 악마, 바알이 대신했다.
[메타트론이 바알을 관찰합니다.]
[바알이 메타트론을 주시합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을 상징하는 두 진영의 수장이자 지휘관들이 서로를 보고 있는 가운데. 바유를 비롯한 여러 사절들은 절대 한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가브리엘과 아가레스가 싸우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굳혔다.
계시록이 주는 무게가 더 크게 와 닿았던 것이다.
『여하튼 그러한 이유로, 개가 되라고 하니 개가 되기 위해서 왔는데. 뭘 하면 될까요, 사냥꾼 나리?』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연우를 돌아보았다.
아가레스를 포함한 모든 사절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들도 연우가 무엇을 시키려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반거인들을 훈련시키는 데 동참하라고 할까? 그렇다면 기꺼이 권능을 내놓을 생각이 있었다.
신들로서는 원수였던 거인족을 부활시키는 데 힘을 보탠다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그것이야 자신들에게 위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것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훈련에 필요한 성물이나 영약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해도 응할 생각이었다. 계시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니, 일부라도 쟁취할 수 있다면 천금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가 그런 녀석들의 생각 따위를 놓칠 리가 없었고.
이미 녀석들에게 시킬 것들을 전부 생각해 둔 뒤였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반거인이 잃은 잠재력을 회복하고, 초월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
하지만 그런 건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 때로는 신화에 따라서 그런 ‘반칙’이 허용될 때가 있었다.
“너희 둘.”
가브리엘과 아가레스를 보면서 말했다.
“선악과(善惡果)를 재배해 줬으면 하는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