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전사단 (8)
발데비히는 연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움직였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기어 다니는 혼돈. 녀석은 그에게 있어 철천지원수였다.
오로지 재미로 동족들을 가축으로 길렀던 자. 가진 힘이 없었기에 처음 이곳에 와 녀석을 만났을 땐 모든 거래에 응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과 동족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발데비히는 신을 만났고, 그 신의 인도에 따라 여기까지 와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녀석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도 미처 그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듯,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발데비히의 대검이 녀석의 가슴에 박힌 뒤였다.
퍼억!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육체가 크게 들썩였다.
발데비히는 여러 번의 전투를 전전하며 타계의 신들이 갖고 있던 신성을 빼앗아 이미 초월성을 완전히 깨우친 상태.
당연히 신살의 업적이 담긴 대검의 공격도 아주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육체가 아닌, 그 속에 있는 근본. 즉, 영체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기술.
발데비히는 자신의 기습이 먹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대검을 따라 전달되는 감촉이 분명 다른 타계의 신들을 벨 때와 똑같았으니까.
물론, 이것으로 정말 녀석이 죽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당한다면, 기어 다니는 혼돈이 그동안 괴물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테니. 용종과 거인족, 두 초월종을 모두 멸망시킨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끼리릭-
마치 기계 장치가 돌아가듯, 기어 다니는 혼돈의 머리가 백팔십 도로 기괴하게 꺾이면서 발데비히와 눈을 마주쳤다.
발데비히는 본인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자신을 쳐다보는 섬뜩한 느낌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나는 그저 한낱 미물에 불과한 너희들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 싶어 이런 불편한 몸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건만. 참으로 애석하구나.”
『웃기지 마라. 네놈이 지금껏 해 온 말 중에 우리를 우롱하는 것 말고 제대로 된 게 있었던가?』
“당연히.”
피식-
기어 다니는 혼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없었지.”
퍼석, 화아아!
순간,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가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며 흩어졌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 재조립되더니, 수십 줄기의 촉수가 단번에 쏟아지면서 발데비히에게 휘감겨 들려 했다.
퍼퍼펑!
발데비히는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면서 대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검뢰가 사방으로 튀면서 검붉은 불기둥을 잇달아 토해 냈다.
「일어. 나라.」
그때, 부가 양손을 높이 들더니 그대로 지면을 찍었다. 마력이 한 가득 스며들자, 순간 대형 마법진이 생겨나면서 기괴한 모양을 한 갖가지 괴수들이 대량으로 나타나 촉수들을 모두 끊어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끊어진 촉수들도 퍼석, 하고 잘게 부서지면서 금세 다른 형태를 뗬으니.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부가 소환한 것보다 더 섬뜩한 형태를 한 괴물이 되어 잔혹한 이빨을 드러냈다.
캬아악!
캬캬캬캬-
부는 검지를 들어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동시에 하늘을 따라 수십 수백 개의 마법진이 잇달아 맺히면서 마법 폭격을 개시했으니.
수없이 많은 불길과 얼음 따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콰콰콰쾅!
쿠르릉-
부는 자신이 어떻게 아크 리치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려는 듯, 온갖 다양한 최고 마법들을 잇달아 캐스팅해 댔다.
가히 상위 용종들만이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연산 능력. 이미 전생의 경지를 뛰어넘어 삼라만상의 법칙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의 입자들은 촉수나 괴생명체 등 여러 형상을 갖추다 부서지기를 반복하면서 뱅글뱅글 요란하게 춤을 춰 댔다.
『형제들이여, 가자!』
『놈을 어떻게든 죽여, 선조들의 원한을 갚자!』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겠다!』
『우리의 신께, 위대한 승리를!』
그것을 보다 못한 전사단도 저마다 무기를 꽉 쥐며 와락 달려들었다.
여태 그들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며 희롱하기 바빴던 존재. 그런 존재를 죽여 해방되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날을 잔뜩 세웠다.
콰르릉-
결국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채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그사이.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입자들 중 일부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하늘에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자들이 이번에는 발데비히가 아닌 다른 형태를 갖췄다.
순간, 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득-
녀석을 만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이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동생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풍기는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머지는 똑같아도 너무 똑같았다.
심지어 유전 형질까지도 전부.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야. 뭐, 미물들이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이리 아등바등하는 모습도, 이 나름대로 재미가 있구나.”
베이럭은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계약을 통해 동생의 DNA를 제공하고, 이때 전수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클론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었다. 전부 그의 비원이었던 신인인지 뭔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연우는 넘지 못하고 파멸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베이럭과 달랐다.
그는 동생의 DNA를 토대로 베이럭이 그토록 만들어 내고자 했던 신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
이미 스스로가 가진 지식을 토대로 완벽한 클론을 만들어 내고, 갖가지 신권과 권능을 불어 넣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전지와 전능에 가깝다고 알려진 존재이니 그런 작업은 크게 힘들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연우는 화가 났다.
동생의 영혼은 아직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칠흑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텐데, 다른 놈들은 그저 그것을 유희거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으니.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물론, 너도 예외는 아니겠지?”
연우는 녀석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파직, 파지지직-
콰콰콰콰!
“너는 어떻게든 죽이고 말겠어.”
연우는 검뢰를 잔뜩 끌어 올리면서 모든 권능을 전개했다. 죄악석이 미친 듯이 떨리면서 드래곤 하트가 마력을 최대 출력을 내기 시작했다.
[6차 용체 각성]
콰드득, 콰득-
피부가 잔뜩 뒤집히면서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왔다. 이제는 보석을 박은 것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늘은 연우가 얼마나 심유한 마력을 품고 있는지를 완연히 말해 주고 있었다.
눈가에는 용신안이 맺히고, 송곳니는 잔뜩 뾰족해지면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등줄기를 따라 용의 날개를 잔뜩 뽑아내면서.
연우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절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
『……젠장.』
사절들은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 연우가 그들에게 따로 주문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제 실행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
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사절들에 기회를 뺏길까 싶어 뒤도 안 보고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 막상 그 상황이 되니 꺼려졌던 것이다.
“하지 않겠다면 빠져!”
『젠장!』
『빌어먹을……!』
연우가 한 번 더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절들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분노가 잔뜩 맺혔다.
그리고.
[신의 사회, ‘딜문’의 결의에 따라, ‘해신의 폭풍’이 생성되었습니다!]
[신의 사회, ‘데바’의 결의에 따라, ‘폭랑(爆浪)’이 생성되었습니다!]
[신의 사회, ‘멤피스’의 결의에 따라, ‘라(La)의 영광’이 생성되었습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의 결의에 따라, ‘마왕 강림’이 생성되었습니다!]
……
연우를 따라 막대한 양의 버프가 걸리기 시작했다.
대축복(大祝福).
이름처럼, 그 하나하나가 각 사회에서 최고로 치는 축복이었다. 한 번 내리기 위해서는 소속된 모든 신이며 악마들이 막대한 힘을 쏟아내야만 해서 지난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이것이 발동되었던 때는 극히 드물었다.
꼽아 보라면 과거 올림포스가 헤라클레스를, 아스가르드가 베오울프를 탄생시킬 때나 그리했을까. 가장 최근에는 르 인페르날이 인위적으로 73번째 마왕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던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등대지기 루시엘을 잡기 위해서였을 때였으니, 천 년도 훨씬 더 넘은 일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사회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을 때, 혹은 그에 준하는 빅 이벤트가 벌어졌을 때에나 발동시키던 것이었지만.
연우는 이것을 자신에게 사용해 줄 것을 과감하게 요구했다.
당연히 각 사회들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연우가 가진 힘은 그들로서도 우려가 될 수밖에 없는 수준이건만, 그걸로도 모자라 대놓고 자신에게 대축복을 달라고 하니 너무 뻔뻔했던 것이다.
더구나 진영을 막론하고, 사회들이 한 인물에게 한꺼번에 대축복을 걸어 준 전례는 아예 없었다.
또한, 대축복은 정해진 기한이 끝나더라도, 영혼의 격을 강제로 끌어 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효과가 남아 있었다.
각 사회가 나서서 ‘보증’하는 인물이란 뜻이니, 사회가 유지되는 한 대축복도 절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막대한 인과율까지 소모되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또다시 계시록을 들고 협박을 해 대니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계시록의 거래가 끝나는 대로. 연우와 그를 따르는 모든 권속들부터 일차적으로 제거해 버리겠노라고.
물론, 이런 불만은 연우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방안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타계의 신 중에서도 가장 수위에 꼽히는 대신격. 어쩌면 천마와 같은 초월신과도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만한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런 존재를 상대하기에 현재 자신이 가진 전력은 많이 모자란 게 사실이었고.
이를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이점을 사용하는 수밖엔 없었다.
팟!
파앗!
동상이몽을 하는 상황이었으나, 어쨌든 대축복은 연달아 연우에게로 전달되고 있었고.
연우는 충만하게 차오르는 힘을 한껏 느끼면서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권능 전면 개방]
수천 개에 달하던 신과 악마들의 권능을 전부 포기했다지만, 연우는 이미 자신만의 신화를 써 내려 가면서 두 신위에 걸맞은 권능들을 차례대로 개화시키고 있는 상태.
하늘 날개는 그런 권능들을 묶어 주고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이를테면, 권능의 범주를 넘어선 신권(神權). 차연우라는 신적인 존재를 구성할 수 있게 해 주는 중 심핵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특징이 저마다 달라 서로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대축복들을 하나로 묶어 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영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한계에 달하는 연산 처리로 뇌가 타 버릴 듯 뜨거워지고, 육체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재생]
이제는 숙련도가 최대치에 가깝게 올라간 스킬 덕분에 육체는 붕괴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새로운 용체 각성은 따라오지 않았지만, 6차 용체 각성은 다시 한계치까지 성장할 수 있었으니.
콰아앙-
연우는 지면을 으스러져라 밟으면서 말 그대로 빛살처럼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로 쇄도했다.
“호오.”
녀석이 재미나다는 듯이 가볍게 탄식을 흘리면서 주먹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탑 내에 갇혀 아등바등하는 여러 신과 악마의 힘을 한 몸에 받은 연우의 형태가, 그의 눈에는 너무 기이해 보였던 것이다.
대체 미물 주제에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역시 재밌어, 넌.”
기어 다니는 혼돈은 녀석이 여기까지 오기를 참고 기다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재미난 경험을 해 볼 수 없었을 테니.
그런 녀석의 모습이.
연우는 너무 증오스러웠다.
동생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웃는 모습이 정말이지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녀석에게는 아마 지금 이 순간도 단순한 유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지.
그것이 못내 불쾌했다.
콰아아앙!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쳤다. 그러자 검뢰와 녀석의 신력이 뒤섞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공간 여기저기에 깊은 흠집을 냈다. 공간 너머에는 공허가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성채도 어느새 반파되면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로.
촤르륵, 촤륵-
어느새 검은 쇠사슬이 잇달아 위로 튀어나오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를 칭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