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23화 (523/862)

23화. 전사단 (9)

대축복을 잔뜩 짊어진 연우와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가 맞 부딪칠 무렵.

휘리릭!

기어 다니는 혼돈이 곳곳에 뿌려 뒀던 신력들이 뭉치면서 수십 수백 마리에 달하는 타계의 신으로 변모했다.

권속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께, 영광을!』

『승리를 가져다 드리자! 우리 신의 신화는 전부 승리로만 가득할 것이니!』

『우리의 신을 위한 노래를 널리 퍼뜨려라!』

반거인의 전사단은 저마다 연우를 위한 승리를 부르짖으면서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검붉은 불길이 마구잡이로 번쩍이면서 성채를 초토화해 나갔다.

전사장 발데비히가 외쳤듯이, 이것은 그들과 그들이 모시는 신을 위한 성전(聖戰)이었으니.

모시는 신께서 위대한 존재, 신과 악마들보다도 훨씬 초월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그 속에 ‘패배’란 단어를 끼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전투는 아주 열렬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죽이고, 또 죽이기만을 반복해 나갔다.

적에게는 죽음을, 아군에게는 투쟁을 가져다주는 싸움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성화에 그려질 것처럼 너무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 때문에 기어 다니는 혼돈을 쫓아 그들의 앞을 가로막던 타계의 신들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 떻. 게.

이. 럴. 수. 가.

말. 도. 안. 된.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여태 연우와 전사단에 의해 성역을 빼앗겼던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어 다니는 혼돈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수족들. 실력이 되지 않아 바깥으로 밀려난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외신(外神)’의 급에 거의 다다른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사단이 그동안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면 소싯적의 거인족과 비교해도 별 차이 나지 않는 정도가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반거인들이 초월성을 잠재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빠른 개화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것이냐!』

발데비히는 그런 놈들을 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로서는 저딴 말을 해 대는 놈들이 같잖기만 했다. 자신들이 언제까지고 영원히 노예로만 지낼 줄 알았던가!

콰콰콰-

발데비히의 그런 분노는 더 큰 투쟁심을 이끌었으니. 그럴수록 그에게 심어진 연우의 신화는 더더욱 빛을 발했다.

콰르르릉!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절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내걸었던 조건에는 대축복의 지원 외에, 직접적인 전쟁의 참여도 있었으니.

물론, 그들로서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올포원과의 전쟁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전선을 더 늘리게 생겼으니. 거기다 잠재적인 적이 될지도 모르는 연우에게 계속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현실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싸우기 싫어도, 그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만 하는 처지였다.

쿵!

쿵!

결국 사절들은 하나둘씩 이 땅에 본체를 강림시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각 사회들은 그만큼 상당한 인과율을 감당해야만 했지만.

그만큼 본체를 드러낸 사절들은 강한 위용을 자랑할 수 있었다.

여태 연우에게 휘둘리기만 했던 모습과는 달리, 왜 그들이 상위 신격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려는 듯 온갖 권능을 과감하게 풀어 댔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복원되길 수차례. 웬만한 행성은 몇 번씩이나 멸망했을 공격들이 히든 스테이지를 가득 물들였다.

특히 몇몇 악마들은 이런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펜리르’의 요청에 따라, 다른 ‘재앙의 남매들’이 그에게 힘을 위임합니다!]

펜리르는 기존의 덩치보다 족히 열 배는 커지면서 단숨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재앙의 남매들. 세상을 삼킨다는 뱀, 요르문간드와 죽은 망자의 세계를 다스린다는 여신, 헬이 차례로 맏이인 펜리르에게 힘을 실어 주면서 거대화가 이뤄진 것이다.

쾅!

콰르르-

웬만한 타계의 신보다도 훨씬 커진 펜리르가 거대한 앞발을 녀석들이 뭉쳐 있던 곳의 중앙에다 박았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중력과 함께 지면이 그대로 눌리면서 충격파가 사방팔방으로 번져 나갔다. 타계의 신들이 거기에 휩쓸리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가레스가 나섰다.

[‘아가레스’의 요청에 따라, ‘동마왕군’이 출현합니다!]

『나의 아이들아, 오늘 이곳에서 재미난 무대를 꾸며 보자꾸나!』

어느새 수십 쌍의 검은 날개를 화려하게 펼친 미남자로 돌아온 아가레스는 하늘을 보며 잔혹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이 활짝 열리면서 나타난 마의 군단은 펜리르로 인해 진영이 어그러진 타계의 신들 사이로 공습(空襲)을 시도하며 놈들을 차례로 찢어발겼다.

그렇게.

마지막 성역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는 한 치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을 거듭했다.

* * *

“재미난 짓을 하는군.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 그분을 강제로 잠들게 했다던. 확실히 남다른 게 있어.”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는 자신을 칭칭 감은 검은 쇠사슬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들마저도 강하게 속박해 버리는 쇠사슬.

확실히 이것은 수많은 섭리를 거느려 온 그에게도 부담이 가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힘을 주고, 신력을 불어 넣어도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쇠사슬이 그를 더 촘촘하게 엮어 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건 좀 피하고 싶군. 세상이 아무리 따분하다지만 아직 보고 싶은 게 훨씬 많아서 말이야.”

기어 다니는 혼돈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갑자기 화신체의 눈가에서 이지가 사라지더니, 웃는 낯 그대로 고개가 툭 떨어졌다.

파스스-

화신체는 마치 모래성처럼 부서지면서 쇠사슬 사이로 빠져나갔다.

화신체로 연결되던 의념을 강제로 단절시키면서 쇠사슬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쇠사슬이 속박하던 것은 어디까지나 화신체였으니. 그냥 쓸모가 다해 버린 것 같았다.

어차피 기어 다니는 혼돈이 가진 신력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별 티도 나지 않을 테니.

“귀찮은 짓을 하는군.”

연우는 쇠사슬을 회수하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본체를 찾아 용신안에 마력을 가득 불어 넣었다. 이런 식으로 화신체를 계속 상대해 봤자 괜히 시간과 힘만 허비할 뿐이었다.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자의 눈]

금색으로 물든 용의 눈이 기어 다니는 혼돈을 쫓아 수없이 접힌 공간의 단면들을 넘어, 가장 안쪽에 다다랐을 때.

‘……뭐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굳어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그곳에 기어 다니는 혼돈은 있었다. 크기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 대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의념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위치가.

‘전부?’

연우는 등골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바로 자신의 발밑, 정확하게는 권속과 사절들이 딛고 있는 공간의 밑에 위치해 있었다.

중심지는 녀석의 성역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기어 다니는 혼돈,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순간, 연우는 녀석의 노림수를 깨닫고, 뒤로 돌아서 모든 권속과 사절들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모두 피해!』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 미.

늦. 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아앙!

연우가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폭발이 땅거죽을 뒤집고, 일대 공간을 일거에 아작내면서 중심지 전체를 깡그리 밀어 버렸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본체를 현신(現身)하려 시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데이터량은,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영압은 일개 스테이지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고.

당연히 가뜩이나 수많은 신과 악마들의 본체 강림으로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던 히든 스테이지는 그대로 붕괴되어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신과 악마들 중 상당수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일으킨 영압에 그대로 짓눌려 소멸하고 말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다행히 대다수는 위계가 위계인 만큼 소멸은 피할 수 있었지만, 큰 타격까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붕괴가 주는 여파에 모조리 휩쓸려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에러! 허가받지 않은 존재, 이레귤러(Irregular)의 침입이 확인되었습니다.]

[버그가 발생하였습니다.]

[버그가 발생하였습니다.]

[방화벽의 단계가 상향 조정됩니다.]

[이레귤러가 직접 차단됩니다.]

에러 메시지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동시에 탑의 방어벽이 작동하여 기어 다니는 혼돈의 본체를 다시 외부로 밀어내고 있었지만.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히든 스테이지 곳곳에 흩어진 사절들이며 반거인들은 큰 부상을 입은 채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댔다.

심지어 그건 타계의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인인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는지 상당수가 붕괴된 영체로 인해 괴성을 꽥꽥 질러 대는 중이었다.

다행히 연우는 녀석의 노림수를 깨닫고, 그림자를 끌어 올려 망자의 벽을 세운 덕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방금 전, 녀석의 육탄 돌격으로 인해 권속들과의 연결 고리 중 상당수가 끊어져 버렸으니.

설마하니 녀석이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감행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연우로서는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

정. 말. 재. 밌. 어.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를 보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주 크게 웃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기분 좋았던 때는 수만 년 만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그나마 남아 있던 연우의 마지막 이성 끈을 끊어 버렸다.

여러 대축복을 받으면서 녀석을 잡고자 했지만, 녀석은 그런 자신을 약 올리듯이 딱 한 번의 현신만 내보이고 다시 어둠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탑이 갖고 있는 자체 방화벽이 녀석을 거부해 튕겨 내는 중이라지만.

연우는 본능적으로 녀석이 이번에 물러나면 한동안 녀석의 본체와 마주할 기회가 없을 것임을 알았다.

이미 탈환한 성역이며 겨우 세운 신전은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 깡그리 다 날아가 버린 상태.

이대로 남은 중심지를 가진다고 해도, 히든 스테이지는 이미 성역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상실해 버렸다. 쓸모없는 폐허지에 불과한 것이다.

반대로 이것은 탑의 일부에 균열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

기어 다니는 혼돈은 방금 전 현신으로 남긴 신력을 따라, 앞으로 언제든 재차 의념을 투사할 수 있었다.

즉, 녀석은 잃은 게 전혀 없단 뜻이었다.

그래서야 반거인의 독립을 쟁취했다고 해도 반쪽짜리에 불과했으니. 기어 다니는 혼돈에 대한 원한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참을 수가 없었다.

촤르르륵-

그래서 연우는 수복되는 공간 너머로 사라지는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로 검은 쇠사슬을 내뻗었다.

콰직!

끝이 녀석의 본체에 단단히 박힌 느낌이 들자마자, 쇠사슬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팽팽해졌다.

그것을 보면서, 연우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성!’

그 순간, 옆쪽으로 공허가 열리면서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는 비그리드가 나타났다.

웅, 우웅-

비그리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키키키킥! 거 보아라! 결국 네놈은 날 부를 수밖에 없었음이니!』

마성은 연우를 보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닥치고, 결정해. 협력할 건지, 말 건지.”

『협력한다면. 내게 남는 건, 뭐지?』

“맛난 먹잇감.”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애송아, 오늘은 봐주도록 하마.』

키키킥!

마성의 음산한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여태 비그리드를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이 모두 풀렸다.

연우는 그쪽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비그리드가 저절로 날아와 손에 달라붙었다. 착 감기는 그립감. 그는 간만에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애당초 무왕에게 처음 배웠던 것은 검술.

당시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죄악석에서 쏟아진 마력과 비그리드에서 샘솟은 마력이 융화되면서 합일(合一)이 이뤄졌다.

연우는 의식의 세계가 무한하게 확장되는 신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거대 의식에 잠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이성은 꼿꼿했고, 의지도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체내에서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이 흘러넘쳤으니.

마성 융합.

계시록.

두 개의 신위.

죄악석의 완전 개방.

대축복의 버프.

그리고 드래곤 하트까지.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연우, 아니, 연우를 닮은 무언가를 이루고 있었다.

『###!』

그때, 발데비히가 다급하게 연우의 이름을 불렀지만.

“다녀오마, 발데비히. 사도로서, 이곳을 지켜라.”

연우는 그에게 한마디만 남기고 쇠사슬을 다시 잡아당겼다.

도르래에 딸려 올라가듯이 그의 몸뚱이도 허공으로 휙 떠오르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있는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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