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10화 (510/862)

10화. 시나리오 퀘스트 (10)

선악과.

올림포스의 ‘넥타르’, 데바의 ‘소마’와 함께 최고 보물로 꼽히는 물건이지만.

그 가치는 절대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간교에 넘어가 먹게 되어 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다는 원죄(原罪)의 상징이니만큼, 선악과는 막대한 지식과 이치를 담고 있는 영물이었다.

즉, 그만한 인과율을 담고 있단 뜻이기도 했으니.

그것을 섭취한다는 것은 탈각과 초월을 손쉽게 이룰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인과율을 거슬러 숨겨진 초월성(超越性)을 끄집어 올릴 방법이기도 했기에.

이따금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만약 어떻게든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칼라투스가 그토록 바라던 종족의 부활을 이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 * *

『선악…… 과를?』

여태껏 무슨 일을 시켜도 수행할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던 가브리엘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흠칫거리고 말았다.

반면에.

『하하하!』

아가레스는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기분 좋은 웃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광기에 찬 웃음.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는 웃음이었다.

그러다 아가레스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를 볼 때면 집착이든 광기든, 어떤 감정이라도 드러내던 녀석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마치 모든 감정이 말소된 인형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나? 』

역시나 무미건조한 목소리.

다른 사절들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한에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아니. 넌 모른다.』

“아니. 알아.”

『아니. 몰라.』

아가레스의 표정이 바짝 일그러졌다.

『악과(惡果)는 우리 사회가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한 뒤에야 겨우 탄생시킬 수 있는 마물이다. 악마, 그것도 마왕급의 놈을 양성할 수 있을 정도로의 막대한 절대악기(絶對惡氣)가 함축된 것이지. 하물며 선과(善果)는 그 반대되는 물건이고. 한데, 이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그 미친 물건을 내어 달라?』

휘휘휘-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아가레스의 마기가 잔뜩 뭉치면서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떴다.

흉신악살.

연우도 요긴하게 사용했던 권능이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선과와 악과는 각각 절대선과 절대악을 상징하는 두 진영이 심혈을 기울여야만 탄생시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 입을 삼킨 것만으로도 불로장생과 신격을 얻을 수 있으며, 모두 먹게 되면 대신격을 얻게 된다.

하물며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선악과는…… 그마저도 넘어서는 것. 인과율을 일부 떼어다가 뭉쳐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우주의 역사와도 맞먹을 만큼 길다는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전쟁 동안에도 탄생한 것이 몇 개 되지 않았던 물건이기에.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으라는 연우의 강짜가 너무 어이 없었던 것이다.

이참에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골수부터 빼먹겠단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파지직!

흉신악살 사이로 검붉은 스파크가 튀더니.

콰르르릉-

검뢰가 번쩍이면서 흉신악살을 모조리 찢어 놓았다.

아가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가 강해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자신이 일으킨 권능을 파훼할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어쩌면…… 이제 그와도 어느 정도 견줄 만한 정도일지도 몰랐다.

연우는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시끄럽군.”

『뭐?』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

『……!』

“개처럼 일하라고 했으면 해. 싫으면 꺼져. 강요 안 하니까.”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더불어서 르 인페르날과의 동맹 계약도 다시 검토하지. 어차피 먼저 파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건 너희였잖아? 그게 깨진다고 해도 책임은 너희들이 지게 될 테지.”

『…….』

“뭐해? 안 가고?”

연우는 턱짓을 했다.

아가레스는 잠시 말없이 그런 그를 보더니, 하늘를 응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르 인페르날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 소속의 여러 악마들이 거세게 항의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악마들이 당신을 보며 이를 갑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이런 대우를 받으며 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집니다.]

[바알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자존심 강한 그들로서는 연우의 협박에 기도 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레스가 ‘르 인페르날’의 악마들에게 닥치라고 일갈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입을 다룹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아가레스에게 소심하게 반항합니다.]

[아가레스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동마왕군이 움직입니다.]

[반항이 진압되었습니다.]

아가레스는 악마들을 조용하게 만든 뒤, 연우를 다시 돌아보았다. 분노에 젖은 눈동자에는 이제 광기마저 일렁거렸다.

『선악과를 만들면? 그때는 그 석비를 주나?』

“그럴 리가. 고작 선악과 몇 개로 퉁칠 생각 마. 말했을 텐데? 이건 협상이 아니라고.”

아가레스의 악명에 익숙한 여러 사절들은 하나둘씩 재빨리 권능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들로서는 아가레스가 아무리 연우에게 탐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런 수모를 겪고도 가만히 있으리란 생각이 절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괜히 광기의 아가레스라 불리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르 인페르날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연우의 머리통을 뽑아 버리려 할 터였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건대, 바알도 아직 이렇다 할 의견을 내놓은 적은 없지만 동맹 파기를 거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하하! 하하하……!』

아가레스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가레스가 ‘르 인페르날’로부터 임시 탈퇴를 하였습니다!]

[동마왕군이 아가레스의 결정을 좇아 집단 이탈을 선언합니다!]

『……!』

『……!』

『마, 말도 안 되는!』

『탈…… 퇴라고? 동부 대공이?』

아가레스는 사절들의 모든 예상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임시 탈퇴!

바알을 제외하면 그는 르 인페르날을 대표하는 최고 악마라 할 수 있는바. 더구나 그를 따르는 휘하의 권속들까지 생각해 본다면 그가 사회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사 할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 전력이 한꺼번에 이탈한다고?

그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선언이기도 했으며, 이제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기도 했다.

『역시 재밌어. 너란 존재는.』

아가레스는 키득거리면서 엄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정말. 정말로 재미있어…….』

아가레스의 시선은 연우에게 단단히 꽂혔다. 탐심, 광기, 집착…… 끈적끈적한 시선은 금세 연우를 탐할 듯 보였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에게 이런 협박 따위를 할 수 있을까. 문제는 딴 놈들이 그랬다면 영혼을 씹어 먹으려 들었을 테지만, 녀석이 그러니 도저히 싫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악과, 주지. 마침 우리 쪽에서 재배하려던 게 있었거든.』

연우는 아가레스가 묘하게 흘린 뉘앙스를 놓치지 않았다.

재배‘하려’던 것?

연우는 아가레스가 악과를 어떻게 조달할 생각인지를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가 없는 짓이긴 했지만, 확실히 그것만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없었으니.

무엇보다.

‘같은 방식으로 선과도 빨리 만들 수 있겠지. 선악과를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들 생각인가?’

연우는 역시 악마다운 방법이다 싶어 가볍게 혀를 찼다.

아가레스가 임시 탈퇴를 한 것도, 겉으로는 충동적인 의사 결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여러 포석이 교묘하게 깔린 수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바알과도 어느 정도 의견이 교환된 것이겠지.

『미친…… 놈들.』

하지만 가브리엘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건지, 그녀는 학을 뗀 표정으로 아가레스와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로서는 선악과를 뒷마당에 심어진 감나무에서 감 따듯 쉽게 내놓으라고 하는 연우나, 내놓겠다고 말하는 아가레스나 모두 미친놈들로 보였다.

그 자신도 말라흐에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자랑해 같은 치천사들로부터 잔소리를 듣고, 메타트론에게도 매번 꾸중을 듣는다지만.

이들은 그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았다.

그깟 것을 만들려 사회를 탈퇴해? 아무리 임시라는 단어가 붙는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짓이었다.

신과 악마에게 있어 사회라는 것은 단순한 조직 체계가 아니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방패막이이자, 존재를 구성하는 신화를 유지케 해 주는 토양이었다.

그런 것을 스스럼없이 버린다는 것은 그녀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아무리 극도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악마라고 해도 저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헌신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이란 것이 있었다.

물론, 그런 사회도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는 존재들도 더러 있었다.

케르눈노스나, 얼마 전에 사회에서 이탈한 비마질다라 등이 대표적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초월자의 반열마저도 넘어서, 신과 악마의 틀을 벗어나, ‘황’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다고 알려진 자들.

저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가브리엘이 봤을 때, 신과 악마들을 종마 부리듯 하는 연우와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가레스, 둘 모두 얼마 가지 않아 몰락하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수십 쌍의 순백색 날개를 한껏 크게 펼쳤다.

아무리 메타트론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이런 미친 곳에 계속 있다가는 정말 자신도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추후에 어떤 질책이나 처벌이 날아올지도 몰랐지만…… 그거야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동산 한쪽 구석에 처박혀 일이백 년 정도만 쥐 죽은 듯이 지내면 될 터였다.

『어딜 가려는 거냐?』

아가레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가브리엘을 보면서 물었다. 비틀린 녀석의 입술 끝에 송곳니가 유달리 반짝였다.

『선악과인지 뭔지는 너희들이나 만들어. 우리에게는 너희들에게 줄 선과도 없고, 선악과를 재배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지?』

『뭐?』

가브리엘이 순간 아가레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는데.

휘리릭!

별안간 지상에서부터 검은 마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더니,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은 기둥 수백 개를 일제히 세우면서 가브리엘을 압박했다.

『흡!』

가브리엘이 크게 놀라며 수십 쌍의 날개를 한껏 휘저었다. 무지갯빛 광채가 일렁이면서 마기 기둥을 모조리 부쉈다.

『이게 무……!』

가브리엘은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잘게 부서진 마기 입자들이 다시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었다. 삽시간에 생성된 촉수가 그녀를 다시 포박하고자 시도했다.

더구나 이번에 그녀를 노리는 건 아가레스만이 아니었다.

촤르륵-

갑자기 주변 곳곳에서 공허가 잔뜩 맺히더니, 검은 쇠사슬이 대량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아가레스처럼 연우도 이쪽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이!』

가브리엘은 그제야 연우와 아가레스의 노림수를 깨닫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녀석들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권능을 한껏 개방했다.

〈그분의 영웅〉

〈물병자리의 달〉

〈1월의 물〉

무지갯빛 광채가 물보라가 되어 해일을 일으키고, 어스름한 칼날이 소낙비처럼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하늘이 흔들리고, 공간이 그대로 잘려 나가면서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말라흐를 대표하는 최고 천사라 할 만한 어마어마한 신위였지만.

문제는 그녀가 상대하는 건, 말라흐도 경계하는 칠흑의 후계자와 르 인페르날의 이인자였고.

또 하나의 큰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는 기회라 여긴 수십 명의 사절들이었다.

『꺄아악!』

결국 가브리엘이 일으킨 신권과 권능은 이렇다 할 이적도 선보이지 못하고, 나타나는 족족 모조리 파훼되고 말았고.

마기의 폭풍은 그녀를 상징하던 수십 쌍의 날개를 모조리 찢어 놓았다.

설원처럼 새하얗던 날개는 삽시간에 피로 물들어 붉게 변하거나, 마기에 젖어 까매졌으니.

촤르륵, 촤륵!

검은 쇠사슬은 금세 그녀의 어깨와 종아리 따위를 관통하며 사지를 그대로 칭칭 감아 버렸다. 신력을 일으켜 어떻게든 저항하고자 해도, 신진철이 그것을 몽땅 흡수해 버리니 어찌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절대선기(絶對善氣)가 부족하여 선과를 만들 수 없다면, 그만한 양분을 조달하면 그만 아닌가?』

아가레스는 단번에 넝마가 된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가브리엘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꼬락서니가 마치 그네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십자가 박힌 성자처럼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귀찮게 굴어서 짜증 났었는데 잘되었군.』

아가레스는 십 년 넘게 쌓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고도!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아?』

가브리엘은 그런 아가레스와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연우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랜 세월 동안 악을 응징하며 살아왔던 그녀였으니. 이런 꼴이 되어서도 독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곧 말라흐가 움직여 이들에게 천벌을 가할 것이라고!

절대선과 절대악. 미루고 미루던 아마겟돈이 벌어질 것이다. 아가레스, 저놈의 간악한 욕심 때문에 천계의 질서가 뭉개질 터였다.

하지만.

『그럴 것 같다만.』

아가레스는 비틀린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눈이 커졌다.

『뭐?』

그 순간.

[신의 사회, ‘말라흐’가 가브리엘을 추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가브리엘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연고자입니다.]

『메, 메타트론?』

가브리엘은 자신이 혹시 뭔가를 잘못 봤나 싶어 존경하는 서기관의 이름을 불렀지만.

[메타트론이 무심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지켜봅니다.]

메시지는 틀리지 않았다.

『어, 어째서……?』

[메타트론이 무심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지켜봅니다.]

『마, 말도 안 돼……!』

가브리엘은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그저 한 마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어째서?

왜?

그 대답은 아가레스가 대신해 주었다.

『파하하! 아직도 모르겠나?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 멍청한 게 맞겠군. 너는 애당초 이것을 위한 제물이었던 거야. 설마 저 간교한 ‘뱀’ 같은 작자가 ###이 뭘 원할지 몰랐을까?』

『……!』

『그토록 믿었던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군. 넌 애당초 장기짝에 불과했던 거야.』

『아, 아냐!』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뭐 그런 건가? 하여간 너희 천사 놈들은 참 보면 볼수록 재미나단 말이지.』

아가레스는 마치 고양이처럼 붉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 모습이 요부처럼 요사해 보였다.

[메타트론이 언짢은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노려봅니다.]

『하여간.』

아가레스의 입술 사이로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잘 가라.』

『안 돼애애애!』

가브리엘이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촤르륵-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가브리엘을 포박하고 있던 검은 쇠사슬이 빳빳해졌다.

콰득! 콰드드득!

가브리엘을 이루고 있던 영육(靈肉)이 통째로 으깨졌다. 말라흐로부터 추방당하면서 그녀의 화신체를 지탱하고 있던 인과율이 사라져 버렸고, 덕분에 본체가 화신체와 합쳐지면서 가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곤죽이 되고 만 것이다.

비명도, 절규도 없었다.

『……!』

『…….』

『…….』

『듣기 좋군. 파하하!』

가브리엘을 생포하는 데 손을 거들었던 사절들마저 모두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몇몇은 더 이상 못 보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도 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싸움을 벌여 왔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처럼 허망하면서도 끔찍한 소멸, 아니, ‘죽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죽음의 신이 웃습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게 가브리엘이 갈려 나간 자리에는 힘없이 떨어지는 깃털과 새하얀 구슬만이 남아 있었다.

연우는 쇠사슬을 잡아당겨 그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선과였다.

『그리고 이것도.』

아가레스가 검은 구슬을 연우에게 던졌다.

『방금 전에 내 휘하의 군대가 병탄을 마친 사미기나란 곳의 주인 놈이다.』

사미기나.

르 인페르날의 서열 4위, 대후작 가미긴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계속 대거리를 해 대는 통에 마음에 안 들던 차였는데. 이참에 정리를 해 두니 속 시원하군.』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나 아가레스와 동마왕군의 무단 이탈은 바알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가브리엘과 가미긴, 절대선과 절대악이 낳은 최고 등급의 과실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기분은 흡족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려.’

연우는 만족에 찬 웃음과 함께, 선과와 악과를 합쳤다.

두 과실이 서로 뒤섞이면서 곧 붉은 사과 형태가 되었다.

[‘선악과’가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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