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거마신룡 (3)
콰콰콰-
연우는 체내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신력을 느꼈다. 하데스의 식령검은 기어 다니는 혼돈을 먹어 치우기 위해 더 탐욕스럽게 톱니 이빨을 세게 박아 넣었다.
그런데.
『재미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듯싶더니 이런 것이었군! 그토록 빠른 성장이 가능했던 게 이것 덕분이었나? 참으로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권능이야. 직접 만들었나?』
기어 다니는 혼돈은 존재가 먹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연우를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빠르게 훑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 하데스의 식령검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한 태도.
연우는 거기서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녀석이 이걸 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태 녀석이 가진 악명에 비해 공격이 너무 쉽다 싶었더니, 설마 의도한 것이었을 줄이야.
연우는 재빨리 스킬 발동을 취소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촤라락!
기어 다니는 혼돈은 등 뒤로 훨씬 많은 촉수를 한껏 꺼내더니 도리어 연우를 자신과 함께 묶어 버렸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날 완전히 먹어 치워야지. 더, 더! 아주 완전히!』
악다구니를 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눈동자는 온통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 광기마저 잔뜩 묻어났다. 아가레스도 녀석에게는 한 수를 접어 줘야 할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연우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내뱉는 진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그제야 녀석이 무엇을 노리는 건지 눈치챈 것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에게 완전히 잡아먹혀 그와의 동화(同化)를 꾀하려는 것이다!
-아아, 여기에 그분이 계시는구나.
-우리들의 아둔한 아버지시여. 당신은 어찌도 이리 우둔하신 것입니까. 그런 몸으로 어찌 움직이시는 것입니까.
-이런 일들을 꾸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째서 주무시는 몸으로 이런 일들을 꾸미는 것입니까. 깨어나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깨어날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하시는 생각은 이 나의 머리로도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것이니.
-당신의 존재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니, 아버지, 당신의 존재 중 일부에 불과할, 파편일 이 존재를 먹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때는 그 아득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좇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너무나 재미있겠습니다.
녀석에게서는 의념이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존재가 존재이다 보니, 의식이 정제되지 않으면 앞뒤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단편적인 사고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자칫 존재만 잡아먹히고 한낱 양분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건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애당초 녀석이 그런 위험성을 전혀 모를 리도 없었다.
어쩌면 수십 혹은 수백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방대한 사념을 밀어 넣음으로써, 칠흑의 후예인 연우를 역으로 집어삼키려는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녀석이 가진 빌어먹을 호기심과 탐구욕 때문에 칠흑의 구조를 면밀히 살피고자 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도 아니라면.
‘단순히 유희를 위해 이러는 것일 수도 있고!’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얼마나 미쳤는지는 잘 알고 있는바. 앞에 추론한 두 가지 이유 말고도, 단순히 재미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제물로 삼았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우주의 그 어떤 지고한 존재들도 풀어내지 못하던 칠흑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고, 나쁘더라도 그 속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녀석이 여태껏 겪지 못한 재미난 상황이 벌어질 건 분명한 일!
연우가 그런 녀석을 보면서 ‘미친놈’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그것은 연우와 합일을 이뤘던 마성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연우보다 마성의 인격이 더 강렬하게 튀어나와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입을 잔뜩 벌리면서 흉흉하게 웃었다.
『자아도 온전하게 갖추지 못해 의사 표현도 제대로 못 하는 사념 뭉치 주제에, 감히 이 몸을 탐낸단 말이냐? 오냐. 어디 해 보아라!』
연우는 하데스의 식령검을 더 활발하게 작동시켰다. 그러자 기어 다니는 혼돈을 구성하고 있던 신력이 봇물 터지듯 그에게로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주의 창생과 함께 시작된 막대한 양의 신력과 사념. 연우는 망망대해와 같은 사념의 홍수 속에서 정신이 휩쓸리는 듯한 아찔한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그 자신도 합일을 이루고, 선악과를 통해 격을 몇 단계 이상으로 끄집어 올렸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가지 편법을 이용해서 쌓은 누각에 가까운 것.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유구한 세월 동안 밑바닥부터 천천히 쌓은 업이 거대 요새처럼 웅장했으니, 연우에 비견할 바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존재 자체로 흉포한 무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더 악착같이 하데스의 식령검을 이용해 기어 다니는 혼돈의 존재를 점점 더 탐식해 나갔고.
『카하하!』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렇게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연우에게로 욱여넣다시피 했다.
우우웅, 웅-
우우우웅!
죄악석이 더 크게 진동했다. 오만의 성질이 작동해 연우의 정신을 혼돈으로 감염시키려는 녀석의 사념을 짓누르는 한편, 탐욕의 성질이 신력을 끝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죄악석이 너무 뜨겁게 과열되자, 거마신룡체의 각성과 함께 한껏 커진 드래곤 하트가 공명하면서 죄악석의 부족한 리소스(Resource)를 지원했다.
쿠쿠쿠쿠-
쿠르릉, 콰르르-
이미 연우와 기어 다니는 혼돈의 계속된 줄다리기로, 한 지점에 집중된 중력이 거세지면서 우주 공간도 금방 무너져 내릴 것처럼 그쪽으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물질계의 차원면이 일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4차원의 휘어진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콰드드득-
그곳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 물질과 반물질 등을 모두 집어삼키는 특이점(特異點)이 존재하니. ‘이벤트 호라이즌’이라고도 부르는 지점을 따라 거대한 범위의 에고르 영역이 구성되고 말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미 연우와 기어 다니는 혼돈, 둘 모두 붕괴되는 차원에 존재가 조금씩 휩쓸리면서 그들도 언제부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연우는 오로지 악착같이 죄악석의 성질에 기대었고, 기어 다니는 혼돈은 더 큰 광기를 드러내며 사념을 더 밀어 넣었다.
그럴수록 특이점을 짓누르는 중력도 거세졌고, 점차 크기가 더해지는 특이점을 따라 차원면의 붕괴도 더 가속화되어 광속을 뛰어넘게 되었다. 아예 거대한 원심력이 작동하는 구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블랙홀의 탄생이었다.
쿠르르-
그러다.
화아악!
특이점의 크기가 너무 커진 채로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둘 사이를 둘러싸던 공간이 확 꺼지면서 전혀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아주 어둡기만 한 세계.
연우가 자신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전에.
『하하! 드디어! 드디어 왔구나! 우둔한 우리의 아버지께서 잠드신 곳에……! 다른 자식들도 미처 닿지 못한 곳에 내가 온 것이야!』
여전히 동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저 멀리서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어 대며 광소를 터뜨리더니, 하늘 날개를 한껏 크게 펼치고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다.
어디로 가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위도 아래도, 앞뒤도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공간. 더구나 연우는 분명히 방금 전까지 녀석과 티격태격하고 있었던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게 도저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녀석을 붙잡아 따지려 했는데.
『가지 마라. 거긴 위험하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연우는 화들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미후왕?”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장난기 가득한 눈매의 사내.
오래전, 그가 오행산에서 마군보다도 먼저 가로챘던 존재가 서 있었다. 회중시계 속에 갇혀 있던 동생의 사념체를 구제하려던 그를, 여름여왕과 함께 도와주기도 했던 이.
그가 여기 왜 있는 걸까?
『여긴 애송이, 네놈의 무의식 세계다.』
연우는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으로 들어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사념이 어느새 정신 영역에까지 닿자, 방어 기제로 의식을 무의식 세계로 끄집어 내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미후왕의 허물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흡수했어도, 자아가 너무 강한 나머지 여름여왕과 함께 무의식에 여태 계속 남아 있었을 테니.
한편으로는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여태 여름여왕은 자주 소환했으나, 정작 그는 유언과 다르게 소환해 준 경우가 없었으니. 사실 그러기엔 그가 쌓은 격이 너무 모자랐던 것도 컸다.
하지만 미후왕의 허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언제나 그랬듯이 유쾌하게 웃었다.
『소감이 어때? 보통은 초월적인 존재들도 자신의 무의식은 제대로 들여다보기가 힘든데 말이야.』
연우로서는 얼결에 끌려온 곳이다 보니 이렇다 하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크고 넓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아주 음침하지. 안 그래?』
미후왕은 한쪽 입술 끝을 말아올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애송이, 네놈의 속이 그만큼 음흉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반성 많이 해라.』
“…….”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말을 샤논 녀석이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다는 것 외에는.
미후왕의 허물은 입을 꾹 다문 연우를 보면서 뭐가 그리도 재미난지 크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보다 그사이에 아주 많이 컸구나. 아주 제법이야. 이제는 본체 놈이 돌아와도 어느 정도 겨뤄 볼 만하겠는걸?』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를 위아래로 훑으면서 눈을 빛냈다. 강한 호승심이 묻어났다. 만약 장소가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한번 겨뤄 보자고 했을 기세였다.
연우로서는 영 부담스럽기만 했지만.
이만큼이나 강해진 상태로도, 미후왕의 허물은 어쩐지 쉽게 다가가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저놈은 왜 쫓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서 연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기어 다니는 혼돈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녀석은 저만치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존재조차 읽을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인지 영역을 넓혀 봐도 온통 어둡기만 할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후왕의 허물이 한 말마따나, 이곳은 너무 크고 넓었으며, 음침했다.
그리고.
꺼림칙했다.
분명히 자신의 내적 세계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낯설었다.
저곳으로 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게 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단순히 마성과 합일을 이뤄서 저런 게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애당초 마성은 강한 욕망으로만 얼룩진 사념체일 뿐, 저런 깊은 무의식 세계는 가질 수가 없는 존재였다. 여긴 확실히 연우의 것이란 뜻이었다.
대체 저 깊디깊은 어둠 속에는 뭐가 있는 걸까?
무저갱.
혹은 심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곳.
기어 다니는 혼돈은 저곳에 마치 뭔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녀석이 이토록 즐거워할 만한 것은 칠흑과 관련된 것밖에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렇기에 연우로서는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이 칠흑의 후예로 낙점되었다고는 하나, 염연히 칠흑왕과는 별개의 존재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그토록 찾는 존재가 저곳에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칠흑왕의 유산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단 뜻이 될 테니까.
하지만 여태 연우는 저 어둠에 위협을 당해 본 적도 없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저놈은 저놈대로 놔두고, 네게는 네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잖아?』
미후왕의 허물이 한 대답에 연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저곳에 뭔가가 있다면 그가 말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테니. 그리고 앞선 그의 말마따나 지금 자신이 저곳으로 뛰어드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무의식 세계를 제멋대로 활개 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여기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만큼 무저갱은 깊어도 너무 깊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녀석도 아주 작아 보일 만큼.
반면에 연우는 미후왕 허물의 말처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계시록.
녀석이 가지고 있을 부분들을 탈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미후왕의 허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