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14화 (514/862)

14화. 시나리오 퀘스트 (14)

신의 사절들로서는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단 말인가!

[신의 사회, ‘데바’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신의 사회, ‘딜문’이 당신에게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신의 사회, ‘멤피스’가 강한 적의를 표출합니다!]

……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적개심을 드러낸 사회에 의견을 동조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차갑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오로지 올포원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잡을 생각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난데없이 새로운 전선(戰線)에 휘말린 셈이었다.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같은 신적인 존재도 아닌, 원수나 다름없던 거인족의 후예들이 벌이려는 독립 전쟁에 뛰어들라는 말이었으니. 당연히 즉각 반발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태 그들이 갖고 있던 거인족의 모든 기록들을 연우에게 가져다준 것도, 그가 시키는 대로 유적지를 발굴하는 데 동참했던 것도, 심지어 권능을 일부 내놓으며 사냥개 취급을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보자 보자 했더니 네놈이 정녕 끝까지!』

『이런 빌어먹을 작자가!』

결국 여태 가장 큰 불만을 가졌던 ‘데바’의 바유와 ‘멤피스’의 소베크가 진언을 내뱉으면서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바유의 손짓에 따라 강풍이 불어 닥쳤고, 소베크의 몸 주변으로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연우를 찢어발길 듯이 달려들었다. 소베크는 거대 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이었다.

하지만.

콰르르릉!

별안간 연우의 발끝에서부터 솟구친 검붉은 검뢰가 그대로 강풍과 물의 소용돌이를 갈라 버리더니, 그 뒤에 있던 바유와 소베크의 화신체에 닿았다.

바유는 흠칫 놀라며 뒤로 빠졌으나, 검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그대로 찢겨서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봐야만 했다.

반면에 소베크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그대로 혈선이 쭉 그어지면서 짙은 탄내와 함께 소멸하고 말았다.

『……!』

『……!』

『……!』

두 신과 똑같이 분노를 드러내면서 달려들려던 신의 사절들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예상했던 것보다 연우의 반응이 훨씬 단호했던 것이다.

더구나 소베크는 멤피스를 상징하는 수신. 한때 주신 중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높은 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자를 단 일격에 갈라 버릴 줄이야.

바유도 신력이 마구 새어 나가는 오른쪽 팔뚝을 왼팔로 감싸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금 전의 충돌로 연우와 그들 간의 격차가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창공 도서관에서 갓 내려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투쟁’을 신위로 갖고 있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성장이었다.

거인족의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여러 석비들을 얻더니. 그것을 보면서 또 더 큰 성장을 이뤘던 걸 까? 아니면 반거인의 신이 되길 자처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이뤘던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지금의 연우는 전력을 다해 부딪치지 않으면 절대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는 것.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하지만 연우는 그런 신위를 선보이고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말했을 텐데? 정 아니꼬우면 꺼지라고. 그런 것까지 막을 생각 따윈 없다고 말이야.”

그의 피부를 따라 검붉은 뇌기가 튀어 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신의 사절들은 간담이 저절로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를 내야 하는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고작 거인족의 자료 몇 개 가져다주고, 유적지 탐사를 도와줬다고 해서 석판을 통째로 가져갈 생각이었나? 너희는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 그냥 편하게만 앉아서?”

그 순간.

파아아-

「감히. 어느. 누가. 주인. 께. 무례를. 범하는. 가?」

연우의 뒤편으로 두 개의 검은 실선이 그어지면서…… 거대한 인페르노 사이트가 나타나 놈들을 노려보았다. 부가 개안(開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노출된 사절들은 충격에 젖어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빚어 만든 존재가 바로 저기에 있었으니.

과거 하계에서 파우스트라는 이름으로 탈각과 초월에 도전하다가 끝끝내 올포원의 장벽을 넘지 못했던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그런 녀석이 칠흑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 더 크게 개화한 모습을 보니 너무나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크르르-

『다들 재미난 짓들을 벌이려는군그래?』

파우스트만 해도 존재가 강해 보이건만, 그 옆으로 아가레스와 펜리르가 다가와 서자 기세가 단번에 역전되었다.

여태껏 중립을 표하던 다른 악마의 사절들은 물론, 눈치를 보던 신의 사절들도 하나둘씩 쭈뼛대면서 연우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신의 사회, ‘말라흐’가 플레이어 ###의 편에 설 것을 공표합니다!]

가장 앞서서 적의를 보일 줄 알았던 말라흐도 여전히 연우의 편이었고.

[신의 사회, ‘천교’가 삼신장의 만장일치에 따라 계속 플레이어 ###의 손을 들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구심점이 되던 이랑진군도 연우의 편에 서 있었다.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리가 위태로워진 것은 적개심을 표했던 이들이었다.

“어쩔 건가? 물러나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좋을 텐데.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쟁, 피하고 싶다면서?”

연우는 그런 놈들을 보면서 비릿하게 웃었고.

『…….』

『…….』

『……젠장!』

그들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도, 결국 고개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 * *

연우를 비롯한 일행들은 유적지 탐사를 끝내고, 다시 샤논 등이 있을 반거인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대규모 포탈을 열었다.

인원수는 좀 전보다 상당히 줄어 있었다. 계속되는 연우의 냉담한 대우를 결국 참지 못하고 말없이 천계로 돌아간 사절이 적잖게 있었던 것이다.

웃긴 점은 가장 격렬하게 부딪쳤던 바유는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단 점이었다. 그는 무표정만 고수한 채,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연우의 지시만 따르고 있었다.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때, 연우 옆으로 발데비히가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마음을 졸 이고 있었다. 연우와 사절들의 충돌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때로는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차가웠으니.

신이란 작자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옹졸한지 알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어떤 해코지를 가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왜 그러지?』

발데비히는 연우가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만 있자, 왜 그러나 싶어 움찔거렸다.

“발데비히.”

『왜?』

“너의 이름은 왜 발데비히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거인족의 마지막 왕도 이름이 발데비히던데. 그건 아마 부모님께서 너도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며 이름을 붙이신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닌가?”

『…….』

“그렇다면 그 이름에 자긍심을 가져라. 너와 나는 옛 거인족을 부활시키려는 사명을 갖고 있고, 그걸 위해서는 지금부터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가 몸에 배어 있어야만 해. 오만하면서도 자기 확신에 찬, 그런 마음가짐.”

발데비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저들과 우리는 대등한 관계다. 아니, 진영이라는 틀로 묶었을 때, 저들은 사회를 대표하지만 우리는 거인족이라는 진영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너는 저들보다 더 우위에서 내려다 봐야만 해. 그래야 나중에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다. 명심해.”

『……!』

발데비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연우를 만나고 난 뒤부터 날마다 여태껏 가졌던 세계관이 몇 번씩이고 부서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동안 자신은 필멸자로서의 자세만 생각하여 계속 주눅 들고 있지는 않았나, 신과 악마를 마냥 높게만 여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이내 머리를 정리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짧았군. 미안하다.』

연우가 피식 웃으면서 발데비히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연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책자를 내려다보았다.

유적지의 모든 석비들을 조합했을 때 탄생한 것.

칠흑왕의 경전서.

[칠흑왕의 경전서]

등급: ???

설명: 아직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부족분을 채워 넣으세요.

특이 사항: 현재 소유자가 과거에 확인했던 부분에 대해, 브레인 스트리밍으로 복구 중입니다.

‘계시록이나 에녹서, 레메게톤 같은 이름이 아니라…… 칠흑왕의 경전서라.’

기어 다니는 혼돈과 타계의 신들은 칠흑왕을 절대적인 존재로 숭배했고, 파우스트는 그런 존재를 좇아서 얻은 지식으로 그만한 경지에 다다랐다. 창공 도서관에서 만난 천마도 이것을 두고 아주 뛰어난 물건이라 지칭했다.

그리고 거인족은 자신들을 해방시킬 힘으로 이것을 얻고자 했으니. 어쩌면 그들은 ‘죽음’ 뒤에도 언젠가 자신들이 그 힘을 얻을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역시 이 계시록이란 것의 정체는…….’

경전서를 내려다보는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연우는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샤논과 반거인들을 소집했다.

「이것들, 진짜 답 없다니까 그러네.」

샤논은 팔짱을 끼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아무런 의욕도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움츠러들기만 하는 놈들을 갱생시킬 방법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발데비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초췌해진 몰골로 구해 달라는 애원에 찬 눈빛을 보내는 동족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에.

사절들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반응을 보였다.

신의 진영 쪽은 이런 놈들을 도와서 과연 제대로 된 전투나 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심쩍은 눈빛과 함께 경멸에 찬 태도를 숨기지 않았고.

악마의 진영 쪽은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거인족이 이런 식으로나마 명맥을 잇고 있단 사실에 흥미로워하면서도, 이들의 신을 자처한 연우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건지 궁금해하는 경향이 짙었다.

일견 악마 쪽이 신들보다 반응이 나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호의적인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궁금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재미 여부만 보고 있을 뿐이지, 진지하게 연우의 시도가 성공할 것이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은 반거인들도 똑같이 느꼈던지, 그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입도 벙긋거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우가 오면 왜 자신들을 이렇게 괴롭히느냐며 따지려 했던 자들도, 지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거인들의 눈에는 타계의 신과 같은 존재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씩이나 떼 지어 우르르 몰려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차라리 단순한 플레이어였다면 저들의 화신체만 느끼며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미약하게나마 초월성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사절들의 본체까지 엿보였던 것이다.

연우는 이제 덜덜 떨고 있는 반거인들의 눈동자를 일일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녀석들은 연우의 눈동자 아래에 깊게 잠들어 있는 심연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몇몇은 안색이 시퍼레지거나, 졸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한 명은 연우의 눈동자를 어떻게든 견뎌 보려 하는 의지가 유달리 강했다.

‘발데비히의 모옥에서 마주쳤던, 그 꼬맹이로군.’

꼬마라고 하기엔 자신과 크기가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반거인들에 비하면 훨씬 작은 체구. 하지만 눈빛에 깃든 의지만큼은 확실했다.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껏 노려보기까지 했으니.

피식.

연우는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몰락했어도,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너희들은 내일부터 전쟁을 치를 것이다.』

연우는 다짜고짜 그 말부터 던졌다.

당연히 반거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수련한 것은 고작 며칠. 그마저도 체력 단련이 고작이었으니. 싸우는 기술을 모르는 것은 물론, 아직 육체에 근육도 제대로 붙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당장 전장에 투입하겠다고?

당장 나가서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하지만 어느새 연우가 내뿜기 시작한 기세에 완전히 압도된 나머지 머릿속이 새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언(眞言)은 상대의 영혼 속에 목소리를 단단히 각인시키는 힘을 담고 있다. 당연히 연우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들을 옥죄는 주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겠지. 너희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다짜고짜 싸우라고 하니까.』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비웃음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놈들에게 천천히 죽어 가나, 지금 내게 떠밀려 죽나 어차피 다르지 않을 거다.』

연우를 따라 흐르던 기세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반거인들은 심장을 꽉 죄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숨을 쉬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덜덜덜.

공포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데, 너무 극한까지 다다르니 그것이 공포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억울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강해져서 내게 복수해라.』

그러다 공포감은 다른 이질적인 감정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의 영혼 속에 연우의 채널링이 강제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신과 신도 간에 맺어지는 신앙선이었다.

연우는 이제 황홀감에 젖은 녀석들을 보면서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투쟁해라. 내가 네놈들에게 해 줄 말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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