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21화 (521/862)

21화. 전사단 (7)

사절들의 궁금증은 결국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연우와 이랑진군, 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기에 대해 일절 함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의 사절들 중 몇몇이 이랑진군에 다가가 운을 띄워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건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절대 대답할 수 없다는 의지를 강하게 풍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내용은 알 수 없어도, 둘 사이의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

여태껏 수수방관하는 것에 가깝던 이랑진군이 아주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랑진군’이 권능, ‘치수(治水)의 용’을 발휘하였습니다!]

촤촤촤-

그가 검을 뽑은 순간, 땅거죽이 크게 뒤집히면서 그 아래 흐르고 있던 수맥이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타계의 신들은 모두 거기에 휩쓸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반거인들이 뒤늦게 난입하면서 그런 그들을 차례로 해치웠다.

그리고.

띠링!

[시나리오 퀘스트(신과 왕의 증명 IV)을 일부 수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병탄한 영토의 수(6/7)]

[건설된 신전의 수(3/6)]

드디어 마지막 영역, 기어 다니는 혼돈의 대신전이 있는 곳만 남겨 두게 되었다.

* * *

‘마침 순결의 돌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런 거래를 할 수 있었으니.’

그동안 연우는 순결의 돌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다.

항상 어둠에 가려져 있던 하데스의 신전을 밝혀 주며, 디스 플루토의 뜨거운 불길이 되어 주었던 순결의 돌.

다행히 페르세포네가 티탄-기가스를 이끌고 돌진해 올 당시에 키클롭스 3형제는 순결의 돌을 적들로부터 숨기는 데 성공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가져오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3형제 중 유일하게 생자였던 막내 아르게스조차도 마지막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으니. 어떻게 가지고 나오려는 시도를 했다간 목숨뿐만 아니라 영혼석까지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랬더라면.

‘대지모신은 더 강화되었을 테고.’

하지만 아르게스는 죽음의 위기가 닥친 순간 기민한 판단하에 순결의 돌을 비밀 장소에 묻어 두는 데 성공했다.

하데스의 대신전, ‘명왕의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심처(深處). 오로지 하데스와 키클롭스 3형제가 아니면 열 수 없는 장소에 보관한 것이다.

‘확실해. 대지모신 등은 타르타로스에 순결의 돌이 있는 걸 몰라.’

이것은 분명히 연우에게 있어 기회였다.

타르타로스는 언젠가 그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장소. 명왕의 후예로서 반드시 수복해야만 하는 성역이었다. 하물며 아테나 등이 있다는 에레보스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으니, 그 과정에서 천교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우와 전사단은 탐욕의 돌을 찾는 데 도움을, 천교는 순결의 돌을 찾는 데 서로 협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두 영혼석을 교환한다.’

사실 연우에게는 순결의 돌이, 천교에게는 탐욕의 돌이 각각 계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연우는 죄악석을 가지고 있는바, ‘주선(Virtues)’의 성질을 띠고 있는 순결의 돌이 큰 효용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받았던 퀘스트도 ‘죄악석을 완성하라’였지, 주선의 성질을 부여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칫 죄악석의 효능만 떨어뜨릴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연우가 걷고 있는 신위인 죽음과 투쟁에 순결의 돌은 성질이 너무 맞질 않았다. 하데스조차도 순결의 돌을 직접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무구를 제련하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신의 진영인 천교에 있어 탐욕의 돌은 부담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순결의 돌이 주어진다면? 그때 천교가 가질 힘은, 부활할 옥황상제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연우와 이랑진군은 쌍방 간에 원하는 목표를 얻을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로 협약을 맺었다.

연우는 죄악석을 완성하기 위해서, 천교는 옥황상제의 부활을 위해서.

그리고.

그 협약의 첫 번째 일환이, 바로 전사단의 각성이었다.

다행히 천교는 다른 신의 사회들과 다르게 거인족과 크게 분쟁을 치른 신화가 없었던바. 그래서 연우에게 도움을 주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랑진군은 치수를 이룬 수신이기에 앞서 스스로도 이미 고절한 무위를 통달한 무신(武神). 가장 선두에서 타계의 신을 물리치는 위용은 연우로서도 놀라울 정도였으니. 어째서 그가 천교의 삼신장에 꼽힐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활약에 가장 심통이 난 건 전사단이었다.

『아아악! 저 빌어먹을 신 새끼가 또 내 거 스틸했어! 내가 먼저 찜했었는데!』

『이러다가 공적치만 계속 저쪽에다 빼앗기는 거 아냐?』

『젠장! 내 선악과!』

『저 새끼 좀 누가 막아 봐! 발데비히, 뭘 하고 있는 거야?』

자신들이 점찍은 적들을 계속 이랑친군이 가로챈다고 생각해 뿔이 단단히 난 것이다. 전투에 이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싸우질 못해서 화를 내다니.

‘이렇게 단 며칠 만에 괴리가 커진 경우도 없겠지.’

연우는 전사단의 항의를 못 들은 척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는 발데비히를 슬쩍 보다가, 다시 이랑진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래 내용을 복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랑진군이랬나? 저놈도 참 불쌍하단 말이지. 떡 줄 놈은 진짜 줄 생각도 않고 있는데, 혼자서 신나서 저리 방방 뛰어다니고 있으니…… 어휴! 나중에 불쌍해서 어쩐다냐.」

샤논이 연우와 같이 전장을 구경하다 말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의 눈꺼풀 사이로 골이 살짝 팼다.

“왜 내가 거래에 제대로 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일종의 질책이었지만.

오히려 반문을 던지는 건 샤논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인이 그렇게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행복한 거래를 할 사람이 아니잖아? 그냥 홀라당 혼자서 다 먹어 치웠으면 먹어 치웠지, 나눠 먹으려고? 못 먹을 거 같으면 아무도 못 먹게 판부터 엎어 버리고 말지.」

‘…….’

「아냐?」

‘……맞다.’

「거봐. 맞잖아.」

샤논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연우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 자신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박히게 된 걸까?

실제로 그는 순순히 순결의 돌을 천교에 줄 생각이 없었다. 빼먹을 수 있을 만큼 빼먹고 난 뒤, 뒷주머니에 넣을 생각이었지. 설사 준다고 해도 잠시 맡겨 둔다는 생각으로 줬다가 언젠가 도로 되찾아 올 생각이었는데…… 샤논은 너무 쉽게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조심해. 그러다 진짜 인성질과 기만으로 신위를 얻으면 어쩌려고 그래?」

연우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놀려 대는 샤논에게 쓴맛을 보여 줘야 하나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어느새 전투가 끝난 평원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거인의 숲 너머에 오로지 어둠으로만 가려진 지역이 있었다.

과거 거인족들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 중심지.

기어 다니는 혼돈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 있을 무렵까지도 여태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대체 녀석은 뭘 꾸미고,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연우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제법 머리를 쓴다고 알려진 신과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중심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터. 지금부터는 무작정 몸으로 부딪쳐야만 했다.

‘가 보면 알겠지.’

이따금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는 사절들과 다르게, 연우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저곳도 꺾을 대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이미 튜토리얼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만 줄곧 해치우며 오지 않았던가.

기어 다니는 혼돈도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전사단도 그런 연우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마땅히 극복해야 할 시련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충분히 쉬었나?”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왕이자 신이시여!』

“그럼 다시 간다. 이제 마지막 전쟁이다.”

『마지막 전쟁이다!』

『거인족의 긍지를 놈에게 보여 주자! 놈을 죽음으로 인도하자!』

『우리의 왕이자 신께 승리를!』

둥, 둥, 둥-!

처처척!

그렇게 다시 전고(戰鼓)의 울림 소리와 함께, 전사단의 행군이 재차 시작되었다.

* * *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 중 심지, ‘대혼성역(大混聖域)’에 입장하였습니다.]

『분위기 한번 거지 같군.』

『타계의 신 놈들은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 거지? 저놈들은 이런 곳이 좋기는 하나?』

『너무 으스스한데.』

『감각도 교란이 심각하고.』

반거인의 전사단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크게 흥분해서 날뛰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로 주변을 예리하게 노려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중심지의 환경은 여태 그들이 정복했던 구역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다른 구역들은 기괴한 숲과 늪으로 이뤄져 있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생존이 가능한 스테이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중심지는 아예 그런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기의 성분도, 환경을 이루는 여러 생명체도, 모든 것이 그들을 ‘거부’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면도 영 느낌이 이상하고. 젠장! 속도를 내기가 너무 힘들어.』

『일단 천천히 움직이자고. 어떤 놈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반거인들이 그렇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제길. 빌어먹을 혼돈의 기운 같으니.』

『이래서 이곳을 방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천계와의 통신도 갑자기 두절 된 것 같지?』

『본체와의 연결도 약해. 이런. 여기서 당하면 큰일이 나겠는데.』

신과 악마들은 천계와의 연결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연우가 단말이 되어 직접적으로 채널링이 연결되어 있던 때와 다르게, 지금은 각 사회가 인과율을 충분히 소비하며 화신체를 내리고 있는 상태. 그렇다 보니 조금만 연결이 불안정해도 그들은 덩달아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본체와의 연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게 되면 자아에도 강한 타격이 가해질지 모르는 데다가, 자칫 기어 다니는 혼돈이 끊어진 연결 고리에다 의념을 투사해 천계로 역습을 가하려 든다면 진짜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타계의 신들이 스스로 ‘안쪽’이라 부르는 환경에 가까운 세계.

신과 악마들이 봤을 때에는 혼돈과 무질서로만 가득 찬 세계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생명이 잉태할 수 있는지, 타계의 신과 같은 거대한 우주적 존재가 탄생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웬만한 환경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악마들도 이해를 할 수 없어 굳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역시 탑의 환경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곳은 쥐약인가?’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계시록을 통해 우주의 단면을 엿보았다지만, 한평생을 지구와 탑에서만 지냈던 그에게 이곳은 평생을 가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장소일 게 분명했다.

특히 가장 적응이 안 되는 점은 자꾸만 겹쳐지는 공간과 교란되는 감각이었다. 마력을 외부로 방출해도 제대로 통용되질 않으니 많이 갑갑했던 것이다.

더구나 중심지에 들어온 지 한참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타계의 신들은 여태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도 마찬가지. 분명히 녀석의 느낌이 저 멀리서 감지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가까워질 생각을 않았다. 마치 달을 향해 아무리 달려 봤자 거리는 늘 똑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형지물도 비슷한 모양만 계속 반복되니, 정말 길을 잘 잡고 있는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연우 일행은 저 멀리 어렴풋이 잿빛 안개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

마치 중세 시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크기와 모양새를 갖춘 성채.

가까이 갈수록 성채는 점점 더 또렷한 모습을 갖췄다.

전사단과 사절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저게 도통 뭔지를 알 수 없으니 정체가 너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발데비히가 연우를 돌아봤다. 명령을 내려 달라는 목소리.

연우가 뭐라고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지이이잉-

철그럭, 철그럭!

갑자기 칠흑왕의 형틀이 거세게 진동했다. 연우의 손발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주 격하게. 거기다 공허로 이어지는 쇠사슬까지 요동쳤다. 비그리드가 다시 발작을 시작했단 뜻이었다.

『저기에…… 저기에 너와 똑같은 것이 있구나! 키키킥! 맛난 것이 있……!』

마성의 목소리는 다시 공허 속에 파묻혀 사라졌지만, 칠흑왕의 형틀은 더 크게 공명했다.

무엇보다 놓칠 수 없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것이 있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혹시……?

그 순간.

그그긍-

여태 단단히 닫혀 있던 성문이 칠흑왕의 형틀과 마찬가지로 크게 요동치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괴한 도르래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확 풍겨 나오는 짙은 안개.

거기에 섞인 것은…… 분명 공허, 아니, 칠흑의 향이었다.

연우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안에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단 사실을.

「주. 인님.」

순간, 연우 옆으로 부가 공간을 열고 나타나 고개를 푹 숙였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연우는 앞장서서 전사단과 사절들을 이끌고 성문에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칠흑의 향은 더욱 거세졌다. 전사단이며 사절들은 그 향에 숨이 턱턱 막혀 왔지만, 반대로 연우는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완전히 성문을 통과했을 때.

그곳에는 한 존재가 커다란 바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발데비히와 똑같은 외양. 하지만 풍기는 위세는 전혀 다른 존재.

기어 다니는 혼돈.

녀석의 화신체가 차갑게 웃었다.

“반갑구나, 노…….”

“발데비히.”

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의 말허리를 끊으며 말했다.

“저놈, 내 앞으로 끌고 와.”

팟!

발데비히의 신형이 움푹 꺼짐과 동시에 기어 다니는 혼돈의 뒤편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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