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20화 (520/862)

20화. 전사단 (6)

도일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난 뒤, 조용히 통신이 끊어졌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연우는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찝찝함을 애써 지우고, 이랑진군을 돌아보았다.

“영혼석을 찾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은데.”

영혼석은 총 14개. 그중 현재 세상에서 발견된 건 총 4개라고 알려져 있었다.

색욕의 돌은 비에라 듄이 훔치면서 대지모신과 섞이는 데 사용되었고, 오만의 돌은 동생이 회중시계를 세공하는 데, 식탐의 돌은 식탐황제가 갖고 있었다. 현재는 오만의 돌과 식탐의 돌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죄악석이 되어 연우의 손에 들어온 상태.

남은 하나는 천계 쪽에서 회수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확인된 적이 없었다.

혹시 그걸 이야기하는 걸까?

그리고 그걸 탐색하는 데 연우와 전사단을 용병으로 쓰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선은 자세한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먼저 전할 말이 있다.”

“뭐지?”

“상제께 약을 가져다주었던 것,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랑진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라플라스의 ‘간’을 가지고 삼신산을 방문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잠에 빠져 계셔야 했던 상제께서 조금씩 기침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모두 그대의 덕분이었다. 우리 천교의 모든 신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신의 사회, ‘천교’가 플레이어 ###와 권속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맹을 선언하였습니다!]

[앞으로 플레이어 ###와 권속들이 ‘천교’를 위태롭게 하는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천교’와 소속 신들은 당신들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줄 것입니다.]

[신의 진영과 개선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성향이 ‘선’으로 일부 기울었습니다.]

연우로서는 삼신산으로 가기 힘든 라플라스의 심부름을 해 준 것밖에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교가 보이는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자신도 영귀가 주었던려의 조각을 통해 창공 도서관을 방문할 수 있었던바. 천교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옥황상제는 좀 나아졌나?”

이랑진군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그대로 의식만 차리셨을 뿐, 아직 운신은 많이 힘드신 상태다. 혹시 창신병(創神病)이라고 들어 보았나? 달리 천마증(天魔症)이라고도 하지만.”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처음 들어 보는데. 하지만 이름을 봐서는…….”

“생각하는 그대로다. 천마증. 천마로 인해 생긴 후유증이란 뜻이지.”

이랑진군은 이제 까마득한 ‘옛날’이 된 과거를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과거 우리 천교는 천마가 태동할 시기에 가장 크게 그와 다퉜던 곳이었고, 그 과정에서 옥황상제께서는 아주 큰 타격을 입으셨지. 원래는 소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찌 운이 좋아 남긴 했었고.”

이랑진군은 몰락해 버린 옥황상제를 떠올리면서 쓰게 웃었다. 홀로 세상을 뒤덮으며 새로운 창세를 시작하려는 수미산마저도 집어삼키려 했던 존재가 그리도 약해지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래도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자신이 모시는 왕. 바로 옆에서 지키겠노라고 충성 맹세를 했던 대상이었다.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그때 상실한 힘은 모두 회복하지 못했다?”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런 피해를 입은 건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데바의 수장이었던 브라흐마가 몰락하게 된 경위나, 아스가르드의 오딘, 올림포스의 제우스 등…… 각 사회에서 창세에 관여했던 조물주며 창조신이 모두 쓰러지거나 후유증으로 잠에 든 것이 전부.”

“천마 때문이었다?”

이랑진군이 쓰게 웃었다.

“어디 그것으로 끝일까. 신이며 악마 등 모든 사회가 이 탑에 갇히게 된 게 바로 그 때문일진대.”

모든 사회들을 탑에 박아 버린 것이 천마라는 사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연우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칠흑왕을 공허에 처박은 존재라면…… 가능할지도.’

우주의 굴레마저 제멋대로 돌리던 존재가 아닌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이들도 어찌 보면 딱하게 된 셈인가? 원래는 여러 우주며 차원을 제 앞마당처럼 뛰어 놀았을 게 분명한 놈들이…… 하루아침에 탑에 갇힌 셈일 테니. 거기다 다시 올포원 때문에 천계로 내몰리기도 했고.’

연우는 오래전에 떠올렸던 가정을 다시 상기했다. 여러 차원과 우주로부터 도전자들을 끌어모은다는 탑의 진정한 목적은 사실 초월자들을 가두기 위한 감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초월자가 될 자격이나 재능을 가진 이들마저도 가둬 버리는 것이다.

천마.

그의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탑과 그의 관계는 또 무엇이고?

연우는 잠시 든 의문을 지우면서 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너희들이 찾고자 하는 영혼석은 옥황상제를 위한 건가?”

“그렇다.”

“아마 그건 하계에 있을 테고?”

“역시 똑똑하군.”

이랑진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찾은 영혼석은 탐욕(Avaritia). 신으로서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 게 하나라도 있는 게 중요할 테니.”

“위치는 알고 있나?”

“본 사회에 소속된 사도들을 시켜서 이미 탐색을 끝내 놓은 상태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거겠군.”

“그래.”

“어디지?”

순간, 이랑진군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연우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제대로 협약도 맺지 않고 정보만 새어 나가는 것이 두려운 거라면 물러나라. 나 역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섣불리 내 전력을 소모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연우로서도 영혼석에 대한 관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죄악’을 다루는 돌이라면 그에게는 더더욱 필요했다. 죄악석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그런 욕심으로 전사단을 위험으로 내몰고 싶지는 않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는 판국에 괜히 전력을 분산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이곳 말고도 당장 신경 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건 물론, 에레보스로 진입해 타천까지도 고민 중이라는 아테나 등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저쪽이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덥석 물 수는 없는 노릇. 여기서 이랑진군이 빠진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이미 전사 단도 초월성을 자각한 이상, 곧 머지않아 완전한 거인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

이랑진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오해를 한 모양이군. 그게 아니다. 나로서도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없는 곳이라 그런 것일 뿐.”

이랑진군도 거론할 수 없는 곳?

하계에 그런 곳이 있었던가.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디길래?”

“복마전(復魔殿).”

“……!”

이번에는 연우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복마전이라니!

“설마 우마왕의 영역에 영혼석이 있다는 거냐?”

“그렇다.”

“……미쳤군.”

연우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꽤 힘을 쓸 천교의 사도들이 왜 여태 영혼석의 위치를 파악하고도 얻지 못했는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마왕은 천마의 다른 얼굴, 미후왕이 소싯적에 ‘큰 형’으로 모셨던 존재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동주칠마왕의 흉명은 천교와 절교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니.

특히 연우는 동주칠마왕 중 하나인 사타왕의 강신과도 겨뤄 본 적이 있었던바. 그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로부터 영혼석을 가져오라고?

“나더러 우마왕과 싸우라는 건가?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대신에 검뢰라도 먹여 줄 생각 있는데.”

연우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하지만 이랑진군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복마전이 그곳을 점거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대가 난색을 표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용병’으로서 고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더구나 그곳을 노리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절교도 마찬가지지.

그쪽도 우리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지라.”

천교와 절교, 동주칠마왕이 한데 뒤엉킨 전장이라.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 드는 감정을 딱 하나로 요약했다.

“개판이로군.”

“개판이지. 아주 빌어먹을 정도로.”

이랑진군의 입가에도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도 사실 제안을 건넨 입장이었지만, 연우가 받아들이리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회가 개입할 가능성은?”

순간, 이랑진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안을…… 받아 줄 생각인가?”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나도 계산을 해야 하니. 대답부터.”

“없다. 그건 보증하지. 애당초 영혼석이 있는 그 장소는 관련된 신화가 없으면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음.”

연우는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신화가 없으면 접근이 어려운 장소. 하지만 연우에게는 미후왕이 남긴 허물을 흡수한 전적이 있으니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이랑진군이 조심스레 물었다.

“받아 줄 텐가?”

한참 뒤.

연우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랑진군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

『……대체 무슨 제안이 오고 가기에?』

『짜증 나는군. 마음 같아서는 저 그림자부터 어떻게든 치워 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간 화신체가 갈려 나갈 텐데?』

『그러니 답답해도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제길!』

반거인 전사단의 네 번째 정복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신과 악마의 사절들은 연우가 쌓아 올린 그림자 반구를 보면서 손톱을 물어뜯어야만 했다.

그들 간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으니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그들을 지원하는 각 사회들도 어떻게든 둘의 대화를 알아내라고 독촉하고 있었지만.

사절들도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림자 영역 안쪽은 연우가 쌓은 성역이라 그들의 권능이 전혀 미치질 않으니. 그렇다고 해서 저것을 강제로 깨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안달복달하는 그들과 다르게.

『흥! 그깟 신 따위와 놀아 봤자 무얼 한다고!』

왕왕!

다시 다섯 살 난 꼬마 모습으로 되돌아간 아가레스는 팔짱을 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가에 질투가 스쳤다. 마치 자신과 놀아 주던 삼촌이 갑자기 다른 친구들과 잘 놀아 주자 심통이 난 조카처럼 보였다.

그러자 강아지 형태를 한 펜리르가 공감한다는 듯이 옆에서 짖어 댔다.

아가레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펜리르를 돌아봤다.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이 몸과 ###간의 관계는 네놈 따위가 함부로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숟가락을 올릴 생각 따윈 마라. 저놈은 내 것이다.』

왕!

『뭐?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깊이라고?』

왕! 왕!

『그런 뜻에서 나는 욕심만 부려 대는 어린애에 불과하니 싫어 할 것이다?』

왕!

『헛소리 마라! 저놈이 얼마나 제 조카 놈을 아끼는지 아는가! 그러니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이 몸의 이런 모습도 아주 흡족해하고 있을 터!』

왕왕왕!

『뭐? 강아지가 더 낫지 않냐고?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가!』

왕! 왕왕!

언제나 그렇듯, 아가레스와 펜리르는 서로가 더 연우에게 가깝다면서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바로 두 사람이었으니. 만약 연우가 제대로 약속을 지킨다면 계시록을 얻을 곳은 그들 두 곳일 게 분명했다.

이미 그 광경이 익숙한 다른 사절들은 그렇겠거니 여기고 있었지만, 비교적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사절들은 조금씩 조바심을 내비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반거인이 독립을 할 수도 있었다.

『이랑진군과 사왕이라.』

『사왕이 무슨 생각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거인족이 부활하고 만다. 가장 좋은 건, 놈들을 이 스테이지에다 계속 묶어 두는 것이야.』

『……아니면 없애 버리거나.』

아주 잠시간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한데 모인 사절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꺼냈다면 기회다 여겨서 밀어내려 했겠지만, 지금은 암묵적으로 같은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암묵적인 동조는 이제 뜻이 되었다.

『이랑진군도 사실상 저쪽으로 넘어갔다고 봐야 할 테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저대로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신의 사회, ‘딜문’에 의견에 동조합니다.]

[신의 사회, ‘멤피스’가 의견에 동조합니다.]

……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만장 일치로 의견에 동조하며, 언제든지 합류할 것이라 의사를 밝힙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의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결국 사절들이 점차 물밑에서 크게 두 가지 진영으로 분리되던 그때.

『……열린다.』

망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말하자, 사절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제히 흩어졌다.

그림자 반구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연우와 이랑진군을 보는 그들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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