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전사단 (5)
이랑진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절교와의 전쟁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건가? 아니면 올포원?”
그 순간.
[악마의 사회, ‘절교’가 이쪽을 주시합니다.]
연우는 현재 천계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
당연히 이랑진군이 독대(獨對)를 요청했을 때부터, 모든 사회들이 그가 과연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병에 걸려 깊은 잠이 든 옥황상제를 대신해 천교를 이끌었던 삼신장. 그들은 현재 천교가 구가하고 있는 최전성기를 탄생시킨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랑진군은 그런 삼신장에서도 대장격이지.’
말하자면, 이랑진군은 현재 천교 내 최고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존재가 직접 강림을 한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연우는 천교가 무언가 작지 않은 제안을 하리라고 추측했다.
‘현재 천교는 유일하게 천마와 전쟁을 치른 신화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
천교가 천계 내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연우도 만나면서 느꼈지만, 천마는 일반적인 초월자들과도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우주 창생과 함께 삶을 시작한 태곳적의 존재들, 태초신이나 창조신들이나 겨우 와야 비벼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존재. 초월의 초월을 이룬, 초월신(超越神)이라고 지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논외의 존재였다.
그런 천마와 사투를 벌인 신화가 있다?
비록 당시에는 천마가 지금과 같은 격을 지니지 못했었다고 할지라도, 천마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그와 대적했던 천교의 격도 덩달아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패배자’의 타이틀을 달고 있을지언정, 천교는 천계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런 곳의 수장이 연우와 전사단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여태껏 계시록을 얻고 싶으면 자신을 무작정 도우라고만 말했다. 다른 개인적인 조건은 들어주지 않겠노라고 덧붙이면서. 하지만 이랑진군의 독대 요청은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요청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음부경’…… 아니, 그대들이 계시록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일체 포기하겠다. 물론, 그대가 요청하는 것들, 전사단에 필요한 지원은 계속할 것이고. 아니,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지. 나와 삼신장이 직접 계속 주관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반도(蟠桃)도 몇 개 내놓도록 하고.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에게 ‘선악과’의 중요성이 아주 큰 만큼, 천교와 절교에게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반도’였다.
천교와 절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고대신 서왕모가 자신의 성역, 곤륜에서 정말 수천 년에 한 번씩 재배한다는 복숭아.
그것을 내놓겠다는 것만으로도 연우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악과를 대체할 만한 것을 계속 떠올리고 있던 차였으니.
거기다 다른 무조건적인 지원은 물론, 향후 이 일이 끝나고 나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겠다고 자신의 신명(神名)을 걸면서까지 약조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계시록을 포기한다는 건, 다른 사회들에 훨씬 뒤처질지도 모르는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결정.
연우로서는 당연히 독대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전쟁과 관련된 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이랑진군은 진언이 아닌 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달래려는 모양새 같았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의심에 찬 시선으로 당신과 이랑진군을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신들이 이랑진군의 독대에 관심을 보입니다.]
[소수의 신들이 이랑진군의 저의를 의심합니다.]
하지만 절교는 물론, 다른 여러 사회들도 이랑진군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시끄럽군.”
연우는 짜증 섞인 얼굴로, 대화를 제대로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소란스럽게 구는 놈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화아악-
그림자를 넓게 퍼뜨려 둥그스름한 반구를 만들었다. 임시로 성역을 구축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더 귀찮게 굴 놈들도 없겠지. 계속 말해 봐.”
“역시 보면 볼수록 신기한 기술이로군. 통천교주의 신권과 사뭇 비슷하면서도 많은 점이 달라.”
이랑진군은 하계 내에서 성역 구축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권속들을 보관하고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인 그림자를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연우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림자 영역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천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심지어 본체와의 링크도 옅어진 상태. 이대로 있으면 완전히 단절되어 화신체가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독립성을 갖출 것인지 하는 호기심도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랑진군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연우의 시선을 느끼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연우가 알아서 천계의 눈을 가려 주었으니 본론을 꺼내기가 훨씬 쉬웠다.
“말했듯, 우리는 전쟁 때문에 그대와 거인족의 전사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영혼석을 탐색하는 데 힘을 보태 주었으면 한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
연우의 눈이 저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철컹!
오른팔에 두르고 있던 검은 쇠사슬이 크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아주…… 재미난 말이 들리는구나…….』
마성의 목소리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크게 울렸다.
쇠사슬로 칭칭 감아 공허에 처박아 뒀다지만, 이제 슬슬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영혼석’이라는 단어가 녀석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키키킥. 뭘 하는 것이냐, 애송아. 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현자의 돌은 현재 두 개의 영혼석을 먹어 치우면서 죄악석으로 거듭난 상태.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마성으로서는 더 큰 힘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 좋은 짓을 하라는 건가?’
『어떻게 이리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것인지. 어째서 그것이 내게만 좋은 것이냐? 너에게도 좋은 것이지. 영혼석이 가진 힘은 이미 너도 보지 않았나?』
마성은 마치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계시록인지 뭔지를 사용했다지만, 너는 단 두 개만으로도 이만한 힘을 쟁취하였다. 한낱 필멸자가 초월자들을 능가하고 있는 것이야. 한데, 이 상태에서 다른 영혼석이 더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그토록 꼴 보기 싫은 올포원의 면상을 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키키킥.』
‘나는 네놈의 면상을 더 후려치고 싶은데. 어쩌지?’
『잘도 헛소리를 해 대는군. 아니면…… 일이 너무 바쁜 것이냐? 그렇다면 차라리 날 보내어라. 그리한다면 내가 알아서 구해서 갖고 올 것인즉! 그런다면 너에게도 좋을 것이 아닌가! 자, 어서 날 풀어라!』
결국 본심은 이것인 셈이었다.
연우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공허로 연결된 쇠사슬을 움직여 녀석을 더 바짝 옥죄었다.
『키키킥! 넌 단순히 날 이곳에 가뒀다고 생각하겠지. 그걸 끝이라 여기겠지. 하지만 두고 보아라. 얼마 가지 않아 네놈의 손으로 다시 날 꺼내게 될……!』
마성의 거친 목소리도 다시 공허 속으로 파묻혀 사라졌다.
철그럭, 철그럭!
하지만 요동치는 쇠사슬을 보고 있으니, 녀석이 얼마나 거칠게 저항하고 있는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연우는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로 혀를 찼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아까워 죽겠단 말이지.’
비그리드는 아직 그 속에 담긴 비밀도 다 풀지 못한 성물. 연우로서는 이대로 계속 마성과 함께 공허에 처박아 놓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조만간 어떻게든 마성을 비그리드에게서 분리시킬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이랑진군을 보았다.
“도중에 말을 끊어서 미안하군. 골치 아픈 놈이 갑자기 시끄럽게 굴어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영혼석을 찾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던 것까지였나?”
하지만 이랑진군은 연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쇠사슬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전 그건…… 무엇이지? 공허인가?”
“그런데?”
“하. 하하하…… 그렇지. 그대는 ‘그’의 후예였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여태 여러 명의 후예들이 있었고, 거기에 도전한 이들도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해낸 경우는 처음 보는군.”
이랑진군은 허탈하다는 듯이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거기엔 연우로서도 놓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후예들이 많았다고?”
“그대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파우스트, 흡혈군주 등등…… ‘그’를 좇았으나 닿지 못한 존재들도 아주 많지만. 반면에 거기에 닿았고, 후예가 될 수 있었으나 그 막대한 힘에 홀린 나머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야만 했던 존재들도 많았다는 것을.”
이랑진군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티탄의 왕, 크로노스가 그러했고, 절교의 통천교주도 비슷하게 그리하다 결국 바스러지고 말았지. 게다가.”
그러다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 연우는 허리를 쭈뼛 세워야만 했다.
“그중에는 아직 살아 있는 존재도 있고.”
“뭐?”
연우의 눈이 커졌다.
칠흑의 후예가 자신 외에도 현존하는 이가 있다고?
“그가 누구지?”
“음? 여태 모르고 있었나? 아, 하긴 모를 수도 있겠군. 그대는 아직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으니. 하긴, 천계에서나 유명하지, 하계에서는 워낙에 비밀리에 다니는 아이들이니.”
이랑진군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시의 바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으니.
“그곳의 수장 또한 ‘그’의 선택을 받지 않았던가.”
“……!”
“그들이 추구하는 시(詩, 시문)는 ‘그’를 찬양하는 노래요, 시(時, 시간)는 ‘그’가 언젠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그’가 내리는 시(試, 시험)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
8대 클랜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여 있다는 시의 바다.
동생과도 별다른 접점이 없어 수많은 회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내용은 일기장에도 남아 있는 것이 극히 드물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하강을 시도하려던 올포원을 제지했다는 것 말고는 없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녀석들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어째서 여태 나에게 아무런 접근도 없었던 거지?’
하지만 도처에 눈을 두고 있다는 그들이, 연우가 여기까지 올라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태껏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걸까. 그가 사용하는 것들이 칠흑왕의 형틀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계시록과 관련된 일은 왜 하질 않…… 아, 그건 아닌가?’
연우가 파악하기로 계시록은 칠흑으로 가는 길을 담고 있다. 그러니 시의 바다에서도 어떻게든 계시록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켈라트 경매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에메랄드 타블렛의 탁본을 그럴듯하게 꾸며 유통시켰을 무렵. 시의 바다도 일부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었는데, 혹시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소동 뒤로 모습을 비치지 않아서 의아하게 여겼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탁본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봤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연우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칠흑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버젓이 있는지도 모른 채 여태 내버려 두고 있었던 셈이었으니.
‘우선 놈들부터 만나야 하나? 할 일이 많아지는군.’
하지만 그만큼 칠흑으로 가는 길도 착실히 보여지고 있었으니.
다행히 연우는 자신이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도일.』
첫 번째 아이, 도일로 하여금 아르티야를 움직여 놈들을 찾으라고 지시하면 될 일이었으니.
『왜 그러세요, 형?』
『최대한 서둘러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급한 일인가요? 지금 망자의 함이 화이트 드래곤, 다우드 형제단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받아서 그걸 조사 중이었어요. 아무래도 놈들이 외뿔부족을 두고 뭘 하려는 것 같아요.』
외뿔부족?
스승님이 계신 곳에?
연우는 코웃음을 쳤다. 놈들이 잘도 자살행위를 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망자의 함이라면 페이스리스가 있는 곳일 텐데? 스승님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한 녀석이 스승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털었다.
『아니. 거긴 잠깐 중단하고, 이 일부터 우선 처리해.』
『네. 말씀하세요.』
연우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달의 아이를 찾아와.』
『머리만 들고 가면 될까요?』
연우는 순간 궁금해졌다.
대체 사고 구조가 어떻게 되면 ‘찾아오라’라는 말에 ‘죽여서요?’가 될 수 있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여린 면이 훨씬 강했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사도는 모시는 신을 닮아 간다는 말이 언뜻 떠올랐지만.
연우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살려서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