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전사단 (4)
적. 들. 이.
어. 찌. 해. 야.
기어 다니는 혼돈은 곳곳에서 빗발치는 의념에 천천히 의식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살려 달라는 애원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구조나 응원을 요청하는 소식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우주 창생과 함께 삶을 시작한 태곳적 존재인 그는 오랜 세월에 지쳐 의식이 거의 마모되다시피 한 상태였고, 때문에 ‘재미난 일’이 있지 않으면 딱히 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게 대부분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분의 유산을 찾아 헤매며, 탑으로 들어가 그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도.
이미 깊은 잠에 든 지 오래인 ‘그분’, 지칭할 말이 없어 ‘칠흑왕’이라 불리는 그를 깨우고자 하는 것도, 이제 희미한 형태로 남아 있는 충성심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유희.
혹은 열락.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어 다니는 혼돈은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별다른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렇기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서 그분을 깨우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유희거리인 셈이었으니.
거인족을 장기짝으로 부린 것이나, 용종을 잡아먹으려 했던 것은 그 과정에서 파생된 작은 유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주친 ‘연우’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존재가 그분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분은 우주가 창생하기도 전에 존재하던 인물.
심지어 스스로를 ‘빛’의 기원이라 일컫는 저 불경한 놈보다도 더 오래된 분이었다.
그런 위대한 존재를 미물 따위가 잇는다고?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다. 그저 운 좋게 그분이 남기신 것 중 일부를 습득하여 부려 먹는 것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크로노스라는 존재가 있어 탑 내에서 그분의 사도로 부려진 적은 있었다지만, 그래도 미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나먼 곳에서 연우가 점차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재. 밌. 어.
녀석이 그분의 후예인지 아닌지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난 생물.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그의 생애에서도 자극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가 자신이 오랫동안 탑 안에 꾸준히 만들어 놓았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녀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그 말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것을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관람하고 싶었다.
다행히 연우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 번째 성역을 탈환하더니, 곧이어 쉬지 않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역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마저도 금세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그것도 오래전에 버리다시피 했던 ‘폐기물’을 부활시키고, 탑 내에서 그동안 자신을 견제하던 신이며 악마라는 놈들까지 대동하면서.
그 때문에 휘하에 있던 녀석들이 도와달라며 애원하고 있었지만.
애당초 그들도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는 유희와 열락을 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 되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리어 줄줄이 죽어 나가면서 연우가 얼마나 날뛸 수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으니, 더 많이 밀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때.
두우웅-
여태 탑 내로 밀어 넣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이 있던 공간이 크게 흔들렸다. 이곳은 그의 의념이 시공간과 하나로 겹쳐진 장소. 심상 결계를 넘어 새로운 소우주라고도 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의 안쪽으로 무언가가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애당초 이곳은 기어 다니는 혼돈의 허락 없이는 절대 아무도 다가올 수 없다. 그런데도 접근했다는 뜻은 단 하나. 상대가 그와 동격(同格)이라 할 수 있는 자란 뜻이었다.
그리고 ‘안쪽’의 존재들 중에 그만한 자격을 지닌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콰아아-
곧 소우주 한쪽이 통째로 열리면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동자가 활짝 열렸다. 그 눈동자는 어찌 보면 ‘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경. 계의. 거. 주. 자.
‘안쪽’ 모든 존재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허에서 깊은 잠이 드신 그분을 대신하여 오랫동안 ‘안쪽’의 존재들을 이끌어 왔던 존재. 이제는 충성심마저도 희박한 자신과는 다르게, 여전히 그분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이였다.
녀석은 동공을 아래로 내리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을 가만히 보더니.
곧 자신의 의념을 하나로 뭉쳐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대화의 편의를 위해 화신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연우를 닮았으되, 연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경계의 거주자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생각이냐. ‘때’가 되어 가는데 진척 따윈 하나도 없지 않으냐.”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서 풍기는 신력이 크게 요동쳤다.
연우와 닮은 모습을 한 경계의 거주자가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재미를 추구하는 기어 다니는 혼돈과 다르게 언제나 엄숙하고 진중한 태도를 고수하며 살기에, 어찌 보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바깥쪽’에 대한 확정을 해야만 하는…….”
실. 험. 중.
“뭐?”
경계의 거주자는 도중에 말허리를 끊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보면서 살짝 낯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재. 미. 난.
실. 험.
“실험?”
아. 버. 지. 의.
다. 른. 후. 계. 가. 곧.
순간, 경계의 거주자의 얼굴이 단단히 일그러졌다.
“결국 그 때 하려던 짓을, 아직도 잊지 않았던 것이냐? 네놈이 아무리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아이였다고는 하나, 그 짓은 월권이라고 이미 결정이 났던 게 아니었나?”
곧. 결. 과. 나. 올. 것.
“하!”
경계의 거주자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토하고 말았다. 뭐라고 말을 하든 간에 기어 다니는 혼돈은 자신의 경고를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녀석의 이런 점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그분께서는 생전에 이리도 제멋대로인 놈을 데리고 다닐 생각을 하셨을까.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고 하나, 그래도 가장 오랫동안 그분을 옆에서 모셨던 그로서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결국 경계의 거주자는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바깥’에 대한 활동은 오로지 기어 다니는 혼돈의 몫. 자신이 제아무리 부왕(副王)의 역할을 맡고 있다지만, 녀석도 자신에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니.
“하!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둬야 할 것이다. 이 이상은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 탑인지 뭔지 하는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무너뜨려야 한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 차원과 우주, 그리고 세상 모든 ‘문’을 지배하며 경계의 위를 걷는 그라지만.
‘바깥’에 우뚝 선 탑이라는 공간은 그조차도 절대 다가갈 수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탑은 삼라만상의 법칙을 모두 갖고 있는 듯하면서도, 전부 초월하고 있었으니. 가장 전능에 가깝다고 알려진 경계의 거주자에게는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탑에 관한 일은 전부 기어 다니는 혼돈이 주관하고 있었다.
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은 자신이 직접 관리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경계의 거주자로서는 항상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기어 다니는 혼돈이 제대로 일을 마칠 수 있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의 속을 뒤집으려는 듯, 뜻을 알 수 없는 웃음만 던질 뿐이었지만.
알. 고. 있.
기. 다. 릴. 것.
“말이나 그럴듯하게 하지, 정말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건지 모르겠군.”
경계의 거주자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하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조용히 의념을 흩뜨리며 사라졌다.
결국 다시 혼자만이 남은 소우주에서.
재. 밌. 어.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연우를 비추고 있는 곳으로 의념을 돌렸다.
* * *
『선악과는 내 것이다!』
『아니야! 내 거라고!』
반거인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움켜쥔 채로, 마치 붉은 천을 본 황소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어 타계의 신을 하나하나씩 무찌르고 있었다.
벌써 그들이 병탄 중인 성역의 수만 4개째.
여태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타계의 신들은 이렇다 할 방어 대책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려 나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리어 당황스러운 쪽은 전사단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절들이었다.
『미친놈들.』
『이것들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가 말이야…….』
늦게 배운 도둑질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 했던가.
투쟁과 승리가 주는 여운에 강하게 사로잡힌 반거인들은, 마치 마약에 중독된 환자처럼 계속 투쟁을 좇았다.
더 짜릿한 전투를, 더 강렬한 승리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인족으로서의 각성이 계속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역 탈환이 이뤄질 때마다, 선조들의 영혼이 나타나 후손들에게 연신 축복을 내려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사단의 신장과 골격도 계속 쑥쑥 자라나 이제는 어느덧 ‘반거인’이라고 하기 애매해질 정도의 크기까지 자라나고 말았으니.
초월성도 이제는 잠재되어 있다는 표현을 갖다 붙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기파가 휘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발데비히를 비롯해 전사단 중 상위 개체들이 내뿜는 투기는 이따금 사절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이기도 했으니.
거기다 연우가 던진 포상도 있었으니.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자에게 이것을 주도록 하지.
전사단을 앞에 두고, 선악과를 꺼낸 것이다.
당연히 반거인들의 눈동자는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선조들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시피 했던 그들도, 선악과에 대해서만큼은 잘 알고 있었으니.
한 입만 베어 물어도 초월성을 획득하고, 전부 다 먹게 되면 전지와 전능을 얻게 된다는 전설까지 있는 신물이 아니던가!
물론, 전설로 내려오던 것이다 보니, 효능에 대해서는 뻥튀기가 된 점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천계에서도 애지중지할 만큼 귀중한 물건인 게 확실한바.
아직도 더 강한 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전사단에게 있어, 그만한 값어치를 지닌 보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열의는 더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비마질다라가 반거인의 전사단을 보면서 크게 기꺼워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침착한 눈으로 전장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런 전사단을 보는 사절들, 특히 신의 진영에 속한 이들은 이제 위기감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저들의 성장세를 계속 저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정말 자신들의 사회와 진영에도 차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이쪽을 주시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사태를 주시합니다.]
……
그것은 이쪽을 지켜보는 신의 사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방아쇠는 당겨진 상태. 더구나 그들의 코뚜레를 잡고 있는 건 연우였으니,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로서도 이제는 물러나기가 힘든 입장이었다. 어떻게든 계시록을 얻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시나리오 퀘스트(신과 왕의 증명 IV)을 일부 수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병탄한 영토의 수(4/7)]
[건설된 신전의 수(2/4)]
연우는 또다시 성역 탈환에 성공해 함성을 내지르는 전사단을 보면서, 망막 한쪽 구석에 떠오른 메시지를 조용히 껐다.
‘병탄한 영토의 수’는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부터 빼앗은 성역을, ‘건설된 신전의 수’는 기존의 신전을 철거하고 세운 연우의 신전 숫자를 의미했다. 신전은 현재 키클롭스 3형제가 열심히 건설을 하고 있는바. 다행히 저쪽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는 반대로 돌아서서, 가만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사내를 보았다.
이랑진군.
천교의 삼신장이며, 신의 사절들 중에서 최고위라 할 수 있는 존재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그래, 우리를 용병으로 삼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