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거마신룡 (5)
다행히 연우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자는……! 그렇군. 용종도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건가?」
연우를 따라 왔던 전사장의 영혼은 눈을 크게 뜨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종도 우리와는 다른 이유로 위쪽 층계로 올라가길 바랐던 이들이니. 우리가 사멸하기 전에 이미 조금씩 개체 수가 위험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고.」
고룡 칼라투스는 전사장의 영혼과 다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어 연우 일행이 왔는데도 꿈쩍도 않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그냥 ‘죽음’을 맞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의 눈에는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칼라투스는 현재 아주 깊디깊은 동면(冬眠)에 들어 있는 중이었다.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잠에라도 들고자 한 것일까.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이렇게 잠들게 놔두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갖가지 마법에 통달한 칼라투스였으니 어떻게든 수를 쓴 것이겠지.
‘잠은 나중에 깨워야겠어.’
연우는 우선 칼라투스를 여기서 떼어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자였고, 동생의 영혼이 칠흑에 있다고 말해 준 조언자이기도 했다. 아마 기어 다니는 혼돈이나 칠흑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거인족의 왕에 이어서 용종의 왕까지…… 하하! 아무래도 수집가 쪽은 너인 것 같은데? 옛날에 사라진 존재들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래도 말동무가 더 생기는 셈이니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어?』
미후왕의 허물은 동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게 재미있었던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사장의 영혼을 거둬들였을 때처럼 하데스의 식령검을 전개해 칼라투스를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덕분에 용의 인자가 소폭 상승하는 것을 느끼면서.
“미후왕.”
『오냐. 이제 준비 끝났냐?』
“예. 여기서 계시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우는 여전히 수많은 망령들이 박제되어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무의식 세계에서 대체 어떻게 계시록을 채취해야 할지 캄캄하기만 했다.
온갖 기억과 사념들이 섞여 있을 곳을 찾으려 해도, 크기가 워낙에 방대하다 보니 도무지 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계시록을 채취하려면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후왕의 허물은 오랫동안 연우의 무의식 세계에 있으면서 ‘무의식’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는 상태. 더구나 창공 도서관을 관장하는 천마의 전생이기도 하니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별거 없어. 네가 제일 잘하는 걸 해.』
“……?”
연우는 순간 미후왕의 허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늦게 말뜻을 눈치채고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거라면야.”
연우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네메시스. 니케.”
화아악!
순간, 죄악석이 크게 요동치면서 연우 뒤쪽으로 공허를 찢고 네메시스가 길쭉한 몸통을 드러냈고, 그 머리 위로 불길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가 천천히 니케의 형상을 갖췄다.
아카샤의 뱀을 먹고 탈피를 겪으면서 네메시스는 이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커진 상태였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한히 넓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거의 꽉 차는 느낌이었으니. 문제는 네메시스가 몸뚱이를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일부만 공허 밖으로 꺼냈을 뿐, 나머지는 안쪽에 말려 있었다.
『불렀나, 주인?』
『와! 여긴 또 어디야? 공기 엄청 탁해!』
네메시스의 물음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니케가 크게 날갯짓을 하면서 연우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이제는 녀석의 크기도 거의 연우의 상반신만 할 정도였다.
『오, 뭐야 이거? 좀만 더 커지면 성아, 고놈과도 거의 맞먹겠는데? 대체 이놈한테 뭘 먹인 거야?』
미후왕의 허물은 네메시스를 위아래로 훑으며 감탄사를 터뜨리다, 불길을 아름답게 흘리며 날아가는 니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요건 또 잘생겼네. 살도 토실토실하게 올랐고. 아, 후라이드 먹고 싶다. 쩝쩝. 애송이 놈이 해 줬을 때 맛있었는데.』
『……주인. 이 아저씨, 이상해. 무서워.』
연우는 입맛을 쩝쩝대는 미후왕을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대체 저런 건 어떻게 안 거야?
니케는 후라이드 치킨이 뭔지는 몰라도 괜히 불길함을 느꼈는지, 연우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연우는 한참 동안 괜찮다며 니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줘야만 했다. 녀석은 이제 성인이 되다시피 했으면서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연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면서 애교를 피워 댔다.
그러다 니케는 안정이 되었는지, 다시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올라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을 바라봤다.
『이거 전부 다 태우면 되는 거지?』
미후왕의 허물이 말한 연우의 장기(長技).
그건 바로 깽판이었다.
“어. 부탁할게.”
『히히. 맡겨만 둬. 안 그래도 사실 여기 계속 보기 싫었거든. 얍!』
니케는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다시 불길로 변하더니, 큰 대(大)자 모양으로 사방에 뻗쳐 나갔다. 푸른 불길이 단숨에 무의식 세계의 장벽에 작렬하면서 거대한 불의 해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곳곳으로 뻗쳐 나가면서 모든 것을 불살랐다.
니케는 생명의 불꽃을 품은 피닉스. 당연히 정화(淨化)의 성질이 가장 강했으니. 상성적으로 온통 혼돈과 무질서의 기운으로 가득한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는 이보다 더한 천적이 없었다.
끼아아-
키이! 키이이!
망령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댔다. 강제로 영혼이 불살라지고 찢겨 나가는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그 짧은 고통 뒤에 찾아온 것은 환희였으니. 소멸하는 망령들의 마지막 얼굴에는 진한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쿠쿠쿠쿠!
기어 다니는 혼돈의 무의식 세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처럼 공간이 와르르 떨리면서 갖가지 이상한 것들이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것은 전부 사념 덩어리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억겁의 세월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층층이 쌓았던 업(業)의 일부가 부서지면서 파편의 형태로 떨어진 것이다.
『…….』
네메시스는 말없이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어둠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조금씩 환몽(幻夢)의 기운이 뻗어 나가면서 기괴한 형태를 가지고 있던 사고의 파편들이 일제히 활자의 형태로 변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무의식 세계에 연우의 영역을 일부나마 확정시켜서, 저 많은 파편들을 연우가 구분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연우는 잡다한 편린들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골라낼 수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품속에서 검고 두꺼운 책자를 빠르게 꺼냈다.
거인족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석비를 조합해 만들었던 것.
칠흑왕의 경전서.
이것의 정체는, 말라흐에서는 ‘에녹서’라 부르고, 르 인페르날에서는 ‘레메게톤’이라 부르는 예언집(豫言集), 계시록이었다.
파라락!
경전서가 검은 광채를 뿜더니 겉면부터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연우가 창공 도서관에서 봤던 내용들이거나, 거인족들이 구한 석비들을 조합해 추가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경전서의 두께는 손바닥 너비보다도 훨씬 두꺼운데 반해, 그 안을 채운 건 겨우 1할을 넘은 게 고작이었으니.
하지만 활자화(活字化)된 사고의 파편들은 저들끼리 요란하게 결합되었다 분리되기를 반복하면서 더 다양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칠흑왕의 경전서(미완성본)’가 완본 제작에 필요한 활자들을 탐색합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활자의 수는 ???자, 페이지의 수는 ???장입니다.]
[제작을 시도합니다.]
[활자 조립을 시작합니다.]
그중 일부는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검은 책자 쪽으로 급속도로 빨려 들어왔다.
‘흡!’
그 와중에 연우는 막대한 양의 마력과 심력을 칠흑왕의 경전서에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역시 우주홍황과 삼라만상의 예언을 한데 모은 것이라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그만큼 기어 다니는 혼돈이 갖고 있던 계시록의 양이 너무 방대했던 걸까.
제작에 필요한 에너지가 결코 적지 않았다.
마성과 합일을 이루고, 거마신룡 특성까지 갖추면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필요로 하고 있었으니.
그냥 내버려 두면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 가릴 것 없이 영력이며 육체의 활력까지 몽땅 뺏길 것 같아, 연우는 진땀을 흘리면서 마력 통제에 집중을 기울여야만 했다.
웅, 우웅, 우우웅-
거기다 세 개의 칠흑왕의 형틀도 미친 듯이 떨렸으니.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몸까지 울릴 정도였다.
츠츠츠-
그렇게 빠른 속도로 경전서의 빈 종이 위에 활자가 더해지고, 페이지가 하나하나씩 추가되던 무렵.
꾸우우웅-
별안간 기어 다니는 혼돈의 무의식 세계가 크게 울렸다.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깊은 울음소리.
『이제야 눈치챘나?』
순간, 미후왕 허물의 눈썹이 가늘게 좁혀졌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무의식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드디어 눈치를 챈 것이다.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미후왕의 허물은 사실 이보다 더 늦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었다. 연우의 심연에 발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으니. 오히려 거기에 집중하면서도 여기서도 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생각될 지경이었다.
『다들 준비하고, 똑바로 정신 차려!』
전사장의 영혼은 생전에 자신이 쓰던 것과 똑같이 생긴 무기를 구현하고,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연우는 미처 그쪽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친 듯이 폭주하는 마력 폭풍을 제어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데다가, 니케는 정화를, 네메시스는 활자화에 집중해야 하니, 기어 다니는 혼돈의 방해를 막아야 하는 건 오로지 미후왕의 허물과 전사장 영혼의 몫이었다.
『지금!』
미후왕의 허물이 외치기 무섭게, 갑자기 천장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화신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상대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 거기다 가지고 있는 힘도 하나하나가 상위 신격에 준하는 것들이었다.
이곳은 녀석이 창조주나 다름없는 곳이다 보니, 심리적 방어 기제에 해당하는 놈들도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으리라.
『커져라, 여의봉!』
미후왕의 허물은 손에 쥐고 있던 여의봉을 끝도 없이 늘리면서 크게 휘저었다. 끄트머리에서 피어난 화염륜과 뇌벽세가 곳곳에 불길과 뇌기를 터뜨리면서 온 주변을 쓸어 냈다.
전사장의 영혼은 연우에 가까이 붙어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했다. 미후왕의 허물이 미처 쓸어 내지 못한 놈들이 이쪽으로 다가올라 치면, 그가 몸소 나서서 그들을 막아섰다.
쿠쿠쿠쿵!
콰콰콰-
전사장의 영혼은 그가 어떻게 거인족의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거칠게 포효를 내지르면서 무기를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공간이 갈라지면서 서너 명씩 되는 화신체들의 목이 달아났고, 그가 발을 구를 때마다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거친 장벽이 치솟아 놈들의 접근을 봉쇄했다.
갖가지 선술과 무예가 난무하면서 화신체들의 접근이 좀처럼 쉽게 이뤄지지 않을 때.
녀석들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갑자기 공격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화신체 위로 균열을 잔뜩 일으키더니, 내부에서부터 에너지를 강제로 방출시킨 것이다.
자폭이었다.
콰르르릉-
콰콰쾅, 콰콰콰!
『이런 빌어먹을 새…… 끼가!』
때문에 미후왕의 허물은 수도 없이 쏟아지는 폭발의 세례 속에서, 외부로 돌렸던 선술을 모조리 안쪽으로 되돌리면서 충격파를 중화시키거나 옆으로 흘리는 것에 더 많이 집중해야만 했다.
까닥하다간 충격파가 연우의 집중을 흩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연우가 조금이라도 마력 제어에 실패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괴롭히는구나!」
전사장의 영혼은 영체 곳곳에 상처를 잔뜩 뒤집어쓴 채, 자신의 상체를 가르려던 화신체 한 놈을 겨우 물리쳤다. 이미 그의 왼쪽 팔은 잘려 버린 상태. 회복을 시도하려 해도 경황이 없어서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런 순간에도, 화신체의 숫자는 자꾸 불어나고만 있었으니. 베어 넘긴 숫자만 해도 벌써 일천은 넘을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저 하늘에서부터 꾸역꾸역 쏟아지는 중이었다.
콰콰콰콰-
『애송아! 대체 언제 되는 거야!』
결국 미후왕의 허물이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고.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연우는 이를 악물면서 칠흑왕의 경전서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눈가에는 이미 핏대가 잔뜩 섰고, 눈자위는 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활자는 여전히 빠르게 조립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경전서를 받치고 있는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요동쳤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텼다.
‘조금만 더…… 조금만!’
[경전서 제작에 필요한 활자들을 조합 중입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활자의 수 중 79.1%를 조합하여 11페이지를 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페이지의 숫자는 3페이지입니다.]
[남은 시간은 대략 5분입니다.]
[카운트를 시작합니다.]
[00:05:00]
[00:04:59.99]
[00:04:59_98]
……
5분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을 시간.
연우는 마력이 완전히 동나 가는 것을 느꼈지만, 영력까지 쏟아부으면서 어떻게든 제작에 공을 들였다. 겨우 쌓은 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00:02:43_06]
[00:02:43_05]
……
그렇게 남은 대기 시간 중 절반가량이 흘렀을 때.
쩌걱!
어디선가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연우와 미후왕의 허물, 전사장의 영혼이 모두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고 말았다.
화아아아-
쩌거걱, 찌격!
천장에서부터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놈들이 쏟아지는 무의식 세계의 장벽 곳곳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미줄처럼 곳곳에 간 금을 따라, 뜨거운 열풍을 동반한 희뿌연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런 미친!』
미후왕의 허물은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괴성을 질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아예 통째로 폭발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본체를 날리려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는 억겁의 세월 동안 쌓은 격도 모조리 날아갈 테지만, 놈은 그런 건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계시록을 지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 자폭에 휘말렸다간, 여기 있는 그들의 자아며 의식까지도 통째로 지워진다는 것!
[00:01:32 68]
[00:01:32_67]
……
『비켜, 이 새끼들아!』
미후왕의 허물은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여의봉으로 빠르게 지워 버리고, 어떻게든 균열을 막아 보고자 그쪽으로 축지(縮地)를 전개했다.
목표는 저 머나먼 천장 끝에 달린 핵(核)이었다.
하지만 균열에서 쏟아지는 열풍이 너무 거센 나머지 축지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그때, 수만 마리나 되는 화신체들이 미후왕 허물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떨어뜨리려 해도, 한 놈이 떨어지면 세 놈이 더 달라붙으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갈라진 공간 사이사이로 용암처럼 분출되는 화염도 그를 방해하긴 마찬가지였다.
[00:00:58_46]
[00:00:58_45]
……
화아아아!
결국 열기도 더 강해지면서, 균열이 온통 무의식 세계를 전부 뒤덮어 끝내 폭발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
『안……!』
미후왕의 허물이 내뱉은 비명이 화신체 더미 속으로 파묻혔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태양처럼 발광하는 핵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는데,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무렵.
콰르르릉-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닥친 거친 숨결이, 미후왕의 허물을 덮고 있던 화신체 더미를 단박에 지우고 지나갔다.
미후왕의 허물이 뭔가 싶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데.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대는 어서 저쪽으로 움직여라. 후방에서 내가 어떻게든 엄호할 터이니.」
익숙한 생김새를 한, 150미터는 가뿐히 넘을 듯한 거대 용이 날개를 한껏 펼치며 이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방금 전의 것보다 훨씬 거친 숨결이 이글대고 있었다.
고룡 칼라투스가 눈을 뜬 순간이었다.