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화. 거마신룡 (1)
발데비히를 비롯한 거인족들이 내뿜는 기세는 아주 살벌했다.
배반자들은 그들을 보는 내내 뻣뻣하게 굳은 얼굴 표정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기억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악몽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거인족은 신들에 있어 항상 걸림돌이자 방해꾼이었다.
하나의 문명을 그럴듯하게 창조해 놓고서 겨우 경영을 하려 들면, 항상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와서는 깽판을 치고 잔뜩 약탈을 하거나 병탄을 하는 등 악랄한 짓만 일삼아 댔으니.
악마들도 이따금 마계의 확장을 위해 여러 행성들을 침략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스스로의 이기심이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제 욕구만 채워지면 끝날 때가 많았다.
용종도 마찬가지. 아니, 애당초 신과 용종은 그리 많이 부딪칠 이유가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그들은 오히려 다른 곳의 일에는 아주 무관심했으니까. 그들이 구축해 놓은 영역만 건드리지 않으면 되었다.
하지만 거인족은 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해 놓은 것을 날름 집어삼키기를 아주 좋아했고, 그런 주제에 싸움에는 얼마나 능한지 막으려 할 때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사회들을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이다가, 그들이 기어 다니는 혼돈에 휘말려 완전히 사라졌을 때는 아주 크게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부활이라니!
어떻게든 거인족의 재탄생을 막고자 노력했던 이들로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마주한 거인족이 ‘그냥’ 거인족이 아니란 점이었다.
크어어엉!
크앙! 크아아아!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는 거인족들의 부름에 응답하듯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휘휘휘-
곧 거인족들의 옆으로 기운이 이리저리 뭉치면서 하나둘씩 모양을 빚어내기 시작하더니, 점차 거인족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현신 때문에 죽었던 이들이 그림자 영역의 도움을 빌려 영체로 재생(再生)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재생하게 된 존재는 그 들만이 아니었다.
「여기는…… 어디지?」
「내가 되살아난 것인가? 어떻게……?」
「뭔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감각이 느껴져! 아아!」
아주 오래전,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 인해 억울하게 눈을 감았던 옛 존재들도 있었으니.
오랫동안 망령이 된 채로 기어 다니는 혼돈이 만든 어둠 속을 끝없이 배회해야만 했던 이들은 되찾은 감각에 감격한 나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얼굴들이 바로 옆에 나타나자, 속속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물경 그 숫자가 일천 명이었다.
『되살아난 게 아니다. 신의 은총으로, 그분의 권속이자 일부로서. 그리고 그분의 전사로서 새 삶을 얻게 된 것이지.』
발데비히가 그들을 향해 외친 한마디에 모든 거인족의 영혼들이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망자 거인]
설명: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에 눈을 감아서도 구천을 맴돌아야만 했던 거인족의 전사들은, 아주 기나긴 시간이 흐른 후대에 와서야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완전한 현신을 이루기에 자아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을 자처하는 이의 신위에 존재를 기대는 한편, 수많은 망령과 영괴들을 합쳐 영체를 갖춘 뒤 강림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거인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한편, 망령과 영괴로서의 특성을 같이 겸비하고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여태껏 연우가 탄생시켰던 수많은 영괴들이며 소울 컬렉션에 예속된 망령들이 합쳐지면서, 옛 거인족들을 부활시키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망자 거인은 여태껏 그 어느 신과 악마들도 보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존재였지만.
‘죽음’에 기반하여 ‘투쟁’을 위해 부활한 그들은 단숨에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히든 스테이지에서 눈을 감았던 거인족의 수와 비교해 본다면 아주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존재를 잡아먹힌 이들이 많아서일 뿐.
사실상 이렇게나 많은 존재들이 후손의 부름에 응답한 것만 해도, 실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천 명의 망자 거인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전력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들만으로도 웬만한 중소 사회쯤은 쉽게 짓밟을 수 있을 게 분 명했다.
그리고…… 그 주인인 연우가 격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망자 거인들의 격과 전력도 덩달아 상승할 게 분명했다.
쿠어어어!
망자 거인들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선조와 후손,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저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며 함성을 한껏 터뜨렸다.
그리고.
쿵!
『우리가! 누구인가!』
발데비히가 한쪽 발을 크게 구르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다른 망자 거인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똑같이 발을 굴렀다.
쿵!
「우리는!」
「신의 전사로다!」
쿵!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쿵!
쿵!
「투쟁을 해야 한다!」
쿵!
『그렇다면! 적군에게는 무엇을 줄 텐가?』
「죽음을!」
『아군에게는?』
「승리를!」
발데비히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망자 거인들은 거기에 호응하면서 발을 거칠게 굴렀다.
그럴 때마다 대지가 쉴 새 없이 들썩였다.
공간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던, 거인족들이 전투에 나서기 직전에 벌이던 고대 의식과 동일했다.
전의(戰意)를 한껏 고양해, 투지를 발산시키기 위한 의식.
연우가 괜히 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광폭화와 관련된 버프를 강제로 걸었던 것이 아니었다.
광폭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거인족들이 갖고 있던 특성. 그것은 함께하는 동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크게 폭주하게 되어 있었다.
폭주화는 공격력 증가만큼이나 자신의 안위를 위험케 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어 도박성이 강했지만, 동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도 많다는 뜻.
그래서 거인족들은 언제나 마음 놓고 오로지 전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렇게나 많은 동료들이 존재하는데 어찌 자신이 다칠 것을 걱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에게는 위대한 신의 가호까지 더해지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형제들이여.』
발데비히는 대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망자 거인들의 시선도 똑같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배반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차피 곧 디스 플루토에 의해 짓밟혀 허망하게 사라질 터. 이미 패배가 확정된 놈들을 도살하는 것은 전사들에게 별다른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의 관심을 끄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이쪽으로 몰려오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권속들. 타계의 신을 어떻게든 모조리 축출해야,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누구인지 저들에게 보여 주자.』
발데비히가 그 말과 함께 거칠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와아아!
망자 거인들이 일제히 발데비히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단내 섞인 거친 함성이 성역을 거칠게 흔들고.
그 순간.
콰아앙!
발데비히와 망자 거인들은 타계의 신들이 몰려오는 진영 한가운데에 갑자기 내리꽂히는 거대한 불의 기둥을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화마(火魔)가 녀석들 사이를 마구 가로질렀다.
불로 된 해일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셋이나 되는 타계의 신을 날려 버린 탓에, 여태껏 싸울 생각으로 잔뜩 흥이 올라 있던 발데비히와 망자 거인들은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뒤늦게 그것이 자신들을 위한 지원이라는 것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들처럼 똑같이 멸종했다던 거대한 용이 하늘을 거칠게 날며 브레스를 뿜어 대고 있었으니까.
『……여름여왕.』
발데비히는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살짝 가늘게 떴지만.
곧 자신들의 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거니 하고 여기면서 재차 전투에 집중했다.
콰콰쾅!
그렇게 최후의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 * *
『어떻게든…… 어떻게든 사회에다 알려야 해!』
웬디고는 이를 악물면서 빠르게 도망쳤다. 배반자들과 연우 일행들이 충돌한 직후, 중립인 척하면서 뒤로 빠져 있던 그녀는 디스 플루토가 일어났을 때부터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속한 사회 ‘알곤킨’은 원래 신과 악마의 진영,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아주 작은 사회.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이들도 허다한 곳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하계로의 강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야 했지만, 계시록에 대한 강한 갈망 때문에 억지로 무리를 해서 그녀를 내려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웬디고는 사절이 되기를 자처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처절하게 후회했다.
이곳은 미친 곳이었다.
올포원과 전쟁을 하겠답시고 난리를 치는 천계도 만만찮았지만, 그동안 미물들이 사는 곳이라 무시했던 하계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타계의 신이 나타나고, 신과 악마들이 들끓으며, 거인족이 부활하려 하는 곳.
세상에 대체 이런 빌어먹을 장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구나 다른 소속이었어도 평상시 속으로 깊이 흠모하였던 가브리엘이 갈려 나가는 것을 봤을 때에는…… 정말이지 미쳤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말라흐도 미쳤고, 그만한 짓을 똑같이 저지른 르 인페르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런 괴물에게 반기를 든 사절들도 똑같았다. 제대로 된 곳이 어디 한 군데도 없었다.
애당초 연우가 천계로 돌아갈 거면 빨리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만 했다. 사회에서 아무리 반발을 했었더라도 무시를 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웬디고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 히든 스테이지로부터 도망을 선택했다.
그녀가 봤을 때, 머지않아 중립을 표한 사절들도 배반자들처럼 죽어 나갈 것이었다.
설사 살려 준다고 해도, 또다시 노예처럼 이리저리 부려 먹히다가 버림을 받을 게 분명했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연우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거인족의 부활을 순순히 천계에 알릴 리가 없을 테니까. 디스 플루토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공개할 리도 만무했다. 목격자들의 입을 단단히 봉하려 들 게 분명했다.
그러니 웬디고는 천계에 연우가 가진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연우가 가진 위험성은…… 단순한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현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딜 가려는 거지?』
웬디고는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달리던 걸음을 뚝 멈춰야만 했다. 그곳에는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웬디고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가레스. 르 인페르날의 이인자.
하지만 지금은 연우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더 유명한 자.
웬디고는 어떻게든 아가레스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다면 저자를 빨리 잡아먹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가레스, 내 말을 들……!』
콰직!
하지만 웬디고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가레스가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공간과 함께 목이 절단되고 말았다.
파스스-
아가레스는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는 웬디고의 시체를 보면서 별 흥미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 저것이 위험하고 말고 간에, 그것을 언제 수확할지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다. 너희는 그때까지 그냥 ‘개’로만 있으면 되는 것이야. 시건방진 것.』
아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창 승리의 깃발을 거머쥐고 있는 연우의 권속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붉은 혀가 메마른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그래. 계속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나라. 값진 보물이 될수록 쟁취했을 때의 기쁨도 더 커지지 않겠는가?』
* * *
그 시각.
연우는 디스 플루토와 망자 거인들이 한껏 활약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변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성역에 설치된 ‘하데스의 식령검’에 따라 거인의 인자를 다량으로 흡수합니다.]
[거인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거인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
[획득한 거인의 인자 양이 풍족합니다.]
[중단되었던 거마신룡체의 각성이 재개됩니다.]
반거인들은 일제히 탈각과 초월을 위해 기존의 육체를 벗어 던졌고.
그 버려진 육체는 고스란히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거인의 인자가 되어 연우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더구나 옛 거인족들이 망자 거인으로 부활하면서 추가로 체득한 인자도 아주 많았다.
덕분에 그동안 중지되었던 거마신룡체의 재각성을 유도할 수 있었다.
배반자들을 처리하면서 성역을 설치하는 것과 동시에 죽은 신과 악마들의 에너지는 권속들을 위한 양분으로, 그리고 버려진 거인족의 인자는 자신의 각성 재료로 사용하는 것.
애당초 이번에 펼쳐 둔 덫은 연우로서도 큰 발전을 꾀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정교하게 계획한 것.
하지만.
[격(格)에 미달됩니다.]
[네 인자의 균형이 미묘하게 어긋납니다.
[현재 각성률: 98.5%]]
추가로 획득한 거인의 인자는 연우가 여태 이룬 격을 완전히 따라잡기에 여전히 모자랐고.
‘어쩔 수 없군.’
이것까지 계산에 뒀던 연우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보험으로 뒀던 물건을 꺼내게 되었다.
애당초 이것은 처음부터 그를 위한 물건이었다. 모자란 인자의 양을 채워 줄 뿐만 아니라, 균형점을 아예 몇 단계 이상으로 격상시켜 줄, 천계 내 최고의 보물.
선악과.
연우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