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13화 (513/862)

13화. 시나리오 퀘스트 (13)

으드득-

“개 같은 것들. 저놈들은 초월자로서의 자각이나 자긍도 없는 것인가.”

마지막 유적지에서 한발 떨어진 곳.

신 쪽 진영의 사절들은 홀로 유적지 안쪽으로 들어간 연우를 기다리며 그들끼리 뭉쳐 있었다.

잠재적으로는 계시록을 두고 다투는 적대 관계였지만, 그래도 ‘신’이라는 공통점이 그들을 느슨하게나마 묶고 있었다.

기실 신 쪽 진영의 사절들은 모두 하나같이 불만이 가득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숭배와 경외만 받아 왔던 그들이 이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짓밟히는 일인 데다가.

그들이 현재 돕는 존재가 한때 증오했던 적, 거인족의 후예들이라는 사실 역시 보통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곳적부터 악마와 용종의 사이가 좋지 않았듯, 신과 거인족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아직도 천계 내에서는 악마보다도 거인족이라 하면 치를 떠는 존재들이 많을까.

만약 계시록이 아니었더라면, 아니, 올포원과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이딴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뒤로 빠져서 연우의 허점이 생겨날 기회만을 노렸겠지.

하지만 현재 시간이 절대적으로 촉박한 건 자신들이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연우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절대선의 말라흐와 절대악의 르 인페르날은 각 진영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이들. 다른 사회들보다 훨씬 계시록을 필요로 했다. 가브리엘과 가미긴을 내놓은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신들은 연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그에 대한 원한을 계속 쌓아 나가는 중이었다.

애당초 이런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 자신들이라는 자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이 먼저 연우를 아주 편한 장기짝으로 쓰려 했다는 사실 따윈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애당초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치(無恥)라, ‘후회’나 ‘미안함’,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로지 철저히 자신들만이 우주의 중심이고, 세계가 오로지 그들의 뜻대로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였다.

그런 이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진짜 개가 되어 연우에게 꼬리를 흔드는 펜리르나, 연우에 대한 독점욕을 숨기지 않는 아가레스는 초월자로서의 격 따윈 바닥에다 내팽개친 이들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저들 둘만이 아니었다.

절교의 왕천군도 연우에게 호의를 계속 보이는 등, 악마 쪽 진영은 어떻게든 연우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었다.

“……계속 다들 이렇게 개처럼 부림만 당할 생각인가?”

“이랑. 자네의 생각은 어떻지?”

그러다 신의 사절들의 시선이 가장 중심으로 쏠렸다.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미남자, 천교의 이랑진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에게서 잔잔하게 퍼지는 서광(瑞光)을 보고, 신의 사절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과연 말로만 듣던 삼신장(三神將)이라고 해야 할지.

애당초 천교는 말라흐, 아스가르드, 데바, 올림포스와 함께 5대 사회 중 한 곳으로 꼽힐 정도로 거대한 성세를 구가하던 곳이었고.

수장인 옥황상제가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삼신산에 잠들고 난 뒤에는 주로 삼신장의 통치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이랑진군.

나타태자.

뇌진자.

그들의 위명은 이미 천계 내에서도 자자한바.

힘, 지력, 위엄,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옥황상제 때보다 삼신장이 집권한 이후에 천교의 위세가 한껏 더 높아졌을 정도였다.

특히 그들은 신과 악마, 어느 곳 가릴 것 없이 공통된 적으로 손꼽히는 저 증오스러운 천마(天魔)와 한때 대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신화를 품고 있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신의 사절들은 그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이랑진군도 그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랑진군은 여태껏 연우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절들처럼 그에게 알랑방귀를 뀌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다가가 말 한마디 붙이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연우를 관찰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랑진군을 오랫동안 봐 왔던 사절들은 그것이 적의 허실을 판단하기 위한 그만의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혹시나 뭔가 추가로 파악한 게 있나 싶어서.

하지만.

“…….”

이랑진군은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신의 사절들은 답답한 속을 어떻게든 털어 내고자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두들겼다.

뭐라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도저히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그들로서는 이렇게 계속 하계, 그것도 히든 스테이지에 남아 있는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인과율의 총량이 많아지는 데다가, 자칫 이곳의 주인인 기어 다니는 혼돈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골칫거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는 운이 좋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만약 기어 다니는 혼돈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위험해진다.’

‘그놈은 괴물이다.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기어 다니는 혼돈은 태고신이나 창조신 급의 인사들이 나서지 않는 이상, 그들만으로 상대하기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자칫 화신체뿐만 아니라, 천계에 있는 본체까지 모두 잡아먹힐 수 있는 거대 존재.

이곳이 그놈의 성역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 이렇게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미친 짓이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있는 것도 그들이 각 사회에서 위계가 상위에 해당할 정도로 뛰어난 격을 지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은 하급 신 따위가 내려왔더라면 벌써 잡아먹히거나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여러모로 이곳은 신들에게 있어 절대 있고 싶지 않은 곳.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픈 열망밖에 없는 그들에게 있어, 연우의 계속되는 갑질은 하루하루 피를 말려 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쿠쿠쿠-

언제 연우가 나오나 싶었던 마지막 유적지가 크게 격동했다.

여태껏 여러 유적지를 돌아도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에 신과 악마들 모두가 놀라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간 순간.

이랑진군이 눈가로 광망을 드러내면서 처음으로 입을 뗐다.

“……왔군.”

그 말이 끝난 순간.

화아악!

갑자기 유적지를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마력장이 형성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속에 담긴 어마어마한 신력에 사절들은 하나같이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토록 만나기 싫었던 존재가 이곳으로 의지를 내비치려 하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누군가가 억지로 내뱉은 절규와 함께.

또.

너. 인. 가.

강렬한 의념파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 * *

또 너인가.

녀석이 내뱉은 말에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어둠 너머에서 녀석이 의념으로 자신을 샅샅이 살피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마주쳤을 때와 다르게, 녀석은 더 이상 쉽게 자신을 ‘읽지’ 못할 터였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데다가, 좀 전부터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를 유동해서 육체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도 그것을 느꼈겠지.

‘그래도…… 역시 강해. 찌릿찌릿하고.’

연우는 손끝이 따끔거리는 것을 보고 눈살을 살짝 좁혔다. 자신의 성장은 스스로도 어떻게 제대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내뿜는 신력은 여전히 그를 훨씬 아득하게 상회하는 중이었다.

대체 녀석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 걸까?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더 크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 까마득하지는 않아.’

예전에는 절대 홀로 건널 수 없는 대양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아주 큰 강 정도로 보였다.

더구나 녀석의 본체는 어째서인지 여기서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녀석의 일부일 뿐. 곧장 본체를 밀어 넣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탑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일까? 아무리 이곳이 성역화되었다고 해도, 거대한 본체를 전부 수용할 정도로 진행이 된 것이 아닐 테니.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이 수없이 자신을 건드리려다가 튕겨 나는 것이 느껴졌다. 탐탁지 않다는 감정과 놀라는 감정이 같이 묻어났다.

그러다 뭔가를 느낀 듯, 의념이 한순간 아주 날카로워졌다.

마치 예리하게 째려보는 듯한 시선.

계. 시. 록.

역시나 녀석은 자신이 강해진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얼. 마. 전.

굴. 레. 가. 되. 감. 겼. 다.

그. 것. 은.

너. 인. 가.

천마가 전 우주를 200년 정도 되감은 것을 말하는 것일 테지.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태 만났던 신과 악마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지’를 못했단 뜻이었다.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숨길 일도 아니었으니, 연우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비딱하게 꼬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다면?”

필. 멸. 자. 가.

가. 질.

“내가 갖고 안 갖고는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내가 판단할 일이지. 그리고 너와 이렇게 마주한 건, 할 말이 있어서다.”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파를 도중에 끊었다.

녀석도 연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하려는 듯, 의념 발산을 중단했다.

거기에다 대고 말했다.

“내가 이전에 했던 제안, 기억나나?”

타계의 신이 탑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줄 테니 계시록의 원전을 달라고 했던 제안.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계시록은 절대 거래의 대상이 아니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연우는 그 말에서 녀석이 계시록을 꽤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거인족이 캐낸 것도, 녀석이 갖고 있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

연우로서는 발데비히의 염원이 아니더라도, 기어 다니는 혼돈과 부딪쳐야 할 이유가 더 생겨난 것이다.

계시록은 칠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담고 있으니.

“그 제안, 경고로 바꾸겠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난 지금부터 너의 성역을 점령하고, 너에게서 내 신도들을 되찾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계시록도 강탈할 예정이지. 그러니까.”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자신의 등장을 눈치채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선전 포고를 날리는 것이 나았다.

그 역시 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존재.

이럴 때는 당당히 나서야만 그 신화가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거기서 목 씻고 기다려.”

…….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서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기. 다. 리. 지.

그 한 마디만 던지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 순간.

피식 웃는 것 같았다는 느낌이 든 건,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제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는 것.

‘바빠지겠어. 앞으로.’

연우는 반거인의 무장 속도를 빨리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퀘스트(신과 왕의 증명 IV)이 생성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퀘스트 창을 확인하세요.]

* * *

연우가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대화를 끝내고 다시 마지막 유적지를 나왔을 때.

“###!”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신의 사절들은 하나같이 연우에게 달려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들 모두 연우와 기어 다니는 혼돈 간의 대화를 전부 엿들은 것이다.

그들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기어 다니는 혼돈의 눈에 띌까 싶어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연우가 다짜고짜 녀석에게 선전 포고를 날린 셈이니. 덩달아 연우를 돕고 있는 그들도 같이 휘말린 셈이 아닌가.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에게 적극 항의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자신들은 이 전쟁에 휘말릴 수 없다고 따집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의 발언을 기다립니다!]

……

여러 사회들도 똑같이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래서?”

연우는 여전히 비딱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뭐?”

“무슨……?”

그러자 정작 당황한 것은 신의 사절들이었다.

연우는 그런 놈들을 보며, 아니, 그 너머에 있을 천계의 사회들을 보면서 말했다.

“말했잖아? 계시록을 받고 싶으면 개처럼 일하라고. 이것도 그 연장선일 뿐이야.”

“……!”

“……!”

“너희들도 전쟁에 참여해. 그럼 계시록을 얻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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